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훈 생가터 표석 [사진=박종평 객원기자]
심훈 생가터 표석 [사진=박종평 객원기자]

[일요서울ㅣ박종평 객원기자] 이번 탐방은 동작구다. 흑석역에서 시작해 보라매공원까지 3편에 걸쳐 쓴다. 1편은 흑석역에서 노들공원까지다. 찾아갈 곳은 소설 『상록수』, 시 「그날이 오면」으로 널리 알려진 심훈 선생의 생가터, 원불교 교당, 효자의 삶이 새겨진 효사정, 정조의 화성 행차 길에 있는 ‘용양봉저정’ 등이다. 이번 편에서는 널리 알려졌음에도 실상은 잘 모르는 심훈에 대해 주로 이야기한다.

 한강을 품고 걷는 산책길, 흑석역~노들길 구간

 흑석역에서 노들공원까지 걷는 길은 한강 옆에 있는 길이나 한강을 따라 걷거나 자전거를 타는 길과는 사뭇 다르다. 가끔 큰길을 건너는 부담이 있고, 차량과 각종 생활 소음, 아파트, 각종 건물로 시야가 답답할 때도 있다. 그러나 전체 구간은 한가한 산책객에게는 한강을 내려다보며 걷는 즐거움을 주기에 넉넉하다. 특히 이 구간은 홀로 걷기 아주 좋다.

 구간 역시 길지 않다. 천천히 한강을 바라보고, 쉬었다 가도 1시간이면 된다. 한강가에서 잠시 편안히 마음을 높고, ‘불멍’ 대신 ‘물멍’이라도 하고 싶은 사람들에게는 강력히 추천할 만한 곳이다. 특히 지하철 9호선을 타고 이 구간(노들역-흑석역)을 지나는 사람들은 그저 그 두 역 중 한 곳에서 내리면 된다. 4호선 동작역을 지나는 사람들은 동작역에서 9호선으로 갈아타고 한 정거장이면 된다. 서울에서 전철을 타고 이만큼 편리하게 한강을 접할 수 있는 곳은 많지 않다. 흑석역에서 내린다면 다음 정거장인 노들역에서, 노들역에서 내린다면 흑석역에서 다시 전철을 타고 목적지로 가면 된다.

원불교 소태산기념관 안 교당 [사진=박종평 객원기자]
원불교 소태산기념관 안 교당 [사진=박종평 객원기자]

 겨레의 삶과 꿈을 담아낸 민족 항아리, 심훈

 흑석동의 핵심 탐방지는 우리 나이로 36세에 요절한 소설가, 시인, 기자, 영화감독, 영화평론가, 영화배우, 시나리오작가, 번역가, 독립운동가인 심훈(沈熏, 1901~1936)의 생가터이다. 본명은 심대섭(沈大燮)이다. 훈(熏)은 필명이다. 현재 흑석동성당 안에 생가터 표지석이 있다. 흑석역 4번 출구에서 걸어서 5분 걸린다.

 동작경찰서 흑석동지구대 쪽에 있는 성당 정문으로 들어가면 정문 안 왼쪽 앞 화단에 ‘심훈 생가터’ 표석이 있다. 일부 인터넷 자료에는 그의 생가터 표석이 노들공원 앞 남부수도사업소 건물 근처에 있는 것으로 나오나, 현재는 성당 안에 있다. 또 일부 서적에서는 그의 출생지를 ‘중앙대 부근’으로만 언급하기도 하나 표석이 있는 곳은 성당이다.
 심훈 만큼 짧은 시간을 살며 다양한 일을 하고, 이 땅의 사람들에게 큰 업적을 남긴 사람은 흔치 않다. 청소년 심훈은 경성고등보통학교(현 경기고) 학생으로 1919년 3·1운동에 참가해 퇴학당하고, 5개월여 감옥살이를 했다. 다음은 당시 감옥에서 쓴 그의 산문시다. 그가 왜 3·1운동에 참여했는지 보여준다.

