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통령 전용기 [뉴시스]
대통령 전용기 [뉴시스]

 

[일요서울] 국립외교원 외교사연구센터에서 ‘외교’라는 렌즈를 통해 우리 현대사를 조명하기 위해 오럴히스토리사업 ‘한국 외교와 외교관’ 도서 출판을 진행해 왔다. 지금까지 총 17권의 책이 발간됐다. 일요서울은 그중 공로명 전 외교부장관의 이야기가 담긴 책의 내용 중 일부를 지면으로 옮겼다.

이탈리아 외상 초청 방문

김영삼 대통령 인도 방문

- 1996년 1월에 팔레스타인 원조 국제회의 참석 차 프랑스를 방문하시는데 이때 이탈리아를 방문해서 외무장관회담에 참여하셨고, 이후 KEDO 참여 문제 등을 논의했다. 어떤 회의였나. 
▲ 한국·이탈리아 양자관계가 논의됐다. 한국의 OECD 가입에 대한 이탈리아 지원, 2002년 월드컵 유치가 우리 의제였는데 이탈리아 FIFA 집행위원의 원조를 바란다고 했고, 이탈리아 측에서는 한국이 이탈리아제 경전투 헬기를 구입하기를 바란다는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우리 측은 국방 당국에 이야기를 전하겠다고 했고, 그해 우리가 경전투 헬기를 구입을 했는데 어디서 구입했는지는 지금 기억이 없다. 월드컵과 관련해서는 수산나 아넬리 외상이 오찬에서 “한국하고 FIFA하고는 지긋지긋하다”라 했다. 그래서 그게 무슨 소리냐고 물었더니, 1966년 런던에서 북한이 이탈리아를 꺾었다고 했다. 밀라노팀이 주력이 되는 이탈리아를 꺾었다는 이야기였다. 아넬리 외상은 피아트 오너의 여동생이다. 

- 이해관계가 맞았네요. 
▲ 한국은 이탈리아와 1884년에 수교를 했다. 그랬다가 우리가 독립한 이후 1956년에 국교가 재수립됐는데, 그동안에 정상 교류가 없었다. 1995년 10월에 람베르토 디니 수상이 방문하려 했다가 국내 사정 때문에 오지 못했고, 이 때문에 오스카 스칼파로 대통령에 대해 방한을 항상 환영한다는, 상시초청이 있었다. 정상 외교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1990년대에는 이루어지지 않고 결국은 2009년까지 기다리게 된다. 그래서 조르조 나폴리타노 대통령이 2009년 9월 13~16일에 방한하게 되는 기록이 남았다. 무려 수교 125년 만에 방문인 것이다. 

- 생각보다 쉽지 않다.
▲ 그렇다. 이탈리아에서 외상회담을 끝내고 있는데 본국에서 미테랑 수상의 장례식에 참석하라는 전보가 날아왔다. 스칼파로우 대통령과 이탈리아 올림픽 위원장 마리오 페스칸테를 예방해서 이야기하기로 되어 있었는데 방문을 취소하고 파리로 날아갔다. 그래서 1월11일 11시에 미테랑 대통령 장례식에 참석했는데, 1년 전에 김영삼 대통령과 정상회담을 가졌던 기억이 새로웠다. 그리고 1월12일 다음 날 바로 서울로 왔다. 

- 1996년 1월에 한국 국가원수로는 처음으로 김영삼 대통령이 인도를 방문했다. 한·인도 관계의 이정표가 되는 사건이라고 본다. 추진 과정에서 어려움은 없었나. 
▲ 대한민국 건국 때 인도가 상당히 깊이 관여했다. 아시다시피 우리 정부가 수립되기 전에 UN에서 UN 감시하에 한반도에 총선거를 시행하고 총선거의 결과에 따라 한국 정부를 수립한다는 결의를 하고 나서 UNTCOK라고 하는 UN 한국임시위원단이 생겼다. 그 의장이 인도대사였는데 그가 유명한 쿠마라 메논 이다. 그가 한국임시위원단으로 와서 많은 활동을 하게 됐따. 이때 정부 수립 전이라 한국임시위원단이 교섭을 했는데, 모윤숙 여사가 담당한 것으로 안다. 모윤숙 여사가 메논과 상당히 친교가 있었다는 이야기가 있었다. 

