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식 담보로 대출 받거나 지분 매각해 재원 마련…. 경영권 위협 사례도

[일요서울 ㅣ이범희 기자] 정부가 22년 만에 상속세를 개편한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수 천억 원에서 수조 원까지 상속세를 내야 했던 총수 일가에 이목이 쏠리고 있다. 이들의 상속세 재원 마련 여부는 물론 상속세 개편 추진 이후 해당 기업의 변화에 대한 궁금증도 커졌다. 이미 일부 기업은 개편 추진 전 상속세를 마무리 짓겠다는 방침을 내부적으로 세운 것으로 알려지기도 한다.

- 정부·여당, 세제 개편 카드 발표…. 가업승계 세금 논란
- 삼성 LG 한진 재벌총수들, 상속세 수 천억에서 수조 원 


고(故) 이건희 삼성 회장의 유가족이 보유 중인 삼성 계열사 주식 일부를 매각한다. 시가로는 2조 원이 넘는 규모다. 앞으로 남은 10조 원대 상속세를 내기 위해서다.

최근 재계와 금융감독원 공시 등에 따르면 고 이건희 회장의 부인 홍라희 전 리움미술관 관장은 지난 5일 삼성전자 주식 1994만1860주(0.33%)에 대해 KB국민은행과 유가증권 처분신탁 계약했다.

이건희 회장의 장녀인 이부진 호텔신라 사장도 같은 날 삼성SDS 주식 150만9430주(1.95%)에 대해 국민은행과 처분신탁 계약을 맺었다. 이서현 삼성복지재단 이사장은 삼성생명 주식 345만9940주(1.73%)와 삼성SDS 주식 150만9430주(1.95%)를 팔겠다고 공시했다.

삼성은 상속세를 5년에 걸쳐 6회에 나눠서 내는 연부연납제를 활용하고, 지난해 삼성전자에서만 받은 총수 일가의 배당금이 약 1조 원에 달하지만 결국 계열사 주식까지 팔아야 했다.

지난 8월 서울 장충동 저택을 196억 원에 이병철 삼성그룹 창업주의 장손 이선호 CJ제일제당 부장에게 매각한 것도 내년 4월에 또 한 차례 내야 하는 상속세 재원 마련과 무관치 않다고 분석한다. 삼성 총수 일가는 상속세 때문에 금융권에서 주식 담보 대출·신용대출 등을 받기도 했다.

앞서 이건희 회장은 주식과 부동산, 미술품 등 26조 원 규모의 유산을 남긴 것으로 알려졌다. 이 가운데 삼성 계열사 주식의 상속 재산가액은 18조9633억 원이다. 이에 따른 상속세만 11조3000억 원대에 이른다.

삼성뿐 아니라 LG, 롯데, 한진, 농심·율촌화학 등도 상속세 납부로 고심 중이다.
구광모 LG그룹 대표는 고 구본무 LG 회장이 남긴 유산에 대한 상속세를 내기 위해 2018년 그룹 내 물류회사 판토스 지분 7.5%를 매각한 것으로 알려졌다. 롯데에서도 고 신격호 명예회장이 남긴 재산에 대한 상속세 4500억 원 중 3200억 원은 한국에서, 1300억 원은 일본에서 납부하고 있다.

고 신춘호 농심 창업자의 주식을 상속받은 신동원 농심 회장 일가도 마찬가지다. 신 회장의 장남인 신상렬 농심 경영기획팀 부장은 상속세를 마련하기 위해 최근 농심 주식을 담보로 107억 원의 대출을 받은 것으로 알려졌다.

우리나라의 상속세는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최고 수준이다. 상속 재산이 30억 원이 넘으면 상속세 최고세율이 50%가 적용된다. 이때 최대 주주 지분 등은 20%를 할증 평가하기에 상속세는 최대 60%까지 높아질 수 있다.

재계 일각에서는 “상속세 50%를 다 내고 나면 향후 30년 후에는 상당수 대기업의 오너 경영이 막을 내리게 될 것”이란 말까지 나온다.

- 수천억대 상속세에 곳간 ‘흔들’

상속세 재원 마련을 위해 주식을 담보로 대출받거나, 지분을 매각하는 사례가 급증하면서 경영권이 위협받을 수 있다는 우려도 커지기 때문이다. 실제로도 경영권이 흔들리는 사례도 있다.

