[일요서울ㅣ박종평 객원기자] 삶은 다양하다. 사는 이유도, 살아가는 방법도 제각각이다. 마포구 양화진에는 여러 종류의 삶 가운데 특히 소명에 따라 산 사람들, 믿음의 사람들의 안식처가 있다. 또 자신의 신념이나 존재 조건의 차이로 유랑자가 되어 우리 땅에 묻힌 사람들도 있다. 양화진외국인선교사묘원과 천주교의 절두산 순교성지가 그곳이다. 그들의 삶을 찾아가 봤다.

 서울지하철 2호선과 6호선이 함께 있는 합정역 8번 출구가 출발지이다. 지하철역에서 내려 8번 출구를 향해 가다 보면 교보문고 합정점이 있다. 한가한 시간을 이용해 답사하는 경우라면 들려 관심 분야 책을 살펴보고 답사를 시작하는 것도 좋다. 책은 ‘가장 싸게 가장 비싼 지식과 지혜를 얻는 방법’이다. 또 스승을 가장 편하게, 깊이 만나는 방법이기도 하다. 답사가 삶을 생각하고 선인(先人)의 흔적을 통해 무언가를 배우려는 행동이라면, 책을 읽어도 같은 효과를 얻을 수 있다. 또 발바닥과 발목, 무릎 등이 아프지 않다는 장점도 있다. 그럼에도 두 발로 길을 떠나는 것은 공간의 현장감과 시간의 흐름이 주는 현실감을 몸으로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현장 답사는 입체적 소통 과정이다.

포은 정몽주 선생 동상 [사진=박종평 객원기자]
포은 정몽주 선생 동상 [사진=박종평 객원기자]

 왜 그곳에 있는지 모를 정몽주 선생 동상

 ‘양화진 외국인선교사묘원’과 절‘두산 순교성지’를 가려면 7번 출구로 나가면 곧바로 갈 수 있다. 그러나 조금 돌아가기로 했다. 8번 출구 성산초등학교 방향으로 나가면 선죽교 비극 주인공, 고려 말 유학자 겸 정치가 포은 정몽주(鄭夢周, 1337~1392) 선생 동상과 망원정(望遠亭)을 찾아갈 수 있다. 출구에서 나오면 길가 기둥에 ‘망원한강공원 700m’, ‘망원정터 500m’라는 이정표가 있다. 이정표 방향을 따라 1분 정도 직진하면 양화대교와 강변북로가 갈라지는 지점 정면에 남동쪽을 바라보고 서 있는 동상 하나가 보인다. ‘포은 정몽주 선생 상’이다. 

전해 오는 초상화와 얼굴이 같다. 동상 아래 있는 공덕비에 따르면, 동상이 건립된 후 오랫동안 방치되었다가 작년(2019년)에야 동상 주변이 정리되어 지금 우리가 쉽게 볼 수 있게 된 듯하다. 동상 뒷면에 있는 건립 기록을 보면 바친 사람은 ‘정주영’이다. 또 전면에 있는 한글로 된 ‘포은 정몽주 선생 상’ 글씨도 정주영이 썼다고 한다. 현대그룹 창업자 정주영이다. 남산 안중근 기념관 앞에 있는 <장부가(丈夫歌) 어록비>처럼 다른 기업인들과 달리 회사명이 없이 ‘정주영’이라는 이름만 있다. 글씨는 명필은 아니나, 그의 인품을 닮은 듯 잔 기교 없이 간결하고 힘차다. 우리 경제가 늘 위기였다고 하지만, 지금의 상황은 전례가 없다. 그러면 지금 어떻게 이 위기를 돌파하고, 새로운 먹거리를 찾아냈을까?

 정몽주 선생 동상이 서 있는 위치는 너무 아쉽다. 승용차를 탄 운전자들의 눈에는 동상이 높고, 갈래 길 부근에 있기에 제대로 보려면 안전 운전에 해가 될 수 있다. 걸어서 이동하는 사람들이 많은 곳도 아니다. 남산2호터널 입구 근처에 있는 유관순 열사 동상처럼 ‘세워야 하니까 세운’ 동상처럼 외지다. 두 동상 모두 왜 그곳에 있어야 하는지 연고도 근거도 없다. 시민들이 편히 보고 느낄 수 있는 위치로 옮기면 안될 일인가.

