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요서울ㅣ박종평 객원기자] 이번 탐방지는 성동구 지역이다. 지하철 2호선 뚝섬역 6번 출구에서 시작해 경의중앙선 옥수역에서 종료하는 코스이다. 3편에 걸쳐 소개하되 이번 1편에서는 ‘성덕정 터’와 ‘수도박물관’ ‘살곶이다리’를 중심으로 소개한다.

 사라진 ‘성덕정 터’ 표석

 첫 번째 목적지는 ‘성덕정(聖德亭) 터’이다. 뚝섬역에서 10분 정도 걸린다. 『서울특별시 동명연혁고(Ⅵ) : 성동구편』(서울특별시사편찬위원회, 1981년)에 따르면, “이 동의 110번지 「천주교 성당자리」는 경기도 고양군에 속했을 때 둑도면사무소 자리였고, 조선시대 「성덕정」이 있던 자리로서 임금이 가끔 이 정자에 나와서 말 기르는 것과 군대의 연무(鍊武)하는 것을 사열하기도 했던 곳이다. 이곳에는 수령이 약 500~600년 정도되는 느티나무 한그루가 서 있어 ……”라고 나온다.

 또 성수동 1가에 대해 “성수동(聖水洞) 명칭은 「성덕정」과 「수원지(水源地)」의 두음(頭音)을 따서 성수동”이라고 했다고 나오고, 성수동 2가에 대해서는 “동명은 성수동 1가와 마찬가지로 옛날 성덕정이란 정자와 뚝도수원지가 있던 곳이라 하여 각각 첫머리 글자를 따서 지었다는 설과 한강을 낀 물가 마을로 한강 물을 식수로 사용하는 깨끗하고 고마운 물이라는 뜻으로서 「성수」라는 동명이 붙게 되었다고 전해온다”라고 하고 있다. 성수동 1가와 다리 2가에서는 별도의 동명 유래가 언급되고 있다.

 성동구청에서 제작한 지도에도 큰 나무 아래 ‘성덕정 터’가 표시되어 있다. 또 어느 인터넷 블로그에는 ‘성덕정 터’ 표석 사진도 있었다.

 왕이 군사 훈련을 참관했던 정자, ‘성수동’이라는 이름을 짓게 만든 성덕정이었기에 가봐야 할 곳이라 찾아갔다.

 먼저 정가가 있을 만큼 경치가 좋은지 성당 주변을 살폈다. 생각보다 지대가 낮았다. 주변에도 성당 안 어디에도 표석이 없었다. 성당 안에 수령 300년의 느티나무 두 그루만 있었다.

 성당 관리자에게 문의했더니, 예전에 표석이 있었으나 이유는 모르나 지금은 없어졌다고 한다. 성동구 안내 지도에 존재하는 성덕정, 성당을 둘러싼 ‘성덕정길’, 인터넷에 있는 ‘성덕정 터’ 표석 사진도 있으나 정작 성덕정을 알리는 표석이 없었다.

한강 [사진=박종평 객원기자]
한강 [사진=박종평 객원기자]

 역사 기록에는 나오지 않는 성덕정

 탐방 뒤에 성덕정에 대한 역사 기록을 찾아보았다. 조선왕조실록과 승정원일기, 고전번역원의 한국고전종합DB 그 어디에도 성덕정이 나오지 않았다. 정조 때 저술된 서울의 각종 시설을 소개한 『한경지략(漢京識略)』에도 한강변 인근 정자인 제천정(濟川亭)·낙천정(樂天亭)·화양정(華陽亭)·황화정(皇華亭)·유하정(流霞亭) 등은 나오나 성덕정은 나오지 않았다.

 현대에 저술된 서울의 역사를 가장 세세히 살피고 정리한 『서울육백년⑤ : 한강·한강유역』(김영상, 대학당, 1996년)에서는 “성수동 1가에 남아 있던 성덕정 터가 바로 무예를 수련하던 터전이었고 성덕정은 바로 무열을 사열하던 정자”라고 했으나 어떤 근거에서 ‘남아 있던 성덕정 터’라고 했는지 기록하지 않았다.

 관찬 역사서인 실록이나 기타 여러 문헌에 성덕정이 등장하지 않는 것을 보면 ‘성덕정’은 문헌 기록이 아니라 구전으로 전해진 듯하다. 지금 어떤 이유에서 ‘성덕정 터’ 표석이 없어졌는지는 확인하지 못했다. 그러나 현재 성동구 관광지도에도 실려있고, 성수동의 유래도 되며, ‘성덕정길’ 이름도 있다. ‘성덕정’의 존재 사실 여부를 명확히 해야 할 듯하다.

 왕이 군대 훈련을 지켜본 곳이었다는 성덕정을 단순한 구전이나 전언만으로 그 존재를 인정한다면 지나친 일인 듯하다.

 성덕정에 대한 최소한의 문헌 기록이라도 확인해 현재의 ‘성덕정 터’가 실린 지도나 ‘성덕정길’에 정당성을 마련해야 할 듯하다. 확인된 경우, 조금 더 치밀한 고증을 바탕으로 ‘성덕정 터’ 표석을 새로이 세워두는 것은 두 말할 필요도 없다.

 탐방을 다니다 보면, 가끔 과대포장되거나, 허위 사실이 역사적 사실로 둔갑된 경우를 보게 된다. 최소한의 근거는 필요하다. 가짜를 진짜로 만드는 것은 역사를 왜곡하는 것이다.

 아쉬운 마음으로 ‘성덕정 터’였다는 성수동 성당을 나왔지만, 성당 입구 왼쪽에 붙어있는 ‘한국꾸르실료운동의 태동’이란 동판을 보고 마음의 위안을 삼는다. 이 성당에서 1967년 5월에 처음 꾸르실료운동이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꾸르실료운동은 1940년 후안 에르바스(Juan Hervas)가 시작한 것으로 천주교회에서 실시하는 평신도에 대한 교육운동이다. 천주교인, 꾸르실료 운동에 참여한 사람들이라면 한번은 들려야 할 곳이다.

뚝도 수원지 제1정수장 입구 (수도박물관) [사진=박종평 객원기자]
뚝도 수원지 제1정수장 입구 (수도박물관) [사진=박종평 객원기자]

 북청물장수를 대체한 수돗물
 
 다음 목적지는 ‘수도박물관’이다. 성당에서 뚝섬한강공원 방향으로 간다. 몇 분 가면 ‘한강공원 성덕정 나들목’이 나온다. 강변북로 아래 굴다리이다. 굴다리 앞 오른쪽에는 ‘뚝섬만세운동기념비’가 서 있다. 1919년 3·1운동 때 이곳에서 만세운동을 했다고 한다. 기념비는 두 팔을 들어 만세를 부르듯 한 모습을 형상화했다고 한다. 작가는 조각가 배수영이다.