 “어머님!
  어머님께서는 조금도 저를 위하여 근심치 마십시오. 지금
  조선에는 우리 어머님 같으신 어머니가 몇 천 분이요 몇 만
  분이나 계시지 않습니까? 그리고 어머님께서도 이 땅에
  이슬을 받고 자라나신 공로 많고 소중한 따님의 한 분이시고
  저는 어머님보다 더 크신 어머님을 위하여 한 몸을
  바치려는 영광스러운 이 땅의 사나이외다”(심훈, 「감옥에서 어머님께 올린 글월」)

 풀려나온 이듬해 상해로 망명해 이동녕, 이회영, 신채호 선생 등 민족 지도자들을 만나 그들로부터 삶의 좌표를 새기는데 큰 영향을 받았다. 중국 항주에서 유학하다가 1923년 중단하고 조국에 돌아온 뒤에는 기자, 소설가, 시나리오작가, 배우, 영화감독 등을 하면서 끊임없이 자신의 길, 민족의 나아갈 길을 고민하고 개척했다.

 그는 ‘이수일과 심순애 이야기’로 널리 알려진 1925년 영화 『장한몽』의 이수일로 출연하기도 했다. 1926년에는 신문사 기자들의 임금인상 투쟁에 참여해 해직되었고, 1927년에는 영화감독으로 『먼동이 틀 때』를 제작, 단성사에서 상영하기도 했다. 최초의 제목은 『어둠에서 어둠으로』였다. 일제는 ‘어둠’의 부정적 이미지를 검열해 제목을 ‘먼동’으로 바꿨다.

 그의 삶에는 늘 검열이 따라다녔다. 그가 신문에 연재했던 『동방의 애인』·『불사조』는 검열로 중단되었고, 그의 유일한 시집인 『그날이 오면』도 검열로 출판되지 못하다가 해방이 된 뒤인 1949년에야 유고시집(遺稿詩集)으로 출판되었다. 한때 경성방송국에 취직했으나 사상 문제 논란으로 퇴직하기도 했다.

 일제는 그의 말과 글을 용납하지 않았다. 글로 살아가는 그는 결국 낙향한 부친이 자리 잡은 충남 당진으로 내려갔다. 당진에서 그의 대표작으로 알려지게 되는 『상록수』를 집필했다. 흑석동은 태어나서 30대 초반까지 다양한 방식으로 일제와 싸웠던 공간이다.

 1936년, 소설 『상록수』를 영화로 제작하려다가 일제의 방해로 중단되면서 그해 장티푸스로 경성제국대학(현 서울대) 의대 부속병원에서 급서했다.

 종재기 만한 사람들이 서로 크다 작다를 다툼하는 세상에서 그가 했던 수많은 역할을 보면, 그는 고난의 시대에 우리 겨레의 삶과 꿈을 담아낸 거대한 민족의 항아리와 같은 사람이다.

심훈의 「감옥에서 어머님께 올린 글월」 원고와 일제 검열본 모습(『심훈문학전집 1  그날이 오면』, 심훈, 심훈기념사업회, 2000년) [사진=박종평 객원기자]
심훈의 「감옥에서 어머님께 올린 글월」 원고와 일제 검열본 모습(『심훈문학전집 1 그날이 오면』, 심훈, 심훈기념사업회, 2000년) [사진=박종평 객원기자]

 붓은 빼앗을 수 있으나, 마음을 빼앗을 수 없다

 현존하는 일제강점기 그의 시집 ‘『그날이 오면』 원고본’(원제는 “「심훈(沈熏) 시가집(詩歌集)」 제1집, 1919-1932)을 보면, 일제가 그의 글을 얼마나 두려워했는지 살필 수 있다.

 출판을 위해 총독부에 제출했던 시집에는 검열 결과를 나타내는 무수한 붉은 줄과 삭제 도장이 찍혀 있다. 시집 원고 표지에는 붉은 도장으로 “일부분 삭제” “치안 방해” 등이 찍혀 있다. 또 시 곳곳도 마찬가지다. 삭제 또는 수정을 뜻하는 붉은 줄이 그어져 있고, ‘삭제’ 도장이 어지럽게 찍혀 있다.

 그를 대표하는 시 「그날이 오면」은 본래 1930년 3·1절에 맞춰 신문에 발표된 시이다. 시집 출판 원고에 수록된 시를 보면, 그는 신문에 실린 시를 스크랩한 상태에서 신문 발표 제목인 「단장(斷腸) 2수(首)-구(舊) 유고(稿中)에서-」를 시의 첫 행에 맞추어 「그날이 오면」으로 수정해 놓았다. 이미 발표된 시였음에도 총독부에서는 출판 원고 속 시 전체에 붉은 줄을 긋고, ‘삭제(削除)’ 도장을 위아래에 각각 찍어놓았다.

