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옥선 6·25 참전유공자회 종로구지회장 “치열한 전투서 피 흘리는 부상병들 손수 살려”
[일요서울ㅣ김혜진 기자] 지금으로부터 70여 년 전인 1950년 10월1일은 국군이 남침한 공산군을 반격해 38선을 돌파한 날로서 의의를 삼기 위해 ‘국군의 날’이 처음 지정된 날이다. 당시 간호장교로 전쟁에 참여한 6·25 참전유공자회 종로구지회장 박옥선 할머니(90)는 “중위로 있을 때까지도 10월1일에는 늘 큰 잔치가 있었다”며 “지금의 마포대교가 있는 곳이 모래밭이었는데 뜨거운 모래 위에서 군화를 신고 군복을 입고 한 달 넘도록 사열대를 만들어 연습했던 기억이 생생하다”고 했다. 박 할머니는 “사열 진행은 말도 못하게 힘들었지만 스스로 사기 진작도 되고 나라를 지키고자하는 열망이 가득했던 때”라고 회상했다. 열여덟 어린 나이에 전쟁터에 나가 다친 병사들을 돌봐 온 그는 현재 구순의 나이에도 나라를 지켰던 이들을 돌보는 데 소홀하지 않다. 이렇게까지 할 수 있는 원동력은 무엇일까. 일요서울은 지난 23일 서울 종로구 보훈회관에서 박 할머니를 만나 그의 삶을 들어봤다.
- 열여덟 간호사관학교 입학… “고된 훈련받아 부상병 치료할 수 있었다”
- “전쟁 다시 일어나도 주저 없이 전쟁터로 향할 마음은 여전”
1950년 6·25전쟁이 발발해 낙동강 인근까지 피란을 갔던 박옥선 할머니와 그의 가족들은 유엔군이 9월28일 서울을 되찾으며 서울 집으로 돌아오게 됐다. 공부에 대한 욕심이 컸던 박 할머니는 정부가 세운 임시 학교에 다니면서 외교관을 꿈꾸기도 했다. 그는 “당시 부잣집에서도 딸은 공부를 시키는 분위기가 아니었지만 우리 아버지는 내가 하고 싶은 만큼 공부를 시켜 주셔서 열심히 할 수 있었다”며 “공부하라는 소리 대신 어떤 책이 필요할지 미리 살펴보시고 책을 마련해 주셨다. 뒤에서 묵묵히 공부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주신 분”이라고 자랑했다.
박 할머니는 그런 아버지의 임종을 지키지 못한 게 인생에서 가장 큰 후회라고 했다. 그는 “간호장교들이 직접 학교에 와 전쟁터에서 죽어가는 생명을 구하는 것을 도와달라는 간곡한 요청을 들었다. 거기서 열심히 하면 해외에도 갈 수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열여덟 살 어린 나이에 국군간호사관학교에 자원했다”며 “부모님께는 부산 훈련소에 가는 당일 날 1년만 다녀오겠다고 이야기를 했는데 아버지가 서울역까지 따라 나오시며 그렇게 슬퍼하셨다”고 말했다.
박 할머니는 1년 후 어렵게 면회를 온 아버지의 얼굴을 대면하고서도 살갑게 대하지 못한 자신의 행동을 탓했다. 그는 “아버지가 부산까지 오실 거라고 생각도 못해서 너무 놀라 처음엔 얼굴만 쳐다보고 있었다”며 “인사 안 하느냐는 교장선생님의 말에 무덤덤하게 ‘아버지 오셨어요’라고 첫마디를 꺼냈다. 올라가기 전까지도 친근하게 하지 못했는데 아버지가 얼마나 섭섭했을까 싶다”고 했다. 그러면서 기자에게도 “아버지는 항상 외로운 사람이니 같이 소주라도 한잔 하고, 계실 때 잘 해드려야 한다”고 신신당부했다.