 굴다리로 들어서면 한강이 나온다. ‘성덕정 터’는 확인치 못했으나 그 덕분에 한강을 아주 넉넉하게 바라보고 걸을 수 있었다.

 때마침 보슬비가 내려 산책하는 사람도 없어 고즈넉이 걸을 수 있었다. 한강길은 그 어디라도 언제나 마음을 푸근하게 해준다. 성수대교 방향으로 몇 분 가면 수도박물관으로 갈 수 있는 다리와 엘리베이터가 보인다. 다리 위 전망대에서 한강을 바라보고 숨 한 번 크게 쉰다. 다리 아래 강변북로에는 쏜살같이 달려가는 차들이 오고간다. 다들 바쁘다. 다리를 건너가면 오른쪽 끝에 잔디밭 위에 환풍구 같은 것들이 줄지어 있는 것이 보인다. 그곳이 수도박물관에 있는 ‘완속여과지(물을 정화하는 시설)’ 시설이다.

 계단을 내려가면 한강사업본부와 수도박물관 방향으로 갈래길이 있다. 수도박물관으로 간다. 수도박물관 입구에 도착하면 ‘물과 환경전시관’과 박물관 방향으로 갈린다.

 ‘물과 환경전시관’ 앞에는 시멘트로 만들어진 ‘경성수도상수보호구역표’와 ‘둑(纛)’이 서 있다. ‘둑(纛)’은 임금의 행차 앞이나 군대의 대장 앞에 세우는 군기(軍旗)이다. 큰 창의 창끝에 붉은색 실을 둥글게 아래로 늘어뜨린 것이다.

 이 둑은 고대 중국에서 황제와 싸웠다는 ‘전쟁의 신인 치우(蚩尤)’를 상징한다. 군대에서 출전을 하기 전이나, 봄의 경침과 가을 상강에 둑을 앞에 놓고 제례를 지냈다. 이순신 장군의 『난중일기』를 보면, 1593년 2월 5일 경칩에 둑제를 지냈다고 나온다. 그 때는 경칩이기도 했지만, 6일 출전을 하기 위해 전쟁의 신 치우에게 승리를 기원하는 의미에서 둑제를 지냈던 듯하다.

 수도박물관은 ‘물과 환경전시관’에 들려 후문으로 나가서 가거나, 전시관 오른쪽에 있는 길로 가면된다. 전시관 오른쪽 길을 보면 멀리 그 끝에 옛날 붉은 벽돌 건물이 보인다. 그곳이 박물관이다.

 이 박물관은 1908년(융희 2년) 완공된 우리나라 최초 정수장인 ‘뚝도수원지 제1정수장’을 2008년에 ‘수돗물 공급 100주년’을 기념하면서 새로 조성한 것이다. 제1정수장이 박물관 본관이다.

 이 제1정수장은 우리나라에 전기와 전차를 처음 도입한 미국인 콜브란(C.H.Collbran)과 보스트위크(H.R.Bostwick)가 시공했다. 콜브란 등은 1903년에 고종에게 ‘상수도 시설경영에 관한 특허’를 받았으나, 곧 영국인이 설립한 대한수도회사(Korean Water Works Co.)에 특허권을 양도했다. 1906년 8월, 대한수도회사에서 다시 콜브란 등에게 공사 시행의 도급을 주어 공사가 시작되어 1908년 8월에 준공했다. 여기에서 생산한 수돗물을 서울 사대문 안과 용산 일대의 주민 12만 명에게 공급했다.

 『다큐멘터리 서울 정도 육백년 4』(이경재, 서울신문사, 1993년)에 따르면, 이 정수장이 생기기 전에는 서울 각 가정의 우물과 한강물이 주요 식수원이었다. 한강물을 길러 파는 물장수도 많았다고 한다. 특히 함경도 출신 고학생들이 서울에 와서 공부를 할 때 물을 길러 파는 아르바이트를 많이 했다고 한다. 그들 중 함경도 북청 사람들이 가장 많아 ‘북청물장수’라는 말이 생겨났다고 한다.

 그 때문에 시인 김동환(金東煥, 1901~1958?)은 「북청물장수」란 시를 짓기도 했고, 1940년대 가수 백난아는 「북청물장수」(처녀림 작사, 김교성 작곡)란 노래를 부르기도 했다. 1980년대에도 가수 문희옥이 「북청물장수」(이호섭 작사, 안치행 작곡)를 부르기도 했다.
 다음은 예전에 교과서에도 실려 있던 김동환의 「북청물장수」이다.

 “새벽마다 고요히 꿈길을 밟고 와서
  머리맡에 찬물을 쏴아 퍼붓고는
  그만 가슴을 디디면서 멀리 사라지는
  북청 물장수.

  물에 젖은 꿈이
  북청 물장수를 부르면
  그는 삐걱삐걱 소리를 치며
  온 자취도 없이 다시 사라져버린다.

  날마다 아침마다 기다려지는
  북청 물장수”

 가장 널리 알려진 함경도 물장수로는 이용익(李容翊, 1854~1907)이 있다. 그는 물장수로 시작해 구한말의 정치가로 활약했고, 최초의 사립고등교육기관인 보성전문학교(고려대학교의 전신)을 설립했으며, 러시아로 망명해 독립운동을 했다.

물지개(수도박물관) [사진=박종평 객원기자]
물지개(수도박물관) [사진=박종평 객원기자]

 오염된 물이 일으킨 재난과 김치의 효능

 그러나 하수도가 별도로 존재하지 않았던 시대였기에 우물이나 한강물이 하수로 인해 오염되는 일이 많았다. 특히 오염수나 음식으로 인해 발생하는 전염병인 이질이나 콜레라가 크게 유행하기도 했다.

 일제강점기에 우리나라에서 태어났고, 의료선교사로 활동하면서 우리나라 최초로 크리스마스실을 발행했던 닥터 셔우드 홀(Sherwood Hall, 1893~1991)도 오염된 물이 이질의 원인이라는 것을 주목했다. 그는 자신처럼 우리나라에서 태어난 여동생 에디스를 이질로 잃었다.

 셔우드 홀이 쓴 기록에는 흥미로운 이야기가 나온다. 그는 이질 걸린 사람들을 똑같은 방법으로 치료를 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일본인은 조선인에 비해 회복이 대단히 늦었다. 그는 당시에는 여건이 되지 못해 정밀한 연구를 하지 못했으나, 자신의 경험을 통해 다음과 같이 추정했다.