희우정에서 본 한강 [사진=박종평 객원기자]
희우정에서 본 한강 [사진=박종평 객원기자]

 세종의 애민(愛民), 자주국방의 정신이 깃든 희우정

 “푸른 아지랑이 사이 화려한 정자(華亭翠靄間). 해를 둘러싼 구름, 그림처럼 보이네(雲物畫圖看). 봄 물은 비취색으로 흐르고(翡翠流春渚), 눈 덮힌 산봉우리는 연꽃을 깎아 놓은 듯하네(芙蓉削雪巒)”

  ‘망원정’에서 본 한강과 산의 아름다움을 묘사한 성종의 「망원정시(望遠亭詩)」 첫 부분이다. 세종과 성종의 자취가 서린 ‘망원정 터’로 간다. 동상 옆 강변북로에 접한 인도를 따라 600미터 정도 가면 된다. 답사 날에는 낙엽이 인도를 덮어 중간에 인도가 끊긴 듯 보였다. 되돌아 동상 앞에서 우리나라 연예 산업을 주름잡는 YG엔터테인먼트 빌딩을 거쳐 ‘망원정 터’로 갔다. YG엔터테인먼트 빌딩은 서울시청과 동대문디자인플라자와 비슷한 느낌이 드는 건물이다.

 망원정의 본래 이름은 세종이 지은 희우정이다. 망원정은 성종 때, 성종의 형인 월산대군이 ‘망원정(望遠亭, 아름다운 경치를 멀리 바라볼 수 있는 정자)’으로 고쳐 달라고 요청하면서 망원정이 된 것이다(성종 15년 10월 15일). 그래서 ‘망원정 터’에 세워진 복원된 정자를 보면, 정자 안쪽 한강 쪽에는 ‘희우정’ 현판이, ‘희우정’ 현판 바깥, 즉 강변북로에서 정자를 보면, ‘망우정’ 현판이 붙어 있다. 안팎 이름이 다르다. 현판 두 개 나란히 안팎에 붙여 놓았다면 어떨까.

 세종의 형인 효령대군이 지은 별장이다. 『세종실록』에는 희우정이 11번 언급된다. 첫 기록인 『세종실록』 세종 7년(1425년) 5월 13일에 따르면, 세종은 이 정자에서 군사들이 포(砲) 쏘는 것과 말 타고 활 쏘는 것을 관람했다. 또 정자에 막 올라갔을 때 큰비가 내려 가뭄을 해갈해 주었기에 너무 기뻐 정자 이름을 ‘희우정(喜雨亭, 기쁜 비가 내린 정자)’이라고 지어주었다. 이후부터 희우정으로 불렸다.

 세종 16년(1434년) 3월 18일에는 세종이 희우정으로 가서 한강에 띄운 우리나라 전함(戰艦)과 우리나라에 들어온 유구국(琉球國) 사람이 새로 건조한 유구식 전함을 함께 운용케 했다. 두 전함의 속도와 물 위에서의 움직임 등의 장단점을 관찰하기 위해서였다. 세종 27년(1445년) 3월 2일에는 한강에서 수전(水戰)을 연습하게 하고 세자(훗날 문종)로 하여금 관찰케 했다. 희우정은 세종의 백성을 사랑하는 마음, 나라를 지키려는 마음이 담긴 곳이다. 세종이 희우정을 지은 까닭을 잊고 풍경을 감상하는 의미를 담은 망우정으로 이름이 바뀌면서 세종의 마음도 흐려지고 조선도 경직화된 듯하다. 역사를 잊은 결과이다. 

 현재 망원정(희우정)에는 현판만 덩그러니 있다. 높이가 낮아 한강이 제대로 보이지 않는다. 지금 높이라면 세종이 수전을 관찰했다고 보기 어렵다. 1989년 복원할 때. 실록을 반영해 세종의 흔적을 엿볼 수 있도록 상상력을 조금 더 발휘했으면 어떨까 하는 아쉬움이 든다. 이곳 망원정에서도 어느 유적지에서나 있는 시민의식이 부족한 사람들의 흔적이 있다. 누군가 망원정 안의 소화기를 방사하고 훼손한 듯 ‘주의안내문’이 붙어 있다. 

