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 형사가 정세라의 친구나 주변 사람을 모두 체크해 보았으나 의심 가는 인물이 없었다. 결국은 그날 밤 정세라의 집을 방문한 것으로 보이는 11층 남자 계종민과 남편 최윤호밖에 남지 않았다.
“계종민의 지문은 정세라의 방문 손잡이와 책상에서 발견되었습니다. 그리고 체모도 남편 것과 함께 계종민의 것으로 확인되었습니다.”
“정액은?”

추 경감이 강 형사를 보고 물었다.
“모두 남편 최윤호 것이라고 보고 드렸습니다.” 
오현주가 듣고 있다가 거들고 나섰다.

“벌써 까먹으셨습니까? 유부남과 유부녀가 밤중에 단둘이 밀폐된 공간에서 만났는데⋯ 서로 사랑한다고 하면서 육체관계를 하지 않았다는 것은 이해가 안 되네요.”
“구식으로 플라토닉 러브라는 것도 있어. 남녀관계라면 전부 추잡한 상상이나 하는 요즘 사람들과는 다른 이야기야.”

추 경감은 눈을 지그시 감고 나직하게 말했다. 강 형사는 속으로 웃기는 노친네도 다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근데 죽이기는 왜 죽였을까?”
“정말 계종민이 죽였는지 아닌지는 모르지 않아요?”
수사회의가 늦어지자 오현주가 오렌지 주스 캔 세 개를 뽑아왔다.

“남편의 그날 행적은 좀 조사해 보았나?”
추 경감은 오렌지 주스가 시어 한 모금 마시고는 얼굴을 찡그렸다.
“물론이지요. 최윤호는 오후 내내 맥가이버 사무실에서 정수기 설치해 준 집 서류 정리를 하고 있었습니다. 모두 퇴근한 뒤에도 혼자 일을 했습니다. 10시 이후에 퇴근한 것 같습니다.”

“회사가 일산이라고 했지? 일산에서 석촌동 집까지 얼마나 걸리나?”
“일산에서 3호선으로 교대역까지 와서 다시 2호선으로 갈아타고 잠실역에, 다시 8호선을 타고 석촌역까지 가자면 1시간 이상 걸립니다.”
“11시쯤 신고가 들어왔으니 비슷하구먼. 그럼 남편은 알리바이가 확실한 것 같은데⋯ ”

추 경감의 말에 오현주가 다른 의견을 내놓았다.
“청부 살인을 할 수도 있지요.”
“흔적이 없는데?”
“계종민과 최윤호는 서로의 존재를 알고 있었나?”
“아뇨.”

수사는 난관에 부딪힌 것 같았다.
“이럴 땐 사건 현장에 다시 가거나 용의자를 만나는 거야.”
추 경감은 강 형사와 오 형사를 데리고 정세라의 빈소가 있는 경찰병원 영안실로 갔다.

빈소에는 마침 남편 최윤호가 검은 상복에 삼베 완장을 차고 앉아 있었다. 추 경감은 한 번 본 일이 있어 구면이었다. 추 경감은 최윤호의 넙적한 이마가 개기름으로 번들번들한 모습을 보자 갑자기 역겨워졌다.
“또 오셨군요.”

최윤호가 시큰둥하게 인사했다.
“장례는 언제 치릅니까?”
강 형사가 인사조로 물었다.
“검찰에서 매장 지시를 해야 한다면서요? 죽은 것도 억울한데 땅에도 마음대로 묻지 못하네요. 그게 이 나라 법입니까?”

최윤호는 몹시 심사가 뒤틀려 있었다.
그때 갑자기 최윤호의 호주머니에서 핸드폰이 요란하게 울렸다. 달샤벳의 경쾌한 벨소리였다. “이놈의 전화는 시도 때도 없어.”
최윤호가 불평하면서 핸드폰 뚜껑을 열었다 닫으며 꺼버렸다. 구닥다리 피처폰이었다.

“도대체 범인은 안 잡고 여기는 왜 뻔질나게 드나듭니까? 죽은 사람이 범인이 누구라고 말이라도 해 줄 것 같습니까?”
최윤호가 공연히 신경질을 냈다.
“죽은 자는 말한다는 추리소설도 있습니다. 혹시나 해서⋯ ”
강 형사가 말을 얼버무렸다. 
“뭐라고요? 나, 참 기가 막혀서. 형사 나으리가 범인은 안 잡고 추리소설 타령이나 합니까?”

“한 가지만 묻겠습니다. 그날 밤 선생이 일산 회사에서 밤 10시까지 야근을 하셨다고 했는데 같이 일한 사람이 누구였죠?”
추 경감이 물었다.
“도대체 몇 번이나 말을 해야 합니까? 그런 귀찮은 야근을 정규 직원들이 합니까? 비정규 사원인 저 같은 놈이나 하지요.”
“그러니까 혼자 야근을 하셨군요.”

추 경감은 별 소득 없이 빈소를 나왔다. 오현주가 운전하는 고물 아반테를 타고 서울로 돌아오며 차 안에서 강 형사가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아내는 최신형 포지 스마트폰인데 남편은 투지 구닥다리 핸드폰이라⋯”
“강 형은 핸드폰에 왜 그렇게 관심이 많아요?”
오 형사가 빈정거렸다.

“아무래도 이상해. 최윤호는 옛날에 핸드폰 대리점도 했다고 했지? 그런데 왜 구닥다리를 가지고 다닐까? 무슨 곡절이 있을 거야. 좀 알아봐.”
추 경감이 말했다.

[작가소개] 권경희는 한국 여류 추리작가이다. 1990년 장편소설 '저린 손끝'으로 제1회 김내성 추리문학상을 수상하고 문단에 등단했다.

주요 작품으로 장편 추리소설 '거울 없는 방', '물비늘', 실화소설 '트라이 앵글', 단편으로 '검사는 무엇으로 사는가' 등 수십 편이 있다. 수필집 '요설록', '흔들리는 삶을 위한 힌트'등이 있다. 중견 소설가이면서 상담심리 전문가로 <착한벗 심리상담 센터>를 운영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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