 “조선인들은 항상 고추를 많이 넣은 매운 김치를 먹는다. 이 음식은 어찌나 매운지 눈물이 날 정도다. 내 생각으로는 소화기 내장에서도 이같이 반응을 보인다면 아메바 균이 내장에 서식하기도 전에 이 매운 맛이 물리적인 작용을 하여 균이 씻겨 나올 것이다. 그러나 일본인들은 물리적인 작용을 할 고추가 든 음식은 질색을 하고 먹지 않는다. 이미 이질에 걸린 일본인 환자들에게 김치를 먹이는 일은 치료 효과를 보아 너무 늦은 일이다. 하지만 내 충고를 받아들여 미리 김치를 먹기 시작한 일본인들은 매우 좋은 효과를 보였다. 이들은 이질에 걸리는 비율도 낮았지만 병이 나도 회복이 빨랐다.”(『닥터 홀의 조선회상』, 셔우드 홀, 김동열 옮김, 좋은씨앗, 2016년)

 서구의 선진의학을 배웠고, 수많은 임상경험을 했던 셔우드의 경험이 반영된 주장이다. 김치가 가장 중요한 역할을 했다는 것은 아니다. 당연히 약이 우선이었다. 그러나 두 나라 사람을 비교했을 때 김치를 먹는 사람과 먹지 않는 사람에게 차이가 있었다는 점에서 ‘김치’의 효능에 대한 의미있는 기록이다. 요즘에는 김치를 먹지 않은 사람들이 의외로 많다. 닥터 셔우드 홀이 높게 평가했듯 고춧가루가 묻은 우리의 매운 김치가 갖고 있는 장점을 더 깊이 연구할 때이다.

 비운의 황제 고종의 마지막 숨결이 있는 곳, 수도박물관

 전근대의 오염된 우물물에서 벗어나기 위한 노력이 정수장이었고, 정수장은 고종에 의해 처음 세워졌다.

 건물 입구 왼쪽 벽에 ‘경성수도양수공장’, 오른 쪽 벽에는 ‘광무(光武) 11년 건축’, 건물 중앙 위쪽에는 “SEOUL WATERWORKS 1907”이라는 글이 화강암에 새겨져 붙어 있다. ‘경성수도양수공장’은 이 정수장 이름이다. ‘광무 11년’과 ‘1907’은 모두 이 건물이 완성된 시기를 뜻한다. 그러나 전체 공장은 1908년(융희 2년)에 완성되었다.

 광무 11년(1907년)은 대한제국 황제 고종(1852~1919.1.21)의 연호이다. 광무는 1897년 8월 17일부터 1907년 8월 11일까지 사용한 연호이다. 이 연호에는 ‘조선’이 ‘대한제국’이 되어 청나라와 사대관계를 끊었다는 것과 고종이 ‘청나라의 제후국 조선의 왕’이 아니라 독립된 황제국인 ‘대한제국의 황제’임을 선언하는 의미가 있다. 우리 역사에서 극히 일부 왕을 제외하고 독자 연호를 사용한 사례는 거의 없다. 우리는 대부분 사대관계 속에서 중국 연호를 사용했다.

 청나라와 무관하게 ‘조선의 왕’으로서 고종이 만든 첫 독자 연호는 ‘건양(建陽)’이다. 1895년 음력 1895년 11월 17일을 ‘양력 1896년 1월 1일’로 정하면서 음력 대신 양력을 사용하도록 하면서 ‘건양’이라는 독자 연호를 제정했다. 1897년 8월, 연호를 다시 “광무”로 바꾸고, 10월에 황제에 즉위한 뒤 대한제국을 선포했다.

 건물과 달리 이 정수장 전체까지 완성된 것은 1908년으로 순종(純宗) 때이다. 연호로는 융희(隆熙) 2년이다. 건물에 있는 ‘광무 11년(1907년)’과 1908년(융희 2년)의 사이에는 역사적 격변이 있었다.

 1907년 1월 21일, 고종은 순종에게 대리청정 위임을 하면서 네덜란드 ‘헤이그 만국평화회의’에 이준·이상설·이위종 선생을 파견했다. 헤이그 특사파견으로 국제사회에서 조선 문제가 부각되었다. 일본은 고종을 7월 19일 강제로 퇴위시키고 황태자였던 순종을 황제에 올렸다.

 1907년은 고종의 광무 11년이 저물고, 순종의 융희 1년이 된 해이다. 따라서 이 건물 만큼은 순종이 즉위하기 전, 황제 고종의 마지막 시기에 완성된 것을 뜻한다.

 서기 1907년은 고종과 순종 두 황제가 교체되고, 광무와 융희 연호가 잇따라 사용된 시기이다. 고종은 민족에게 맑은 물을 제공하려고 했으나, 일제의 더러운 물이 민족과 역사를 퇴행시키는 오염은 막지 못했다.

 박물관을 나오면 그 앞에 한강물을 정화시키는 시설인 ‘완속여과지’가 있다. 마치 지하동굴같다. 여름에는 아주 시원할 듯하다. 그러나 오래 있을 공간은 아니다. 눈으로 만 한 번 죽 돌아볼 정도이다.

 수도박물관은 우리나라 수도의 역사를 살펴볼 수 있기도 하지만, 휴식할 수 있는 공간도 많아 아이들과 함께 휴일에 쉬러 가기 딱 좋은 곳이다. 한강은 물론 서울숲으로도 이어져 있어 최고의 산책공간이 된다. 지금은 많은 사람들이 수돗물을 천시하고 생수를 사 마시는 시대가 되었지만, 최소한 수돗물은 우리를 각종 물과 관련된 질병에서 해방시켜주는데 큰 공로를 했다. 가정으로 이어지는 수도관에 문제가 있을 수 있으나, 최소한 수돗물을 만드는 과정에서는 최고의 기술을 갖고 가장 깨끗한 물을 만드는 것은 사실이다. 오랫동안 깨끗한 수돗물을 공급해 온 분들의 공로를 잊어서는 안된다.

성수대교 하단 [사진=박종평 객원기자]
성수대교 하단 [사진=박종평 객원기자]

 잊혀진 재난 성수대교 참사, 도로에 막혀 갈 수 없는 위령탑

 수도박물관에서 한강서울숲 방향으로 간다. 여러 기업과 시민들이 기부해 숲을 만든 생태숲을 지난다. 계단식 연못도 있다. 이 길을 택한 까닭은 ‘성수대교참사 희생자위령탑’을 가기 위함이다.

 지금은 거의 잊혀졌지만, 1994년 10월 21일 07시 40분에 온 국민을 충격에 몰아넣었던 초유의 참사가 일어났다. 성수대교 참사이다. 하루아침에 다리 무너져 다리를 지나던 사람들과 차량이 한강물에 추락했다. 그 사고로 사망 32명, 부상 17명, 총 49명의 사상자가 발생했다. 위령탑은 그때의 아픈 기억을 잊지 않기 위해 세운 것이다.