양화진 외국인 선교사 묘원 안내도 [사진=박종평 객원기자]
양화진 외국인 선교사 묘원 안내도 [사진=박종평 객원기자]

 ‘양화진 외국인 선교사 묘원’ 유래

  망원정에서 곧바로 한강공원으로 나가면, 강바람을 맞으며 ‘절두산 순교성지’와 ‘양화진 외국인선교사 묘원’을 편하게 갈 수 있다. 이번 답사에서는 한강공원길을 택하지 않고, 망원정 정문으로 나왔다. 길이 끊겼다고 여겼던 그 길로 들어섰다. 정문이 있고 앞에 길이 있으면 당연히 연결된 길이 있을 듯했기 때문이다. 강변북로 옆 낙엽이 수북이 쌓인 낙엽을 밟으며 인도를 따라 정몽주 동상, 합정역으로 갔다. 쌩쌩 달리는 자동차 옆에서 발에 밟히는 낙엽소리를 듣는 맛도 나만의 시간을 지배하는 방법이다. 15분 정도 걸으면 처음 출발지였던 합정역 사거리가 나온다. 8번 출구 옆 공덕오거리 상수역 방향 횡단보도를 건너 양화진길로 들어간다. H커피전문점 앞 기둥에는 ‘양화진홍보관, 양화나루와 잠두봉 유적(절두산 순교성지), 양화진 외국인선교사 묘원’ 이정표가 있다. 바로 앞 작은공원에는 ‘절두산 순교성지’와 ‘양화진 외국인선교사 묘원’을 설명해 주는 안내판과 지도가 각각 있다. 양화진길은 지하철 2호선이 지하에서 나와 땅 위에서 당산철교를 건너가거나 그 반대로 오가는 구간이다. 철길을 보호하고 무단 침입을 방지하기 위해 사방이 덮어져 있다. 철길을 놓을 때 의도하지 않았겠지만, 천주교와 기독교의 성지를 갈라놓았다. 오른쪽 길로 가면 ‘양화진 외국인선교사 묘원’, 왼쪽 길로 가면 ‘절두산 순교성지’로 곧바로 갈 수 있다. 또 어느 길로 가도 중간에서 양쪽으로 건너갈 수 있기도 하다.

 상대적으로 가까운 ‘양화진 외국인선교사 묘원’으로 길을 먼저 잡았다.

 묘원의 유래는 1890년 7월 미국인 선교사 겸 제중원 2대 원장 헤론(J.W.Heron, 1856~1890)의 사망이 시작이다. 당시 외국인들 묘지는 인천 제물포에 있었다. 미국 공사관에서는 여름철 시신 이동 문제 등을 거론하며 「조선과 영국의 수호통상조약」을 근거로 서울에 묏자리를 요구했다. 「조약」에 따르면, 영국인이 사망할 경우 조선 정부는 장소를 무상으로 제공하게 되어 있다. 그에 따라 현재의 양화진 묘원 지역이 외국인 뫼자리가 되었다.

 처음 몇 년 동안은 우리나라에 들어온 외국인 선교사 자녀들이 묻혔다. 기후와 풍토가 달라 아이들이 먼저 세상을 떴기 때문이다. 그 뒤 우리나라에서 활동한 외국인 선교사와 다양한 국적의 일반 외국인들이 묻히기 시작했다. 양화진문화원의 조사에 따르면, 선교사와 비선교사 총 417명이 안식하고 있다고 한다. 묘역은 월요일에 쉬는 우리나라 국립문화재 시설과 달리 월요일부터 토요일까지 열고, 일요일엔 문을 닫는다.

대한매일신보 창간 베델 묘비와 무덤 [사진=박종평 객원기자]
대한매일신보 창간 베델 묘비와 무덤 [사진=박종평 객원기자]

소명의 사람들, 백계(白系) 러시아인, 프리메이슨 묘소

 묘원에 묻힌 사람들을 보면, 대개 선교사이거나, 우리나라에 살면서 크고 작게 공헌한 사람들이다. 그들 대부분 소명을 실천하기 위해 머나먼 이국땅에 왔다. 또 일부는 어느 곳에서도  편히 머물 수 없는 난민으로 이방인 중의 이방인이다.