 심지어 3·1운동으로 감옥에 갇혀 있을 때 쓴 산문시인 「감옥에서 어머님께 올린 글월」은 일일이 붉은 줄을 긋기도 귀찮았는지 아예 통째로 붉은 꺾쇠 표시를 하고 삭제 도장을 찍었다.

 그는 붓의 중요성을 다음과 같이 노래했다.

  “한 자루의 붓, 그것은 우리의 쟁기요, 유일한 연장이다
   …… 
   그러나 파랗고 빨간 잉크는 정맥과 동맥의 피
   최후의 한 방울까지 종이 위에 그 피를 뿌릴 뿐이다.
   비바람이 험궂다고 역사의 바퀴가 역전할 것인가.
   마지막 심판날을 기약하는 우리의 정성이 굽힐 것인가
   동지여, 우리는 퇴각을 모르는 전위의 투사다.
   ……
   오오 붓을 잡은 자여 위대한 심장의 파수병이여!” ( 심훈, 「필경(筆耕)」, 『심훈문학전집 1 : 그날이 오면』, 심훈기념사업회, 2000년)

 그에게 붓과 그 결과물인 글은 무기 그 이상이다. 그 자신의 피였고, 역사의 수레바퀴를 미래로 움직이는 에너지였다. 일제는 그런 그의 붓과 글을 검열로 삭제하면서 빼앗았다.

 일제의 난도질로 붓을 빼앗긴 그는 첫 번째이자 마지막 시집이 되었던 그의 시집 출판을 멈췄다. 일제의 입맛에 맞게 수정할 수 있으나, 그런 글은 그의 글, 그의 무기, 역사의 동력이 될 수 없기 때문이다. 붓을 꺾을지언정, 생각을 꺾을 수 없다는 지사(志士)의 결의였다. 그럼에도 그는 좌절하지 않았고, 끝내는 그가 꿈꾼 ‘그날이 오면’의 세상을 만들었다.

 원고본 한쪽 한쪽 펼치다 보면 붉은 줄이 어지러이 쳐진 원고, 붉은 도장이 찍힌 원고는 마치 새빨갛게 달군 인두로 그의 온몸을 지지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든다. 또 그의 떨어진 살점과 핏방울, 민족의 피눈물이 떨어져 얼룩진 듯하다.

 안경쓴 미남, 심훈 안경의 비밀

 영화배우로도 활약할 만큼 아주 미남이었던 그의 사진에는 비밀이 있다. 사진을 보면 그는 안경을 쓰고 있다. 그 안경은 시력이 나빠 쓴 안경이 아니다. 19살 청년 망명객 심훈의 초심(初心)이 생생히 살아있는 상징이다. 그의 셋째 아들 심재호 선생이 쓴 『심훈문학전집 1 : 그날이 오면』의 ‘연보’에 따르면, 안경은 3·1운동 후 상해로 망명할 때 변장 수단이었다고 한다.

 그가 쓴 「단재와 우당」(『동아일보』, 1936년 3월 12일)에서는 안경 이야기는 없고, 다만 청복(淸服, 중국옷)으로 변장했다는 것만 나온다. 아들의 기록과 그 자신 기록을 함께 보면, 그는 망명 당시 중국옷을 입고 안경을 썼던 듯하다.

 훗날 고국에 돌아와서는 중국옷은 벗었으나 안경만큼은 벗지 않았다. 오늘날 연예인들의 이미지 관리를 위한 가짜 안경과 같은 용도와는 전혀 다른 듯하다. 훤칠한 키와 미남 영화배우 외모로 보면 안경 따위는 오히려 불편한 장식품이기 때문이다. 안경을 계속 꼈던 이유는 망명할 때의 초심을 지키고, 세상을 조금 더 밝은 눈으로 냉철하게 보고자 함이 아니었을까. 그는 죽어가는 생명에서 삶을 보고자 했고, 오늘의 암흑 속에서 밝은 봄빛을 보고자 했다. 

  “지난 겨울 눈밤에 얼어죽은 줄 알았던 늙은 거지가
   쓰레기통 곁에 살아 앉았네.
   허리를 펴며 먼 산을 바라다보는 저 눈초리!
   우묵하게 들어간 그 눈동자 속에도
   봄이 비취는구나, 봄빛이 떠도는구나.
   ……
   사랑하는 젊은 벗이여,
   그대의 눈에 미지근한 눈물을 거두라!
   그대의 가슴을 헤치고 헛된 탄식의 뿌리를 뽑아버리라!
   저 늙은 거지도 기를 쓰고 살아왔거늘
   그 봄도, 우리의 봄도, 눈앞에 오고야 말 것을
   아아, 어찌하여 그대들은 믿지 않는가?”  (심훈, 「거리의 봄」)

 그런 자세 때문인지 그가 추구했던 사상은 항상 변했다. 그의 지인들인 신채호, 이회영, 박열, 박헌영 등을 통해 민족주의, 무정부주의, 사회주의, 공산주의 등의 사상을 흡수했으나 그는 어떤 사상에도 갇히지 않았다. 오직 현실의 조국과 식민지하 조선 인민의 삶을 바꿀 그 만의 사상을 찾아갔다.