 당시 성수대교는 건설된 지 15년 된 다리였으나, 한강에서 가장 안전한 다리라고 평가되었던 다리였다. 그러나 한순간에 무너졌다. 「새롭게 태어난 성수대교」(민상기, 『건설안전기술』, 25권, 1997년, 사한국건설안전기술협회)에 따르면, 정밀조사와 분석결과 직접적 붕괴원인은 첫째 취약부 용접의 절대적인 부실시공, 둘째, 유지관리 소홀, 셋째, 과적차량의 통과에 의한 피로하중이라고 한다. 부실시공이 절대적 붕괴원인이었다고 한다.

 현재의 성수대교는 붕괴된 다리를 대신해 1995년 4월부터 1997년 7월까지 공사해 완공한 것이다. 그런 대형사고가 있었음에도 그 이듬해에는 강남 한복판에서 백화점이 무너졌다. 삼풍백화점이다. 무려 1천여 명이 사망하거나 부상당했다.

 두 사건 모두 졸속주의와 부실시공이 원인이다. 그런 사건 사고는 지금까지도 여전히 반복되고 있다. 교훈을 잊어버렸기 때문이다. 교훈을 잊은 모습은 그들 희생자를 기억하는 방식에서 단적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성수대교참사 희생자위령탑’이 있는 곳(강변북로) [사진=박종평 객원기자]
‘성수대교참사 희생자위령탑’이 있는 곳(강변북로) [사진=박종평 객원기자]

 ‘성수대교참사 희생자위령탑’을 찾아갔다. 위령탑을 가기 위해 서울숲길과 한강변을 두 번이나 빙빙 돌았지만, 도보로는 갈 수 있는 방법이 없었다. 위령탑이 강변북로 안에 있기 때문이다. 산책객들 10여 명을 붙잡고 위령탑 가는 방법을 물었지만, 그 동네 사람들임에도 그들 중 아무도 대답하지 못했다. 정확히는 위령탑 존재 자체를 몰랐다. 오히려 위령탑이 이곳에 있냐고 되물을 정도였다. 연세 드신 분들이라 성수대교참사를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두 바퀴를 돌다가 내린 결론은 위령탑은 도보로는 갈 수 없다는 것이었다. 서울숲 전망데크에서 멀리나마 위령탑이 있는 공간을 볼 수 있다. 전망데크 앞 한강 방향 왼쪽 울타리 쳐진 곳이 위령탑이 있는 곳이다. 차량 휴식을 위한 주차장도 그 곁에 있다. 탑은 보이지도 않는다.

 위령탑에 가자고 목숨을 걸고 강변북로에 뛰어들 수는 없기에 그저 멀리서 그들의 명복만 빌 뿐이었다. 고립된 위령탑, 가기 힘든 곳에 위치한 위령탑은 성수대교참사를 망각시키는 역할을 한다. 그 망각이 바로 인재(人災)를 반복시킨다.

 삼풍백화점 붕괴 사건 희생자를 위한 ‘삼풍백화점 참사위령탑’은 그나마 ‘양재시민의 숲’에 있어 다행이나, 붕괴된 장소가 아니라 무려 5킬로미터나 떨어진 곳이다. 그 역시 잊고 싶기 때문일 듯하다. 또 비싼 땅에 위령탑을 설치하는 것도 싫어했을 듯하다.

 덕분에 다시 한강변을 오가며 한강을 바라보는 즐거움을 누리기도 했지만 접근하기 어렵고 외진 곳에 위치한 ‘성수대교참사 희생자위령탑’의 모습에서는 우리 사회의 수준을 새삼 느끼게 된다.

 성수동에서 만난 익숙한 이름 ‘공씨책방’

 다음 목적지는 ‘살곶이다리’이다. 서울숲을 통과해 간다. 서울숲은 아주 편안하다. 서울숲에서 하루 내내 휴식할 수 있을 만큼 넓고 다양한 시설이 있다. 거울연못, 사슴우리, 갈대가 일품인 바람의 언덕, 은행나무숲, 곤충식물원, 나비정원 등 많은 시설이 있다. 이런저런 것 다 잊고 서울숲만을 찾아간다면 지하철 ‘분당선 서울숲역’에서 내리면 가깝다. 2호선 뚝섬역에서 한강을 거쳐 가도 좋다.

 ‘살곶이다리’를 가기 위해 서울숲을 나르다시피 지나갔다. 가는 길에 반가운 간판이 눈에 띈다. 서울숲IT캐슬 빌딩에 있는 ‘공씨책방’이다. 신촌에 갈 때면 자주 들렸던 ‘공씨책방’이 난데없이 이곳에 있다.

 처음에는 신촌에 있던 ‘공씨책방’이 이사를 온 줄 알았다. ‘신촌 공씨책방’이 임대료 때문에 고생한다는 이야기를 들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사장님이 남자분이다. 신촌의 경우는 여자 사장님이었는데. 이상해서 여쭈어보니, 신촌은 사모님이 운영하시고, 이곳은 자신이 운영한다고 하신다. 분점 개념이나, 댁이 근처이고 성동구청이 지원해서 이곳에 책방을 내게 되었다고 하신다.

 잠시 책들을 둘러보고 몇 권의 책을 샀다. 헌책방에는 특수성이 있다. 헌책방을 다녀본 사람만 알 수 있는 특수성이다. 동네 헌책방은 청계천이나 황학동 헌책방과 다르다. 동네 헌책방은 지금은 많이 사라졌고, 또 없어지고 있다. 인터넷으로 옮겨가기도 했다. 특수성이란 다른 동네 헌책방에서는 볼 수 없는 그 동네와 직간접적인 책들이다.

 그런 책을 발견했을 때 가장 즐겁다. 인터넷에 올라있는 책, 데이터로 검색되는 책에서는 차가움만이 느껴진다. 헌책방에서 물리적으로 만져보고 책장을 넘기며 살펴보는 책, 특정한 책을 찾지 않아도 그저 책들을 살펴보다 보면 읽고 싶은 책들이 뜨겁게 손짓한다. 그게 헌책방을 가는 까닭이다. 편하게, 쉽게 살자면 인터넷으로 검색하면 그뿐이나, 헌책의 퀴퀴한 냄새 속에서 의외의 보석을 찾는 기쁨은 결코 대체할 수 없다.

 5권이나 샀으니 가방이 갑자기 묵직해졌다. 한 번 답사를 나오면 8시간 정도를 걷는 것이 다반사라 늘 가볍게 다닌다. 갖고 다니는 가방 역시 전철 이동 중에 읽을 책 한 권만 넣고 다녔는데, 졸지에 무거워졌다. 읽지도 않았으나 머릿속은 지식으로 가득 찬 듯하다. 이사를 갈 때마다 몇백 권씩 내다 버리는 것이 일상이면서도 책만 또 쌓인다. 그런들 어떠랴. 책 한 권에 단 한 줄, 한 단어라도 의미가 있고, 그걸 찾은 뒤라면 버려도 아쉽지 않으니.