조양호 전 한진 회장의 갑작스러운 별세로 1700억 원을 상속 받은 조원태, 조현아, 조현민 세 자녀가 보유 주식을 매각하는 과정에서 오너 일가 지분율이 축소되면 2대 주주인 KCGI와의 지분율 격차 감소로 경영권 분쟁을 겪어야 했다. 비록 조원태 회장이 경영권을 지켜냈지만, 이 과정에서 힘든 시간을 보낸 것도 사실이다.

2017년 타계한 고 이수영 OCI 회장의 장남 이우현 부회장은 상속세 1900억 원을 마련하기 위해 보유 지분 일부를 매각해 OCI의 3대 주주로 내려앉았다.

이와 관련해 한국경영자총협회는 대선 정책건의서 `제20대 대선후보께 경영계가 건의드립니다` 발간을 통해"기업을 살리고 기업인을 뛰게 하는 조세제도를 만들어 달라"라며 ▲법인세 최고세율 인하(25%→22%)와 기업투자 세액공제 확대 ▲상속세 최고세율 인하(60%→25%)와 최대 주주 주식 할증평가 폐지 등을 건의했다.

손경식 회장은 발간사에서 "20대 대선후보들에게 ‘자유로운 경제활동과 기업가정신이 존중 받는 대한민국’을 만들어 줄 것을 강력히 호소한다"라며 "상속세 등 조세제도 개편의 필요성을 재차 강조했다.

경총 관계자는 일요서울에 "경제 전반의 이슈를 다루는 ‘기업 활력 제고는 경제를 살리는 지름길’ 분야는 기업 규제 패러다임 전환, 의원 입법에 대한 규제심사 프로세스 도입 등과 함께 상법·공정거래법 등 경영 관련 법제도 개선, 법인세, 상속세 등 조세제도 개편의 필요성 등을 제시하고 있다"라고 밝혔다.

한편 재계가 상속세 부담 완화를 요구한 건 어제오늘의 일은 아니다. 재계는 상속세의 명목 최고세율인 50%가 다른 나라에 비해 너무 높다는 주장을 계속해왔다.
재계는 상속 재산이 주식이고 그 지분이 50%가 넘으면 주식의 가치를 최대 30% 할증해서 평가하기 때문에 다른 나라에 비해 비싸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시민단체 등에서는 상속세 납부는 당연한 것으로 사회 환원에 이바지해 장기적인 경제 활력 유지에 필요하다고 맞선다.

- 시민단체 "실질 이득 따져야" 

경제개혁연대는 “상속세 부담 때문에 기업을 매각한다거나, 이민이 증가할 것이라는 주장은 사실에 근거하지 않은 일방적인 추측으로, 전체 인구의 극소수에게만 중요한 상속세법 현안이 어떻게 민생법안이나 상법, 공정거래법 개정 등 경제민주화 법안보다 우선시 될 수 있는지 개탄하지 않을 수 없다”라고 밝혔다.

?그러면서 "재계는 국내 상속세 최고세율이 65%라는 주장을 지속해서 하면서 상속세법의 개정을 요구하고 있으나, 분명히 말하건대 현행 상속세 최고세율은 50%이다"라며 "재계의 주장대로 65% 세율이 나온 것은, 주식 평가와 세율에 관한 사항을 구분하지 않고 의도적으로 뒤섞어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라고 꼬집었다.

경제개혁연대는 "M&A시 자발적으로 경영권프리미엄을 가산한 것은 기업들이다. 즉, 유리한 상황에서는 프리미엄을 반영한 것이 시가라고 주장하며, 상속할 때에는 프리미엄을 제외하는 것이 시가라고 주장하는바, 이러한 재계의 주장은 논리적 일관성이 없다"라고 했다.

경제개혁연대 관계자는 본지에 "기업과 기업주는 엄격히 구분할 필요가 있다. 상속세의 납부 주체는 개인이며, 상속세 때문에 기업이 도산한다는 주장은 기업의 돈을 쌈짓돈처럼 쓰고 있다는 자기 고백과 다르지 않다"라고 했다.

이어 "상속세 납부를 위해 주식을 매각해야 한다고 하지만, 창업주의 가족이 아닌 사람이 경영한다고 해서 회사가 망가지거나, 고용 또는 투자가 줄어든다는 실증적인 연구 결과도 없다"라며 "이들의 주장은 검증되지 않은 사실을 가지고 사람들의 불안감을 조장하며 조세제도의 근간을 흔드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라고 일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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