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스먼드 투투 남아프리카공화국(남아공)의 성공회 대주교가 지난 12월26일 90세로 선종했다. 그는 인구 6천만 명 중 10% 밖에 안 되는 백인 소수가 흑인차별을 강행하던 ‘아파르트헤이트(Apartheid:인종차별)’ 정책 반대에 앞장서서 백인 정부를 무너트린 1등 공신이다. 남아공 흑백차별 반대운동 상징 인물로는 흑인 넬슨 만델라를 꼽는다. 하지만 그는 1990년 까지 27년간 감옥에 갇혀 있었다. 그가 석방된 것도 투투 대주교의 민권운동 덕분이었다.

남아공 흑인운동의 정치조직은 ‘아프리카민족회의(A.N.C.)’였지만, 투투 대주교는 사제로서 비폭력 저항운동을 확산시켜 백인 정권을 굴복시켰다. 그는 흑인들이 집권한 후에도 백인에 대한 “보복” 아닌 “복구”와 “평화적 흑*백 화합”을 역설하였다. 1984년 노벨 평화상을 받았다. 투투의 노벨상 수상은 김대중 대통령처럼 남북정상회담을 돈 주고 샀고 로비로 받았다는 매도와 빈축 없이 만인의 박수를 받았다.

투투는 감리교 학교 교사 아버지와 학교 식당 조리사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그는 남아공에서 대학을 거쳐 영국에 유학해 학사와 석사하위를 취득했다. 어렸을 때 젊은 백인이 자기 아버지에게 “이 녀석”이라고 하대한 말에 치욕감을 느꼈다. 그러면서도 그는 백인 목사가 자기 어머니에게 모자에 손을 대며 공손히 인사하던 것을 보며 백인에 대한 감명도 받았다.

투투는 작은 체구에 겸손했다. 그는 장례도 검소하게 치르고 관은 가장 싼 걸로 하라고 당부했다. 그의 설교는 카랑카랑했고 재치와 유머가 넘쳤다. 연설 중 천진난만하게 낄낄 웃기도 하고 작은 요정처럼 춤도 추었다. 분노를 터트릴 때는 노도와 같았다. 이런 투투의 연설은 청중을 즐겁게 하며 절대적 공감대를 끌어냈다.  

남아공은 1994 만델라 대통령 집권 후 지금 까지 흑인 민권운동을 주도했던 A.N.C. 세력에 의해 통치되고 있다. 그러나 투투는 A.N.C. 출신 타보 음베키와 제이컵 주마 대통령의 부패*무능을 가차 없이 질타했다. 투투는 흑인 정권하에서 “너무 많은 우리 흑인들이 참혹안 빈곤속에 짐승처럼 살아가고 있다”고 통탄했다. “이 흑인 정권은 백인 정권 보다 나쁘다”며 분노했다. 그러면서 그는 다음 선거에선 A.N.C. 정권을 패퇴시키겠다고 경고했다.

투투 대주교의 흑인 정권 비판은 그가 순수한 흑인 민권운동가였음을 확인케 한다. 그는 1990년 만델라가 석방되자 자신이 이끌어온 반‘아파르트헤이트’ 운동을 정치인에게 맡겨야 한다며 모든 주도권을 만델라에게 넘겨주었다. 민권운동을 특권 도약대로 삼지 않은 것이다. 뿐만 아니라 종교인은 권력에 기웃거려선 안 된다며 성직자의 관직 진출을 반대했다. 그는 흑인 권력의 비정(秕政)을 “내 편”이라고 감싸지도 않았다. 백인 정권이 차라리 흑인 정권 보다 나았다는 그의 비판은 그가 흑인 민권 향상을 위한 참된 운동가였음을 실증한다.

투투 대주교가 만델라 석방과 함께 자신의 민권운동 주도권을 만델라에게 넘겨주었고 흑인 정권의 무능과 부패를 가차 없이 질책한 모습을 상기하며 한국 운동권 정치인들의 뒤틀린 작태가 떠오른다. 상당수 한국 운동권 출신들은 인권운동을 권력투쟁의 도구로 삼았고 자기 운동권 정치인들의 부정*비정에 대해선 덮어주고 변명해주었다. 그들은 입에 침이 마르도록 ‘정의’와 ‘공정’을 외쳐대면서도 불의와 불공정으로 치달았다.

인권 변호사였던 문재인 대통령은 독재자 김정은 한 사람 비위를 맞춰주기 위해 2300만 북한 동포의 참혹한 인권을 외면한다. 우리나라에서도 투투 대주교 같은 순수하고 일관된 인권운동가 출현이 절실하다. 하지만 이 절실한 기대가 물거품 되지 않을까 두렵다. ‘쓰레기통에서 장미 꽃은 필 수 없다’는 말처럼 오염된 인권운동 정치권에선 투투 같은 인권운동가가 피어나기 어렵기 때문이 아닌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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