 ‘공씨책방’을 나와 성동교 오른쪽으로 난 중랑천 제방길을 따라 걷는다. 10분 정도 가면 중랑천에 놓인 ‘살곶이다리’가 보인다. 멀리서 보면 그저 그런 다리이다. 지나온 성동교에 비하면 초라하기 그지 없다. 지하보도로 들어간다.

 지하보도 천정에서 뚝뚝 빗물이 떨어진다. 성수대교 참사 기억을 다시 불러낸다. 노후화되었거나, 무언가 파손된 것을 아직 보수하지 않았기 때문인 듯하다. 성수대교 참사가 별것 아니다. 무심코 넘긴 파손된 것들, 관리 부실이 재난을 부른다.
 지하보도에서 나오면 바로 코 앞에 ‘살곶이다리’가 있고, 건너편에 한양대 건물이 보인다.

 유심(有心)한 석굴암과 무심(無心)한 살곶이다리

 ‘살곶이다리’는 보물 제1738호이다. 길이 78m 너비 6m로 조선 시대 가장 긴 다리이다. 서울 동대문(혹은 광희문)에서 전곶교를 거쳐 송파-광주-이천-충주-동래로 가는 길에 있다. 임금이 뚝섬에서 있었던 군사훈련이나, 매 사냥, 뚝섬 국영 목장을 시찰할 때 이용했다.

조선 시대의 수도인 한양과 동남지방을 연결하는 주요통로로 사용되던 다리이다. 한자로는 ‘箭串橋(전곶교)’이다. ‘제반교(濟盤橋)’라고도 불리기도 했다. ‘전곶(箭串, 살곶이)’에 설치된 다리이다. 전곶에 대해서 『신증동국여지승람』에서는 “우리나라 동쪽 들이다. 그 땅이 평평하고 널찍하다. 물과 풀이 아주 넉넉하다. 울타리를 둘러 나라 말(國馬)을 기른다. 넓이는 34리이다”라고 ‘살곶이’가 국영 말목장이었음을 밝히고 있다.

 ‘살곶이다리’는 우리 조각미술사에서 큰 의미가 있다. 석굴암이나 고려청자와 극단적으로 대비된다. 석굴암은 최첨단 기술로 만들어지는 반도체와 같이 정밀함을 자랑하고, 균형미가 넘친다. 그 어디를 봐도 감탄사가 절로 날 정도로 아름답다. 만든 사람들의 정성이 가득하다. 유심(有心)의 극치이다. 우리 전통 문화 속 아름다움과 디테일 DNA의 정수이다.

 ‘살곶이다리’ 위를 걸어갈 때는 그냥 돌다리이다. 아무런 감흥도 일어나지 않는다. 오직 튼튼함만 느낄 수 있다. ‘살곶이다리’ 진면목은 다리 위나 옆에서는 볼 수도 느낄 수도 없다. 다리 밑에 있다. 아래로 내려가 교각과 상판 등을 보면 투박한 조선백자, 찌그러지고 삐뚤어진 달항아리를 닮았다. 또 마치 영국의 스톤헨지를 연상케 한다.

수표교(장충단공원 안) [사진=박종평 객원기자]
수표교(장충단공원 안) [사진=박종평 객원기자]

 대충 졸속으로 만들었다고 해도 누구도 뭐라 할 수 없을 만큼 정말로 대략 돌을 툭툭 자르고 깨어 만들었다. 현재 장충단공원에 이전 설치된 수표교와 대비해 봐도 이 다리는 그 어떤 조형 의식이 없다. 이 다리에서 조형미를 찾는다면 정상적인 사람은 아닐 듯하다.

 그럼에도 다리를 구성한 돌덩이를 유심히 바라보면 오히려 무심(無心)해진다. 만든 사람들의 땀방울만 보인다. 아무런 미련 없이 그저 자른 돌, 여기저기 떼어낸 망치와 정 자국이 마음을 편하게 해 준다. 이는 마치 백자 달항아리를 보는 듯한 느낌을 준다.

 ‘살곶이다리’는 화강암을 마치 떡 주무르듯 만들어낸 석굴암, 돌에서 불필요한 부분을 덜어내며 부처님을 그대로 뽑아낸 듯한 석굴암, 신앙 대상인 석굴암, 고요함이 넘치는 석굴암과는 만든 목적과 방식, 위치 등이 모두 정반대이다.

 그러나 살곶이다리 아래서 가만히 돌덩이를 하나하나 바라보면 이상하리만큼 똑같은 느낌이 든다. 자르고 깨진 부분을 보면, 돌을 깨는 시끄러운 소리가 들리는 듯하다가도 돌이 서고 가로지른 모습에서 오히려 고요함이 흐른다. 무게감이 주는 아름다움도 있다. 다리마다 수백 년 동안 장마철 거센 물결과 싸워 이긴 영광스러운 상처가 새겨져 강인함을 자랑한다.

 석굴암과 살곶이다리. 정반대 작품이다. 석굴암이 고요의 끝을 지향한다면, 살곶이다리는 움직임 속에서 고요를 지향한다. 석굴암이 ‘관념의 세계’라면, 살곶이다리는 ‘그냥 현재’이다. ‘살곶이다리’에 간다면, 그 아래로 내려가 다리 사이를 걸어야 한다. 다리 위만 걷고 온다면, 수백 년 동안의 시간과 물결과 싸워 이겨낸 강인한 고요함을 느낄 수 없다.

살곶이다리 [사진=박종평 객원기자]
살곶이다리 [사진=박종평 객원기자]

 살곶이다리는 언제 만들어졌을까?

 문화재청에서는 이 다리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정종과 태종의 잦은 행차 때문에 세종 2년(1420) 5월에 처음 만들어지기 시작했으나 태종이 죽자 왕의 행차가 거의 없어 완성되지 못하였다. 그 후 이 길을 자주 이용하는 백성들 때문에 다시 만들 필요성이 제기되어 성종 6년(1475)에 다시 공사를 시작하여 성종 14년(1483)에 완성했다. 마치 평평한 평지를 걷는 것과 같다하여 ‘제반교(濟盤橋)’라고도 불렀다. 조선 전기에 만들어진 다리 중에서 가장 규모가 큰 다리로 모두 64개의 돌기둥을 사용하여 만들었다. 돌기둥의 모양은 흐르는 물의 저항을 줄이기 위해 마름모형으로 고안되었다.”