메논은 UN대사로 가기 전에는 인도의 주영 고등판무관을 지냈다. 고등 판무관은 영연방 안에서는 대사를 뜻했다. 이 사람이 자와할랄 네루 수상의 오른팔 역할을 해서 2인자라고 불렸다고 했다. 인도 외교관들이 메논을 상당히 신화적인 존재로 이야기하던 것이 기억에 남는다. 이분이 그 이후에 인도 국방장관도 지내고, 하원 의원도 지냈다. 인도는 아시다시피 한국전쟁 때 중립국가로 휴전회담에서 포로 문제에 대해 인도안이 나오는 등, 한국과는 깊은 관계에 있었다. 그런데 인도가 비동맹국의 맹주 역할을 했기에 우리나라 1960~1970년대 대중립외교를 할 때 인도 지위의 중요성이 굉장히 컸다. 그러다가 1991년에 나라심하 라오가 총리가 되면서 시장경제로 이행하지 않았나? 그래서 우리나라와 새로운 경제협력 파트너가 될 수 있는 가능성이 생겼다. 인구 9억의 나라가 시장경제로 전환하면서 커다란 시장이 열리게 된 것이다. 

그래서 대통령 방문을 계획했다. 태국의 ASEM정상회담에 참석하기 위해서 대통령이 동남아시아에 가시게 됐다. ASEM정상회담이 3월1일인데, 29일에 방콕에 도착했다. ASEM정상회담을 가운데 끼고 2월24일부터 26일까지 인도를 가고, 싱가포르에 갔다가 방콕으로 가는 대통령 순방계획을 짜서 건의했다. 대통령도 이러한 배경을 들으시고 선뜻 가자고 했다. 한 가지 제가 장관을 하면서 김영삼 대통령에게 고맙게 생각하는 게 있다. 이분이 오랫동안 외무 의원회에 계셨다. 외교 문제에 대한 이해와 감각이 스펀지처럼 흡수력이 강했다. 그래서 장관으로 있는 동안에 대통령과 수시로 전화 연락을 하고, 대통령 주변에서도 제가 하는 전화는 항상 장벽이 없이 대해줬다. 고맙게 생각을 했다. 

그래서 바로 수락이 되어 38명의 기업대표가 수행을 했다. 대규모다. 톱 레벨의 재계 인사들이 갔다. 이때 우리 기업들도 이미 인도에 눈을 돌리기 시작해서, 대우 김우중 씨는 벌써 그해에 자동차공장과 부품공장을 세우고 있었다. 현대도 1996년에 인도에 조립공장을 만들 계획을 세우고 있었고, 결국은 인도에 현대가 자동차공장을 만들지 않았나? 그래서 이때 기업인들이 따라가게 됐다. 

그때 대통령이 도착하는 날 만찬이 샹카 다얄 샤르마 대통령 주최로 열렸고, 다음 날에는 다들 국빈으로 가는 손님들이 찾아가는 마하트마 간디 묘소에 헌화하고, 26일 월요일에는 라오 총리와 단독회담, 확대 정상회담을 갖고 동시에 같은 날 오후에 외상회담을 별도로 가졌다. 그전에 인도의 부통령, 나라야난 내외가 대통령에 예방을 왔다. 주중대사를 지낸 분이다. 

그래서 여러 이야기가 오고 가는 가운데 재미있는 기억이 한 가지 났다. 나라야난 부통령이 말하기를, 인도 인구 9억인데 그중에 3억이 중산층이랍니다. 그래서 당시 중국보다 구매력이 많다는 이야기를 했다. 이때 주로 인도 측에서 라오 수상이나 대통령, 부통령이 말씀하신 가운데 관심을 가진 것은, 인도 측은 경제를 개방하면서 사회간접자본 건설이 커다란 과제이기 때문에 한국 기업이 사회간접자본에 직접투자를 했으면 좋겠다는 강한 의욕을 표시했다. 1996년 당시 인도와의 무역 규모는 20억 달러였다. 그런데 인도 측에서는 2000년까지는 50억 달러가 될 것이라 했다. 우리도 그렇게 보고 양국의 교역, 경제 활동을 활발히 했으면 좋겠다는 이야기를 했었다. 

라오 수상이 문호를 개방한 후에 외국 자본이 많이 들어오고 있다는 이야기를 했다. 그때까지 실질적으로 들어온 외국 자본은 45억 달러라고 했다. 인가 기준으로는 120억 달러인데 실제로 들어온 것은 45억 달러, 1995년 전에만 해도 20억 달러 신규 투자가 있었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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