 심훈은 특정한 한 시기의 말과 글, 인간관계로만 그의 전모를 예단해서는 안될 거인이다. 또 그의 다양한 활약에 비추어 보아도 오늘날처럼 전문가 영역의 틀로 그를 제한해서도 안된다. 한편으로는 스페셜리스트였고, 다른 한편으로는 분야를 넘나들며 보편적인 가치와 시대를 관통하는 진리를 추구했던 제너럴리스트이다.

 그는 정도(正道)를 찾는 사람, 큰바다를 향해 항해하는 사람이었다. 민족의 봄을 만들려 했고, 알리려 했던 전령사였다.

 “진달래 동산에 새 소리 들리거든
  너도 나도 즐거이 노래 부르자
  범나비 쌍쌍이 날아들거든
  우리도 덩달아 어깨춤 추자.
  밤낮으로 탄식만 한다고 우리 봄은 저절로 굴러들지
  않으리니......
  그대와 나, 개미떼처럼 한데 뭉쳐 땀을 흘리며 폐허를 지키고
  굽히지 말고 싸우며 나가자.
  우리의 역사는 눈물에 미끌어져
  뒷걸음치지 않으리니......” (심훈, 「봄의 서곡(序曲)」)

 그런 까닭에 박헌호(성균관대 대동문화연구원 연구교수)는 『상록수』에 대한 작품해설에서 그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상록수』만의 작가가 아니다. 그는 『직녀성』의 작가이자 『그날이 오면』의 작가. 소설보다는 영화에 열광했던 영화인이며, 영화가 지닌 대중 예술의 파급력을 확신했던 선구자. 시의 열정과 함께 영화와 장편이 지닌 대서사 양식의 힘을 직감했던 근대 예술가. 대중적 형식 속에 민족 현실의 속내를 어떻게 담아낼 것인지 고민했던 고집쟁이. 그의 사상적 진폭은 식민지 조선사상사의 계보 전체에 걸쳐 있으나 그가 놓일 위치는 쉽사리 정해지지 못했다.”(심훈, 『상록수』, 문학과지성사, 2005년).

 박 교수가 놓친 다른 한 지점은 그가 번역가이기도 했다는 점이다. 그는 펄벅(Pearl S. Buck)의 『대지』를 우리나라에 처음 번역한 사람이다.

심훈의 「그날이 오면」 수정 원고와 일제 검열본 모습(『심훈문학전집 1  그날이 오면』, 심훈, 심훈기념사업회, 2000년) [사진=박종평 객원기자]
심훈의 「그날이 오면」 수정 원고와 일제 검열본 모습(『심훈문학전집 1 그날이 오면』, 심훈, 심훈기념사업회, 2000년) [사진=박종평 객원기자]

 그의 결기와 삶이 담긴 『그날이 오면』 원고 영인본을 보려면 그의 아들 심재호 선생이 만든 원본 영인본이 실린 『심훈문학전집 1 : 그날이 오면』을 참고하면 된다. 소설 『상록수』나 기타 다양한 소설 등이 있으나, 그의 정수는 『그날이 오면』에 들어 있는 듯하다.

 1936년 그가 사망하기 며칠 전에 쓴 마지막 시는 베를린올림픽에서 손기정 선수가 우승한 것을 듣고 즉석에 쓴 시가 다음의 시다.

  “전 세계의 인류를 향해서 외치고 싶다 !
   인제도 인제도 너희들은 우리를 약한 민족이라고 부를 터이냐!”(심훈, 「오오, 조선의 남아여」)

  
  그가 손기정을 통해 보았던 조선의 남아들은 지금 세계를 호령하고 있다.