 다리 건설과 관련한 기록을 살펴보았다. 다리 건설은 세종 2년(1420년)에 상왕이었던 태종의 명령으로 시작되었다(『세종실록』, 세종 2년 5월 6일). 태종은 영의정 유정현(柳廷顯)과 박자청(朴子靑)에게 ‘살곶이 내(箭串川)’에 다리 놓는 일을 직접 감독하게 했다. 박자청은 실록 기록으로 보면 무인 출신이나 태조의 건원릉과 태종의 헌릉을 공사를 담당하기도 했다. 『세종실록』에서는 “토목의 공역을 관장한 공로로 사졸로 부터 나와 1품의 지위에 이르렀다”고 할 정도로 토목전문가였다.

 그러나 5월 16일, 태종은 ‘전곶(箭串) 돌다리(石橋)’ 건설과 관련해 삼복더위에 일을 시키기 어렵고 장마철에 마칠 수 없으니 중지했다가 가을에 다시 시작하게 하라고 했다. 이즈음에는 유정현의 보고에 따르면, 다리의 기초 공사를 절반 정도한 것으로 언급된다.

 공사 중지 명령이 있음에도 『세종실록』 5월 23일에는 세종이 돌다리 건설을 감독하는 유정현과 박자청에게 술을 하사했다고 나온다. 이는 공사 중단에 따른 정리 작업 과정에서 위로하는 술로 볼 수도 있다. 5월 25일 기록에 상왕 태종이 공사에 참여한 군사를 해산하게 했고, 그 때문에 공사가 완료되지 못했다고 나오기 때문이다.

 태종의 중단 명령을 세종이나 유정현 등이 무시하고 공사를 진행하다가 태종이 다시 중지시켰다고 보기는 어렵다. 그 뒤 가을에 다리를 완성했는지 어떤지에 대한 기록이 없다. 또 실록에는 완성되었음에도 언제 완성되었는지 완공 기록도 나오지 않는다.

 문화재청의 보물 설명문을 비롯해 백과사전, 한창도 선생의 논문 「전곶교(살곶이다리)에 대하여」(『향토서울』 30호)에서는 모두 성종 14년(1483년)에 완성된 것으로 나온다. 그중 가장 자세히 연구한 것은 한 선생의 논문이다.

 한 선생은 『성종실록』 성종 6년(1475년) 9월 2일의 병조 판서(兵曹判書) 이극배(李克培)의 건의를 바탕으로 이즈음 전곶교 공사가 다시 시작되었고, 『오주연문장전산고(五洲衍文長箋散稿)』를 인용해 성종 14년(1483년)에 완성된 것으로 보았다.

 “흥인문(興仁門, 동대문) 밖의 살곶이(箭串 전곶)와 왕심리평(往尋里坪)에 두 개의 다리가 있다. 이는 다 임금이 직접 이름을 내린 것이다. 살펴보니 성종 13년 계묘에 어떤 승려가 흥인지문 밖 살곶이다리(箭串橋)를 지었기에 임금이 이름을 ‘제반(濟盤)’이라 명했고, 또 왕심평 다리를 ‘영도(永渡)’라 이름하라 명했다. 이 두 다리는 돌로 지은 것이다.”(『오주연문장전산고』)

 이규경(李圭景, 1788~1863)의 『오주연문장전산고』 원문을 보면, 완공은 ‘성종 13년 계묘’이다. 그러나 성종 13년(1482년)은 임인년이고, 성종 14년(1483년)이 계묘년이다. 따라서 원문은 성종 13년 ‘임인년’의 오자 또는 성종 ‘14년’ 계묘년의 오자일 수 있다.

 한 선생은 ‘성종 14년 계묘년’으로 보았다. 어쨌든 『오주연문장전산고』에 따르면 다리는 1482년 혹은 1483년에 완성되었다고 볼 수 있다.

살곶이다리 보수관련 명문(銘文) [사진=박종평 객원기자]
살곶이다리 보수관련 명문(銘文) [사진=박종평 객원기자]

 세종 2년(1420년)~단종 2년(1454년) 사이에 완공된 살곶이다리

 문화재청의 보물 설명문은 한 선생의 논문에 근거한 듯하다. 그런데 『단종실록』(단종 2년 3월 26일, 1454년)에는 살곶이다리가 성종 때가 아니라 그 전에 이미 완성되었음을 보여주는 기록이 있다. 즉 왕심교(往心橋)와 살곶이다리(箭串橋) 수리를 양주 농민에게 맡길 것인지 한성부(漢城府)에서 담당할 것인지에 대한 논의가 나오고, 세조의 주장에 따라 한성부가 담당하게 했다.

 『단종실록』으로 보면 『오주연문장전산고』와 달리 세종 2년 이후 단종 2년 이전 시기에 ‘살곶이다리’와 ‘왕심교(영도교)’가 이미 완성된 것으로 볼 수 있다. 세종 2년 가을에 완성했다면, 단종 2년은 시기적으로도 20여 년이 흐른 뒤이기에 수리가 필요한 시점으로 볼 수 있다.

 국사편찬위원회 사료조사위원 서울지회 제4분기 사료조사 발표 때 박경룡 선생이 발표한 「살곶이벌에 대한 고찰」(2009.11.27.)에서는 “세종 2년에 중단되었다가 단종 2년 이전 사이에 완공되었는데 홍수 등으로 붕괴된 것을 성종 14년에 복원한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라고 하고 있다. 그러나 이는 단종 2년의 살곶이다리 수리와는 맞지 않는다. 단종 2년 수리 기록으로 보면, 오히려 세종 2년 가을이나 최소한 세종 시대에 완성되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할 듯하다.

 한 선생은 『단종실록』 기록을 “석교(石橋)가 완공되기 전 목조가교(木造假橋) 때의 보수공사에 관한 기록”으로 보았다. 즉 『단종실록』 속의 ‘살곶이다리’를 나무다리로 본 것이다. 그러나 나무다리라는 근거는 제시하지 않았다. 『단종실록』에 살곶이다리(제반교)와 왕심교(영도교)가 모두 언급되는 것으로 보면, 한 선생의 성종 14년 완공설의 근거가 된 『오주연문장전산고』 기록은 잘못된 것으로 볼 수 있다.

 『오주연문장전산고』 이외의 다른 기록에 있는 ‘살곶이다리’ 기록은 다음과 같다. 가장 이른 기록은 성현(成俔, 1439~1504)이 저술한 『용재총화(慵齋叢話)』이다.