 묘역은 알파벳 A부터 I까지 9개 구역으로 나뉘어 있다. 선교사와 일반인들이 각 구역에 혼재되어 있다. 각 구역에 있는 대표적인 인물들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A묘역에는 서울에서 결혼한 최초의 외국인 겸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적 교육기관인 육영공원 교사 벙커(Dalzell Bunker, 1853~1932)와 정동여학당(현 정신여고)를 설립한 벙커 부인 엘러스(Ellers Bunker, 1860~1938), 백정해방운동을 주장한 사무엘 무어(Samuel Moore, 1860~1906), 영국 출신 언론인으로 대한매일신보를 창간한 베델(Ernest Bethell, 1872~1909), 독일 출신 음악가이며 「대한제국 애국가」를 작곡한 에케르트(Franz Eckert, 1852~1916), 3·1운동과 제암리 학살사건을 서방에 최초로 알린 테일러(Albert Taylor, 1875~1948) 등이 있다. 에케르트는 일제강점기 우리 민족의 정신을 말살케 했던 일본 국가인 「기미가요(君が代)」도 작곡했다. 1910년 세워진 베델 비석은 일제가 칼과 망치로 쪼아 비문을 지웠다. 죽어서도 탄압을 받았다. 1964년 우리 언론인들이 본래 비문을 새긴 비석을 다시 세웠다. 종로구 행촌동에 있는 현재 복원 중인 딜쿠샤(Dilkusha)는 테일러의 집이다.

 B묘역에는 아펜젤러 선교사의 딸로 우리나라에서 태어난 최초의 서양 아이였고, 평생 우리나라 여성 교육에 노력했던 이화여대학교장 앨리스 아펜젤러(Alice Appenzeller, 1885~1950), 배화학당을 설립한 캠벨(Josephine Campbell, 1853~1920), 우리나라 사람보다 우리나라를 더 깊이 사랑했다고 하는 헐버트(Homer Hulbert, 1863~1949), 우리나라 최초 여성 교육기관인 이화학당을 설립한 스크랜톤(Mary Scranton, 1832~1909) 등의 묘소가 있다.

 C묘역에는 감리교 최초 선교사이자 배재학당과 정동교회(현 정동제일교회)를 설립한 아펜젤러(Henry Appenzeller, 1858~1902), 2대에 걸쳐 4명의 의료선교사로 헌신한 홀(Hall) 가족 합장묘가 있다. 홀 가족묘는 이들 외에 2명의 어린 자녀도 함께 묻혀 있다. 로제타 홀(Rosetta Hall, 1865~1951)은 우리나라 최초 여성전문병원인 정동 보구여관에서 의료 선교를 했고, 이때 만난 여성의료보조원 김점동을 우리나라 최초 여성 서양의사인 ‘박 에스더’로 키워냈다. 오늘날 고려대 의과대학이 된 여자의학원도 설립했다. 홀 부부의 아들 셔우드 홀(Sherwood Hall, 1893~1991)은 우리나라 최초로 크리스마스 실(Seal)을 발행했다. 고아들의 아버지이며 양화진에 안장된 유일한 일본인인 소다 가이치(1867~1962)의 묘소도 있다.

 F묘역에는 우리나라 최초 조직 장로교회인 정동교회(현 새문안교회), 연희전문학교를 세운 호레이스 언더우드(Horace G. Underwood, 1859~1916)와 그의 아들 언더우드 2세(Horace H. Underwood, 1890~1951)가 묻혀 있다.

 양화진에는 상상외의 무덤들도 있다. 묘비를 유심히 보다 보면 특별히 눈에 띄는 묘비들이 있다. 러시아정교회 십자가 형태 묘비 주인공들은 대개 러시아인 묘소(20명, 17기)이다. 11기의 프리메이슨(Freemason) 회원 출신 외국인 무덤도 있다. 러시아인 무덤은 D구역에 많다. 