효사정 [사진=박종평 객원기자]
효사정 [사진=박종평 객원기자]
심훈 동상(효사정 문학공원 안) [사진=박종평 객원기자]
심훈 동상(효사정 문학공원 안) [사진=박종평 객원기자]
심훈 「그날이 오면」 시비(효사정 문학공원 안) [사진=박종평 객원기자]
심훈 「그날이 오면」 시비(효사정 문학공원 안) [사진=박종평 객원기자]

한강을 바라보며 ‘물멍’하기 가장 좋은 효사정

 심훈의 생가에서 다시 흑석역으로 가면 1번 출구 앞에 원불교 교당이 있다. 원불교를 창시한 ‘소태산 박중빈(朴重彬, 1891~1943) 기념관’이 그 안에 있다. 기념관에서 나와 노들역 방면으로 왼쪽에 효사정공원이 있다. 공원 안에는 효사정과 심훈 동상 및 심훈과 관련한 안내판들이 있다.

 효사정(孝思亭)은 세종 때 우의정이었던 노한(盧閈, 1376~1443)의 효성이 담긴 정자이다. 『신증동국여지승람』·「금천현」에 따르면, 노량진 나루터 남쪽 언덕에 노한의 별장과 정자가 있었고, 노한도 그곳에 묻혔다고 한다. 부모님이 돌아가시자 노한은 근처에 묘소를 두고 3년 동안 시묘살이를 했고, 그 뒤에도 그곳을 떠나지 못해 정자를 짓고 부모님을 추모하다가 자신도 그곳에서 귀천했다고 한다.

 노한은 태종 이방원과는 동서 관계이다. 그의 아들 노물재와 세종도 동서 관계이다. 아버지와 아들이 모두 태종과 세종의 동서인 특이한 사례이다. 『금양잡록』을 저술한 강희맹(姜希孟, 1424~1483)의 아버지 강석덕은 노물재와 세종과 동서관계이다. 노물재의 아들 중 노사신(盧思愼, 1427~1498)은 집현전 학사 출신으로 『경국대전(經國大典)』, 『삼국사절요(三國史節要)』, 『동국통감(東國通鑑)』,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 등의 편찬에도 참여했던 대학자이다.

효사정에서 본 한강과 강북 [사진=박종평 객원기자]
효사정에서 본 한강과 강북 [사진=박종평 객원기자]

 강희맹이 쓴 「효사정기」에 따르면, 그의 아버지 강석덕이 노한의 정자에 ‘효사정’이란 이름을 지었다고 한다. 성종 때 없어졌다. 일제강점기에는 현위치에 일본 신사(神社)가 들어서기도 했다. 6·25때는 북한군의 한강 도하를 저지하려는 국군이 효사정 부근으로 도강한 북한군과 전투를 했던 장소이기도 하다.

 현재의 효사정은 지형 변화 등으로 조선 시대 효사정 위치를 알 수 없어, 추정해 1993년에 재현한 것이다. ‘효사정 현판’은 당시 대통령으로 노한의 17대손인 노태우의 친필 글씨이다.

 효사정공원은 짧은 구간이나 한가하게 한강을 바라보며, 쉬기에 좋은 아주 평안한 곳이다. 효사정에서 강북을 바라보면 왼쪽으로는 원효대교, 오른쪽으로는 국립박물관까지 막힘 없이 잘 보인다. 언덕 위라 바람도, 햇볕도 좋다. 심훈 동상과 심훈 관련 설명 안내판도 잘 정비되어 있어 심훈을 사색하기에 좋은 곳이기도 하다.

학도의용병 현충비(효사정 문학공원 안) [사진=박종평 객원기자]
학도의용병 현충비(효사정 문학공원 안) [사진=박종평 객원기자]
‘주교사 터’ 표석(한강대교 남단 교차로 앞) [사진=박종평 객원기자]
‘주교사 터’ 표석(한강대교 남단 교차로 앞) [사진=박종평 객원기자]

 외면당하고 잊혀진 포항 전투 영웅들의 추모

심훈 동상, 시비 「그날이 오면」을 지나면, ‘학도의용병 현충비’가 나온다. 이 비석의 주인공들은 6·25때인 1950년 8월 11일 11시간 동안 북한군의 포항 시내 진입을 저지하다가 전사한 48명의 학도의용군을 추모 및 기념하는 비석이다.

 포항에서 활약한 학도의용군의 모습은 영화 『포화 속으로』(이재한 감독, 차승원·권상우 등 출연)를 통해 당시의 모습을 엿볼 수 있다. 학도병의 6·25때 활약 모습을 담은 다른 영화로는 영화 『장사리 : 잊혀진 영웅들』(곽경택 감독, 김명민 출연)도 있다.