 “(성종 때) 어떤 승려가 있었는데 승려가 ‘살곶이다리(箭串橋)’를 지을 때 많은 돌을 깨서 큰 내를 건너는 다리를 만들었다. 다리는 3백여 보(步)가 넘고 평안하기가 집에 있는 것 같았다. 가는 사람이 평지를 밟는 것 같았다. 그래서 성종이 유능하다고 하여 그 승려에게 명령해 (제천정을 다시 확장하도록) 짓게 했다. 관청의 힘을 귀찮게 하지 않으려고 쌀과 포목을 많이 주었으나 승려는 쓰기만 했다. 몇 년 동안 공을 세우지 못하고 겨우 (제천정의) 서까래와 들보만 세웠다. 그래서 성종이 끝내 올라가지 못해 모든 관리들이 슬퍼했다. 그 뒤 명나라 사신 왕헌신(王獻臣)이 왔을 때 조정에서 수리하는 것을 마치고 단청을 칠했다. 그 뒤 전교(箭郊)에 만든 큰 다리의 이름을 ‘제반교(濟盤橋)’라고 했다. 또 동대문 밖 왕심평(往尋坪)에 큰 다리를 짓고 영도교(永渡橋)라 이름했다. 왕이 쓴 글씨로 정했다.”(『용재총화』)

 『용재총화』 내용을 검토해 보면, 돌로 만든 살곶이다리는 성종 때 어느 승려가 만들었다. 제천정 확장은 성종 때는 이뤄지지 못했고, 명나라 사신 왕헌신이 『연산군일기』 연산군 1년(1496년) 6월 5일에 처음 등장하는 것으로 보면 연산군 때 완성되었다. ‘전교 큰 다리’와 ‘왕심평 큰 다리’는 제천정 확장 이후에 만들어진 것이다. ‘제반교’와 ‘영도교’ 명칭도 성종이 지은 것이 아니라 연산군이 지었다고 볼 수 있다. 문맥으로 보면, ‘전교 큰 다리’는 새로 만든 것으로 ‘살곶이다리’와 다른 다리인 듯하다.

살곶이다리 아래 1 [사진=박종평 객원기자]
살곶이다리 아래 1 [사진=박종평 객원기자]

 『신증동국여지승람』은 이행(李荇)이 1530년(중종 25년)에 증보한 것이다.

 “제반교는 전곶(箭串)에 있다. 다리가 3백여 보 이상에 걸쳐있다. 두 다리(영도교와 제반교)는 모두 중종(中宗)의 글씨를 써 정한 것이다.”(『신증동국여지승람』·「동국여지비고」)

 『신증동국여지승람』에서는 ‘살곳이다리’는 언급이 없고 제반교만 나오고 제반교와 영도교 이름을 중종이 정한 것으로 나온다. 이는 『용재총화』와 다르다. 제반교는 『중종실록』 중종 16년(1521년) 10월 11일에 처음 언급된다. 영도교 역시 『중종실록』 중종 17년(1522년) 8월 15일에 처음 나온다. 성종 때나 연산군 때는 제반교와 영도교가 나오지 않는다. 이로보면, 『신증동국여지승람』의 중종이 제반교와 영도교로 명명했다는 것이 사실일 듯하다.

 유본예(柳本藝, 1777~1842)가 저술한 것으로 추정되는 『한경지략』에서는 『용재총화』를 인용해 설명하고 있다.

 “지금의 ‘살곶이다리(箭串橋)’는 즉 제반교(濟盤橋)이다. 『용재총화』에서 말하길 성종 때 어떤 승려가 많은 돌(萬石)을 깨서 다리를 지었다. 임금이 제반교로 이름하기를 명했다고 한다. 또 동대문 밖 왕심평(枉尋坪) 큰 다리를 지었다. 영도교(永渡橋)라 이름지었다. 모두 임금이 글씨를 써서 정했다.”(『한경지략』)

 『한경지략』에서는 『용재총화』를 언급하면서 성종 때 승려가 ‘살곶이다리’와 왕심평 큰 다리를 지었고, 성종이 제반교와 영도교로 명명했다고 나온다. 그러나 『용재총화』의 내용과는 차이가 있다.

 살곶이다리 완성 시기를 이들 기록으로 비교해 보면, 가장 이른 『용재총화』에서는 성종 시기(재위 1469~1494)이나 연도는 특정하지 않았다. 반면 가장 늦은 기록인 이규경의 『오주연문장전산고』에서 성종 13(1482년) 혹은 성종 14(1483년)으로 특정하고 있다. 이 시기를 기록과 비교해 보면, 『용재총화』와는 동시대이고, 『오주연문장전산고』와는 300여 년 차이가 난다. 이로 보면, 300년 뒤의 『오주연문장전산고』가 특정한 그 시기가 타당한지 어떤지 알 수 없다.

 성종 6년(1475년) 9월 2일, 성종이 “다리가 있는 곳은 수리하고 없는 곳은 설치하지 말라”고 하자 병조판서 이극배는 경안역(慶安驛) 하천은 말의 배가 빠질 정도이고, 임금이 탄 말이 물에 미끄러질 수 있다며 나무로 다리를 만들면 되고, 탄천(炭川)과 살곶이장(箭串場, 전곶장) 안쪽 내(內川)도 깊기에 해당 고을에 다리를 만들도록 하자는 것이었다. 이에 성종은 경안역 등 3개의 하천의 다리 설치에 동의했었다. 이 기록으로 보면 1475년에 ‘살곶이다리’를 새로 만든 것으로 볼 수 있다. 그 경우 『용재총화』의 승려에 의한 ‘살곶이다리’ 완성설이 가능하다.

살곶이다리 아래 2 [사진=박종평 객원기자]
살곶이다리 아래 2 [사진=박종평 객원기자]

 다리에 새겨진 보수 년도

 한 선생의 논문을 보면, 다리 “남쪽 교단(橋端)에서 4m가량 교중(橋中)으로 2째 종석(縱石, 하류쪽)에 새겨진 보수공사에 관한 각자”가 있다고 한다. 그 내용을 한 선생이 탁본해 확인한 결과에 따르면 “병진(丙辰) 10월 수보(修補) 패장(牌將) 최광휘(崔匡輝) 석수(石手) 김중철(金重哲)”이라는 글이었다고 한다.

 이에 대해 한 선생은 ‘병진(丙辰)’을 『오주연문장전산고』의 성종 14(1483년) 완성설을 기준으로 인조 14년(1636년)으로 추정했다. 그런데 한 선생의 논문에서 병진년으로 꼽은 연도들은 1516년(중종 11년), 1576년(선조 9년), 1636년(인조 14년), 1696년(숙종 22년) 등이나, 이 연도들은 모두 병진년이 아니라 병자년이다.

 한 선생의 ‘인조 14년 보수설’은 간지 연도 자체가 잘못된 것이다 논문에서 탁본해 확인했다는 병진년과 다르기 때문이다. 세종 이후 병진년을 보면, 1436년(세종 18년), 1496년(연산군 2년), 1556년(명종 11년), 1616년(광해군 8년), 1676년(숙종 2년), 1736년(영조 12년) 등이 있다.