세르게이 치르킨 제정러시아 외교관(백계 러시아인) 묘비와 무덤 [사진=박종평 객원기자]
세르게이 치르킨 제정러시아 외교관(백계 러시아인) 묘비와 무덤 [사진=박종평 객원기자]

 가장 대표적인 인물은 1911년에 제정 러시아 서울 총영사관 서기관으로 서울에 왔었던 세르게이 치르킨(Sergei Chirkin, 1879~1943)이다. 그는 1917년 러시아 혁명 발발 후 중앙아시아 등을 떠돌다 1918년 서울로 돌아와 국적을 잃은 난민(難民)으로 현재의 경향신문사 터에 있던 러시아 정교회에서 생활하다 사망했다. 양화진에 묻힌 다수의 러시아인들은 러시아 혁명에 반대해 고향을 떠난 이른바 ‘백계(白系) 혹은 백군(白軍)’ 러시아인이다.

프리메이슨 회원 문양과 소속 지부(롯지)가 기록된 묘비 [사진=박종평 객원기자]
프리메이슨 회원 문양과 소속 지부(롯지)가 기록된 묘비 [사진=박종평 객원기자]

 프리메이슨은 소설이나 영화에서 엄청난 비밀결사단체로 묘사되는 집단이다. 그 실체와 진실은 알 수 없으나 회원 무덤이 양화진 묘역에 자리 잡고 있다. H묘역에서는 무덤 주인공이 프리메이슨 회원이었음을 알리는 문양이 새겨진 묘비들을 볼 수 있다. 또 프리메이슨 문양은 없으나 묘비 형태가 프리메이슨과 관계있다고 주장되는 오벨리스크 형태의 묘비도 있다.

 양화진 외국인선교사 묘원에 대해서는 『이보다 더 큰 사랑이 없나니』(양화진문화원, 2015년)을 참고하면 어떤 이들이 그곳에 안식하고 있는지 자세히 알 수 있다.

 순교자의 피가 폭포처럼 흐른 잠두봉(절두산) 

 양화진 묘역을 돌아보고 이어진 ‘양화진역사공원’으로 가면 ‘절두산 순교성지’가 나온다. 공원은 외국 선박으로부터 서울을 경비하기 위해 군대가 주둔했던 ‘양화진(楊花鎭) 옛터’에 조성했다. ‘양화진(楊花津)’의 ‘진(津)’은 나루터이다. 

 ‘절두산 순교성지’의 본래 명칭은 산의 형세가 머리를 치켜든 누에를 닮았다는 뜻의 잠두봉(蠶頭峰)이었다. 병인박해(1866년) 때 약 8천여 명의 천주교 신자들의 ‘머리가 잘린 산’이란 뜻에서 ‘절두산(切頭山)’이 되었다. 순교자의 피가 강이 되어 폭포처럼 흘러내렸던 비극의 땅이다.

 ‘절두산 성지’에는 병인박해 100주년 기념성당, 한국천주교순교자박물관을 비롯해 다양한 시설이 있다. 공원을 나와 당산철교 밑을 지나면 한복을 입은 ‘이승훈 베드로 동상’이 있다. 이승훈(李承薰, 1756~1801)은 한국인 최초로 세례를 받은 천주교인이다. 1801년 신유년에 체포되어 순교했다. 동상을 지나 꾸르실료회관 쪽으로 가면 전형적인 한국인 여성을 닮은 성모가 아기 예수를 앉고 있는 ‘강변의 성모상’이 있다. 조각상 아래에는 “자비로우신 하느님 아버지, ‘코로나19’ 확산으로 혼란과 불안 속에 있는 저희와 함께 하여 주십시오.”로 시작하는 ‘코로나19 극복을 청하는 기도’가 부착되어 있다. 꾸르실료회관 자리는 병인박해 당시 천주교 신자들이 순교한 양화나루터였다고 한다. 갑신정변을 주도했던 김옥균(金玉均, 1851~1894)이 중국에서 암살된 뒤 시신으로 끌려와 다시 능지처참된 곳도 이곳 양화 나루터이다. 회관 앞에는 성경과 칼을 든 바오로의 조각상이 서 있다.