 이 추모비의 비문은 세월이 지나서인지 흐릿해 읽기 힘들다. 동작구에서 설치한 듯한 안내판에도 비문 내용은 나오지 않는다. 가슴 아픈 기억, 또 서울, 혹은 동작구와 관계가 없는 포항전투추모비라고 해서 홀대하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6·25는 지금도 현재 진행형이다. 그 옆 효사정이나 심훈 관련 안내판 만큼은 아닐지라도 조금은 더 눈에 띄게 해야 하는 것 아닌가. 이제라도 새로이 비문과 전사 학도병 명단, 전투의 의의 등을 시민들이 마음으로 읽을 수 있도록 안내판을 새로 만들면 어떨까.

 이런 일은 어떤 이념의 문제가 아니다. 현재의 역사이고, 우리의 아픈 역사이기 때문에 더더욱 필요하다. 게다가 바로 인근에 국립현충원도 있지 않은가.

 현충비를 지나면 계단길에 심훈과 관련한 다양한 정보 안내판이 설치되어있다. 계단길을 내려 오면 한강대교 아래다. 

용양봉저정 [사진=박종평 객원기자]
용양봉저정 [사진=박종평 객원기자]

일제의 오락장이 되었던 정조의 행차길 속 행궁

 상도동 방향 횡단보도를 건너 양녕로 길로 용양봉저정 방향으로 20여 미터 가면 큰길가에 ‘주교사(舟橋司) 터’ 표석이 있다. 주교사는 정조가 화성행궁으로 행차할 때 한강을 도강하는 부교(浮橋, 배다리)를 설치하거나 조운(漕運)을 담당했던 관청이다.

 표석 바로 위에 한옥이 보이는데, ‘용양봉저정(龍驤鳳翥亭)’이다. 이 역시 정조의 화성 행차 때 한강을 건너와 쉬어가던 행궁(行宮, 임시 궁궐)이다. “용이 뛰놀고 봉황이 날아가는 것 같다”란 뜻이 담긴 정자이다.

 정조가 배다리를 통해 한강을 건너는 모습은 현재 삼성미술관리움에 소장된 『화성행행도팔첩병(華城行幸圖八疊屛)』 속 「한강주교환어도(漢江舟橋還御圖)」에서 그 엄청난 규모와 장관을 자세히 볼 수 있다. 대선 30여 척을 한강 위에 나란히 놓고 배 위에 긴 판자 1천여 장을 깔아 다리를 만들었다고 한다.

 본래 선조 때 영의정 이양원의 별장터였다가, 구한말에는 개화파 유길준이 살았고, 1930년대에는 일본인이 소유하면서 온천, 식당 등의 오락장으로 사용되기도 했다고 한다. 

 ‘용양봉저정(龍驤鳳翥亭)’에서 노들역 3번 출구로 들어가 2번 출구로 나오면 ‘남부수도사업소 노량진배수지’ 입구 주차장이 나온다. 래미안 트윈파크 아파트 방향으로 녹색 철망으로 된 담장을 따라가면 끝에 ‘노량진 터’ 표석이 있다.

 노량진은 서울의 5개 나루 중 가장 대표적인 나루이다. 숙박시설이 남쪽 언덕에 있었다고 한다. 서울이 확대되면서 한강의 교통량이 증가하자 노량진 주변에 동작나루와 흑석나루가 생겨나기도 했다. 노량진은 수양버들이 늘어서고 백로가 놀던 곳이라 노들나루, 한자로 노량진이되었다고 한다. 2편에서는 사육신묘부터 이어간다.

‘노량진 터’ 표석 [사진=박종평 객원기자]
‘노량진 터’ 표석 [사진=박종평 객원기자]

* 심훈 생가터 표석 : 동작구 흑석동 186 흑석동성당 안 (심훈 본적 및 소년시절 옛주소 : 경기도 시흥군 신북면 61-10)
* 원불교 소태산 기념관 : 동작구 흑석동 1-3
* 효사정 및 효사정 문학공원 : 동작구 흑석동 141-2
* 한강수사자조혼비 : 본동 475-1
* 주교사 터 표석 : 동작구 본동 10-23. 한강대교 남단 교차로 앞 큰 길가
* 용양봉저정 : 동작구 본동 10-30
* 노량진 터 표석 : 남부수도사업소 노량진배수지 주차장의 래미안 트윈파크 방향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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