서울에 계신 부모님을 뒤로 하고 간호사관학교 2기생으로 입학한 그는 123명의 동기들과 함께 부산에서 기초 교육 및 훈련을 받고 전장에 나가게 됐다. 박 할머니는 “훈련을 받을 때 주머니에 머리 하나가 들어갈 만큼 큰 남자 군복밖에 없어 소매를 걷어 올리고 군화를 질질 끌면서도 부산에서 마산까지 구보를 하는 등의 고된 훈련을 해야 했다”며 “그런 정신으로 훈련을 받았기에 전투 현장에서 부상당한 군인들을 직접 안고 내려올 수 있었다”고 설명했다.
제주·대구·부산·철원 등 전국 국군 병원을 돌며 근무한 그는 병원에 실려 오는 환자들의 상태를 보면 당시 전투 현장이 얼마나 치열했는지 짐작할 수 있다고 했다. 1953년 7월27일 정전협정을 앞두고선 전투가 더 치열해지면서 위급한 상태의 환자 수는 최고조에 달했다. 박 할머니는 “병원에 실려 와 죽는 환자들, 팔과 다리가 떨어진 채 실려 온 환자들이 많았다”며 “의료품도 다 떨어져 갈 때라 위급해도 그냥 운동장에 환자를 늘어놓는 일이 부지기수였다”고 했다.
고지가 평지가 될 때까지 전투가 벌어졌던 백마고지나 철원고지에서도 특히 중상자들이 많았다. 그중에서도 박 할머니는 “대구 병원에서 근무할 때 총알이 턱 아래로 들어가서 반대쪽 볼 위쪽으로 나와 얼굴 반쪽이 함몰된 ‘박종은’이라는 환자가 가장 기억에 남는다”며 “자살기도를 할 만큼 힘들어 하셨는데 1년 동안 성심성의껏 치료를 해서 낫게 했더니 마음이 뿌듯했다”고 말했다. 그는 “아버지에게도 소개해 줄 만큼 친한 친구였는데 2014년 한 차례 만남 후 지금까지 못 만나고 있다”고 했다.
제대 이후 2009년부터 유공자들 살뜰히 보살펴
박 할머니는 휴전 후에도 중앙보훈병원(당시 국립원호병원)에서 간호과장으로 일하며 월남전에서 다쳐 돌아온 군인들을 돌봤다. 그는 “6·25 전쟁 당시보다 환자들의 상태가 더 심각했다”며 “그때는 총뿐만 아니라 지뢰도 있었기 때문에 군인들의 부상 피해가 더 컸다”고 설명했다.
수많은 병사들을 돌본 뒤 군대를 전역하고 난 이후인 2009년부터 현재까지 6·25 참전유공자회 종로구지회에서 지회장으로 일하며 참전 용사들을 돌보고 있는 그는 “지금도 전쟁이 일어난다고 하면 주저 없이 전쟁터에 나갈 각오가 돼 있다”고 힘주어 말했다.
이 같은 마음가짐으로 당초 900여 명 가까이 됐던 유공자들을 돌봐 온 그는 현재 남은 261명의 유공자를 살뜰히 살피고 있다. 이번 추석도 바쁘게 보냈다는 박 할머니는 “최소 90세 이상이신 분들이기 때문에 집에도 자주 가 보고 점검을 해야 한다”며 “일일이 병실을 찾아다니기도 하고 밥을 어떻게 해 드시는지, 불은 떼고 있는지 등을 확인하느라 정신이 없다”고 했다.
그러면서 “전쟁 때 고생을 했다고 나라에서 1000만 원의 예산을 주지만 1년에 네 번의 행사를 치르고 살림을 꾸려나가기에는 부족함이 있어 부지런하게 움직일 수밖에 없다”며 “최근 추석을 맞아 이랜드재단에서 진행하는 캠페인에 모델로 참여해 기부금과 지원 물품을 얻어 나눠 드리기도 했다”고 전했다.
끝으로 박 할머니는 “최근 간호사관학교에 방문해 보니 남학생들이 8명 있었다”며 “남학생이 지원을 많이 했으면 좋겠다”는 바람을 전하기도 했다. 그는 “남학생들이 할 일이 많다”며 “예를 들면 중환자실의 경우 대소변을 다 받아내야 할 때도 있는데 여학생들이 하기는 정말 쉽지 않다. 환자는 환자일 뿐이기에 당연히 해야 하지만 남학생들이 있으면 좀 더 자연스럽게 할 수 있지 않을까 싶다”고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