 뒤를 돌아 당산철교가 지나는 육교를 보면, 순교자들을 기념하는 벽화가 육교 양쪽 옆면에 그려져 있다. 몇 걸음 더 가면 주차장 앞에 ‘절두산 순교자 기념탑’이 있다. 병인박해 당시 순교한 이들을 기념하는 조형물이다. 일부 순교자 모습 위에 ‘무명인’이라고 쓴 글자가 눈에 들어온다. 이름조차 알 수 없지만, 그들을 기억하고 있다는 뜻인 듯하다. 무명인까지 잊지 않으려는 마음에 가슴이 먹먹해진다.

 왼쪽 길을 따라가면 최봉자 수녀의 작품인 ‘팔마(종려나무 가지)를 든 예수상’있다. 팔마는 순교자들이 하느님 나라에 들어간 것을 상징한다고 한다. 예수상 왼편에는 순교와 관련한 조형물들이 있다. 조금 더 가면 ‘성녀 마더 데레사’ 동상이 나온다. 두 손을 모으고 무언가를 응시하는 듯, 기도하는 듯하다. 마더 테레사(Teresa, 1910~1997)는 우리 시대의 가난한 이들의 어머니다. 천주교에서는 테레사 수녀를 ‘데레사’로 부른다. 몇 걸음 가면 쇠 그물로 만든 예수상이 있다. 쇠 그물이 예수를 옭아맨 듯하나, 두 팔을 벌려 누군가를 받아들이려는 듯한 모습이다. 자신의 고통은 아랑곳하지 않고 순교자들의 고통을 함께하고 그들을 하려는 것을 표현한 듯 보인다.

 다시 몇 걸음 옮기면 ‘성(聖) 요한 바오로 2세 교황(1920~2005)’ 동상이 있다. 생전의 인자한 모습 그대로다. 그 뒤편 광장에는 서서 설교하는 듯한 ‘김대건 신부상’이 있다. 절두산 성지의 가장 대표적 동상이다. 김대건(金大建, 1821~1846) 신부는 우리나라 최초 천주교 신부, 최초 유학생, 여러 나라를 여행했던 국제인이다. 1846년 한강 새남터(노량진 백사장)에서 순교했다. 이 동상은 정몽주 동상처럼 1972년 애국선열조상건립위원회와 서울신문사에서 주관해 세웠다. 조각가는 홍익대 교수였던 전뇌진이다.

 박물관 입구 쪽으로 가면 부부와 아이 하나가 함께 서 있는 ‘순교자를 위한 기념상’이 나온다. 부모와 달리 아이의 두 손은 포승줄에 묶여 있다. 그들 모두는 각기 구원을 기다리듯 하늘을 응시하고 있다. 박물관 입구의 문도 작품이다. 나무를 잘라 목책처럼 세워 놓았으나 각각의 나무가 사람 모습이다. 박물관에서 한강 쪽으로 몇 걸음 더 가면 하늘을 보며 기도하는 ‘성모상’이 서 있다. 석굴암처럼 바윗돌 속에 들어 있다.

‘성(聖) 김대건(안드레아)신부 동상 [사진=박종평 객원기자]
‘성(聖) 김대건(안드레아)신부 동상 [사진=박종평 객원기자]

 혼돈의 시대와 핍박받던 천주교

 성모상에서 왼쪽 길로 돌면 ‘척화비(斥和碑)’가 무심히 서 있다. 흥선대원군이 서양 세력의 개국 요구와 침략을 거부하고, 경계하기 위해 세운 비석이다. “서양 오랑캐가 침범하고 있다. 싸우지 않으면 화친할 수밖에 없다. 화친 주장은 나라를 팔아먹는 것이다(洋夷侵犯 非戰則和 主和賣國)”가 새겨져 있다.