 김영상 선생은 살곶이다리에 대해 『용재총화』와 『신증동국여지승람』 속 「동국여지비고」 기록을 바탕으로 “성종 때 시공했으나 완공된 것은 중종 때”로 보았다. 또한 다리에 새겨진 “다리 서쪽 가운데에 걸친 장대석 표면에 ‘병자년’이라고 새긴 간지가 눈에 띈다. 중종 11년(1516)이 바로 병자년에 해당되는 만큼 이 해에 다리를 완공하였다는 표시를 나타낸 것인성 싶다”고 했다. 김영상 선생의 주장은 한 선생이 오해한 ‘병자년’을 기준으로 1516년 완공설을 주장하고 있다.

 ‘살곶이다리’에 새겨진 각자, 즉 명문(銘文) 사진은 인터넷에 단 한 장도 없었다. 한 선생의 논문에도 사진은 실리지 않았다. 한 선생은 한편에서는 ‘병진’이라고 하고, 전체 글에서는 ‘병자’년으로 보았기에 혼란스러웠다. 또 서울역사 전문가인 김영상 선생도 ‘병자’라고 했기에 눈으로 확인해야 했다. 

 이 원고를 마감하는 날 다시 가서 다리들을 살폈다. 한 선생 논문에서 언급한 위치로 가서 살폈으나, 애매했다. 그 부분을 다시 여기저기 살폈더니 다리 바깥 쪽에서 명문이 환히 나타났다.

 명문은 한양대방향이 아닌 뚝섬 방향(남쪽) ‘옛 살고지다리’ 끝에서 두 번째와 세 번째 교각 사이, 물 흐름 방향으로는 성동교쪽 맨 바깥쪽, 귀틀석에 있었다. 성동교쪽 다리 밖에서 다리 맨 위를 보면, 명문이 보인다. 핸드폰 카메라의 확대 기능을 활용해 보면, 글자를 볼 수 있다. 단 한 글자만 제외하고 탁본을 할 필요도 없이 명확했다.

 연도는 명확히 ‘丙辰(병진)’이다. 한 선생이 스스로 판독하고 연도 판단 때 ‘병자(丙子)’로 오인한 것은 명백했다. 또 김영상 선생의 책에 나오는 ‘병자’ 역시 오류였다.

 다리 아래에서는 명문이 잘 보인다. 다리 바깥쪽이라 위에서는 잘 볼 수 있을 듯해 다리 위로 올라갔으나 명문을 볼 수 없었다. 난간이 없어 너무 위험하고 고개를 빼고 보기도 어려웠다. 아주 귀한 기록인데, 그냥 무심히 그 자리에 있다.

마조단 터 표석 [사진=박종평 객원기자]
마조단 터 표석 [사진=박종평 객원기자]

 ‘살곶이다리’ 건설에 대한 새로운 자료 발굴 : 세종 26년

 ‘살곶이다리’에 대해 조사를 하면서 새로운 기록 하나를 찾았다. 조상경(趙尙絅, 1681~1746)의 저술집인 『학당유고(鶴塘遺稿)』에 실린 「‘살곶이다리’를 개축하는 일에 대해 아뢰는 글. 10월 사복시 제조 때(箭串橋梁改築事奏 十月司僕提調時)」라는 글이다. ‘살곶이다리’에 대한 개보수에 대한 유일한 기록이다.

 그 글에는 “이 다리(살곶이다리)가 만들어진 것이 어느 해인지는 알 수 없습니다. 그런데 문서를 찾아 살펴보니 즉 갑자년(甲子年)이었습니다”라고 나온다. 갑자년은 세종 26년(1444년), 연산군 10년(1504년), 명종 19년(1564년), 인조 2년(1624년) 등이다.

 『용재총화』 등의 성종 때 창건했다는 기록을 기준으로 위의 갑자년과 비교해 보면, 성종 이전 시기의 갑자년은 세종 26년(1444년) 밖에 없다. 이는 ‘살곶이다리’가 성종 때가 아니라 최초에 다리를 만들었던 세종 때 완성된 것으로 볼 수 있다.

 조상경이 쓴 글은 그의 직책과 그 글속에 언급된 한성판윤 김시형과 비교해 보면, 영조 14년인 1738년에 작성된 것으로 당시 ‘살곶이다리’가 붕괴되어 이를 보수하는 과정에서 쓴 글이다.

 다리에서 확인한 ‘병진년’ 개보수 기록과 조상경의 글 작성 시기를 비교해 보면, 1736년(영조 12년) 병진년에 다리를 개보수하기 시작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조상경의 글로 보면 ‘살곶이다리’는 세종 26년에 완성되었다. 이는 『단종실록』의 개보수 기록과 일치한다. 또 현재 ‘살곶이다리’에 새겨진 ‘병진년 개보수’ 기록의 ‘병진년’은 1736년으로 추정할 수 있다.

 ‘살곶이다리’는 보물 제1738호이다. 관계자와 관계당국에서 보다 면밀한 조사를 해야 할 듯하다. 확실하지 않지만, 조상경의 기록에 따르면 세종이 완성한 다리다. 그걸 애매한 기록 등을 활용해 성종이 완성한 다리라고 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우리나라 국보나 보물 중에서 직접 만지도 밟고 다닐 수 있는 유일한 보물이 ‘살곶이다리’다. 이 다리는 위가 아니라 아래, 속에서 보아야 제맛이다. 다리 밑에서 보면 마치 영국의 스톤헨지 느낌이 난다. 지금처럼 접근이 불편하게 만들지 말고 시민들이 편안히 다닐 수 있도록 조치할 필요가 있다. 또한 명문 기록 역시 시민들이 안전하게 볼 수 있도록 어떤 조치를 하는 것이 좋을 듯하다.

 ‘살곶이다리’에서 한양대로 올라간다. 한양대 박물관을 지나 백남학술정보관으로 간다. 정보관 앞 오른쪽 화단에는 ‘마조단(馬祖壇) 터’ 표석이 있다. 마조단은 말과 관련된 별인 천사성(天駟星)에 제사를 지내던 단이다.

 2편에서는 한양대에서 출발해 소설가 김동인 선생의 집터까지 소개한다.

 

* 성덕정 터 : 성동구 성수동1가 110 천주교 성수동교회
* 수도박물관 : 성동구 성수동1가 642-1
* 성수대교참사 희생자위령탑 : 성동구 성수동1가 685-571
* 서울숲 : 성동구 성수동1가 678-1
* 공씨책방 : 성동구 성수동1가 671-6, 서울숲IT캐슬빌딩 안
* 공씨책방 신촌점 : 서대문구 창천동 112-5
* 전곶교(살곶이다리) : 성동구 성수동1가 694-124
* 마조단 터 : 성동구 사근동 17. 한양대 백남학술정보관 앞 오른쪽 화단.

저작권자 © 일요서울i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