 척화비 곁에는 두 손을 모으고 앉아서 기도하는 ‘성(聖) 김대건(안드레아)신부’ 동상이 있다. 기도하듯 맞잡은 두 손은 동상의 다른 부위와 달리 금색으로 반짝인다. 이곳에 온 사람들이 염원을 담아 그 손을 무수히 만졌기 때문인 듯하다. 동상을 지나면 ‘십자가의 길’이 시작된다. ‘십자가의 길’ 곳곳에 세워진 조형물 앞에는 순례를 온 천주교인들이 묵상하는 모습이 눈에 띈다. 평온히 눈을 감고 있는 그들 얼굴에는 예수의 삶, 순교자의 삶을 기억하고, 따르려는 모습으로 가득하다. 그 길을 걷다 보면, 각종 조형물과 어울리지 않는 생뚱맞은 스테인리스로 된 ‘절두산 순교성지’ 전체를 그린 안내판이 보인다. 그 바로 밑에는 나무로 된 물고기 모양의 ‘성 남종삼 흉상, 박순집 묘’ 안내판이 붙어있다. 물고기 머리 방향을 따라가면 ‘성(聖) 남종삼(南鍾三, 1817~1866) 흉상’과 순교자들의 증언자라고 평가되는 박순집(1830~1911)의 묘와 묘비, 철종의 할아버지로 신유박해(1801년) 때 사약을 받아 죽은 은언군(恩彦君, 1754~1801)과 중국인 주문모(周文謨) 신부를 숨겨 준 뒤 이유로 사약을 받고 죽은 송씨 부인의 묘비 등이 있다. 『서울역사박물관 문화유적분포지도–서울특별시(강북편)-』(서울시, 2006년)에 따르면, 은원군 묘소는 은평구 진관외동에 있다. 옛 묘소에 있던 석물과 신도비는 은평구 흥창사에, ‘은원군 사패금표비(사패지 경계 표지석)’는 어느 음식점에, 묘비는 현재의 절두산에 있다고 하는데, 절두산에서 본 그 묘비이다. 은언군 부부의 억울한 죽음과 순교한 송씨 부인을 생각해 보면 묘소 석물과 비석, 신도비 등이 흩어져 있는 것은 너무 안타깝다. 본래이 자리로 되돌리는 것도 순교자를 제대로 대우하는 것이 아닐까.

은언군과 송씨 부인 묘비 [사진=박종평 객원기자]
은언군과 송씨 부인 묘비 [사진=박종평 객원기자]
‘십자가의 길’ 마지막 12번째 조형물 [사진=박종평 객원기자]
‘십자가의 길’ 마지막 12번째 조형물 [사진=박종평 객원기자]

다시 ‘십자가의 길’로 나오면 ‘아기 예수님을 안고 있는 성 요셉상’이 있다. 수염을 기른 수더분한 옆집 아저씨 모습이다. 그 옆에는 ‘십자가의 길’ 마지막 12번째 조형물이 있다. “제12처 예수님께서 십자가 위에서 돌아가심을 묵상합시다”라는 글귀가 써 있고,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 모습이 새겨져 있다. 그의 발에 박힌 못 역시 ‘성(聖) 김대건(안드레아)신부’ 동상의 손처럼 금색으로 반짝거린다. 예수의 고통과 죽음, 부활을 믿는 사람들이 예수의 고통을 느껴보고자 만진 결과인 듯하다.

 ‘십자가의 길’을 지나면 ‘한국 순교성인 시성기념교육관’이 있다. 교육관 벽에는 이인평의 「피의 절벽」이란 시가 걸려 있다. “저 절벽 아래로 목이 떨어져 구르고 선혈 낭자하게 흘러 절두산이라 이름 붙여진 오늘날까지 암벽엔 순교의 핏빛이 그대로 배어 있다.” 이념이든 종교든 다름과 차이를 인정하지 않고, 차별하거나 목숨을 빼앗는 비인간적 행동들은 지금도 곳곳에서 일어나는 일들이다. 자신의 신념이, 종교가 절대적으로 진리라는 ‘생각의 독재에 갇힌 집단 광기’는 언제나 피를 부르는 악순환만을 초래할 뿐이다. 그 어떤 신념도, 종교도 인권과 자유, 평등과 평화보다 우선할 수 없다.

 정몽주 동상에서 권력투쟁의 비극을, 세종의 희우정과 성종의 망원정에서 느끼는 리더의 비전 차이, 양화진 외국인 선교사 묘원에서 본 소명을 따라 산 사람들과 유랑인의 비극, 절두산 순교 성지에서 본 믿음의 힘과 예수의 사랑을 느끼며 합정역으로 발걸음을 옮긴다.

* 정몽주 동상 : 마포구 합정동 401-2
* 망원정 터 : 마포구 동교로8안길 23
* 양화진 외국인선교사 묘원 : 마포구 합정동 144
* 절두산 순교성지 : 마포구 토정로6(합정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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