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시민에게 북한산이 있다는 것은 큰 행운이다. 서울시민이 가장 즐겨 찾는 산이다. 빼어난 경관에서 위로와 휴식을 얻는다. 장대한 백선 능선의 자태, 신비에 빠져들게 하는 계곡, 계절 따라 변하는 나무와 나무 따라 변하는 풍경……. 어떻게 북한산의 유혹을 뿌리칠 수 있겠는가. 북한산이 주는 행운은 오늘을 사는 서울시민에게만 있는 게 아니다. 옛날에는 지금보다 훨씬 중요했다. 단순한 휴식처가 아니다. 더욱이 산을 오르는 즐거움을 주는 곳도 아니다. 북한산의 역사·문화의 기록적 가치와 특성이 그것을 반증한다. 이를 잘 보여주는 게 있다. 바로 사찰이다.
 

진관사 대웅전 (사진=위성지 여행작가)
진관사 대웅전 (사진=위성지 여행작가)

-불교 명산북한산....500년 넘는 고찰 수두룩
수백 개에 이르는 장독, 우리나라 사찰음식의 메카


북한산은 불교 명산이다. 봉우리보다 사찰이 더 많다. 500년이 넘는 고찰도 수없이 많다. 흥국사(599), 삼천사(661), 천축사(673), 승가사(756), 도선사(862), 관음사(895), 진관사(1101), 문수사(1109), 태고사(1341) 등이 대표적 고찰이다. 아미타사, 상운사, 중흥사 등 연대 미상의 고찰도 즐비하다. 연식이 일천한사찰은 더 말할 필요도 없다. 북한산 등반은 곧 북한산 사찰 순례라고 이름 붙여도 지나치지 않을 정도다. 필자도 사찰 순례에 나섰다. 은평구 소재의 유명 사찰 몇 곳을 돌아봤다.

# 서울의 4대 명찰 중...독립군의 길 백초월길들머리

먼저 진관사다. 진관사는 서울의 4대 명찰(-불암사<불암산>, -진관사<북한산>, -삼막사<관악산>, -심원사<보개산>) 중 하나다. 은평한옥마을을 지나면 진관사라는 석판이 서있다. 진관사 들머리다. 여기서부터 백초월길이다. 독립운동가인 백초월 스님의 업적을 기려 이 같은 이름을 붙였다. 백초월 스님은 일심회라는 비밀결사조직을 결성해서 독립운동했다. 백초월 스님은 가정용 태극기를 최초로 만들었다. 일장기에 색을 덧칠해 손 태극기를 만들어 보급했다.

『三角山 마루에 새벽빗 비췰제
네 보앗냐 보아 그리던 太極旗
네가 보앗나냐 죽온줄 알앗던
우리 태극기를 오늘 다시 보앗네
자유의 바람에 태극기날니네
이천만 동포야 만세를 불러라
다시산 태극기를 위해 만세만세
다시산 대한민국

백초월길에 서 있는 태극기라는 시비다. 이 시는 진관사 칠성각에서 발견된 독립신문 제30호에 실린 작품이었다. 이 신문을 비롯한 독립운동 유물 20여 점이 2009년 진관사 칠성각 해체복원 공사 과정에 태극기에 싸인 채 발견됐다. 이 태극기를 일명 진관사 태극기라고 부른다. 19193·1운동 때 조선 백성은 이 태극기를 흔들며 독립 만세를 외쳤다. 이를 볼 때 진관사가 항일운동의 거점 중 하나였음을 짐작하게 한다.

필자도 일제강점기 때 독립투사가 수없이 오르내렸을 백초월길을 따라 진관사로 향했다. 은평한옥마을에서 1km 남짓 걸었을까. 진관사의 정문인 일주문이 나왔다. 三角山 津寬寺(삼각산 진관사) 현판이 또렷하다. 현판 팔작지붕 위에 북한산 삼각 봉우리인 백운대·인수봉·만경대가 삼각뿔처럼 얹혀 있다. 일주문 오른편에는 옆으로는 북한산 계곡물이 흐른다.

200
m를 지나자 진관사 공적비가 나온다. 공적비의 배경은 진관사 소나무다. 낙락장송의 자태가 근엄하다. 진관사 경내를 지나는 계곡에는 극락교와 세심교가 있다. 이 다리에 서 있으면 솔향기와 계곡 물소리는 부처님의 가르침이 된다. 진관사와 어우러진 북한산 자락의 아름다움이 평온하게 만드는 것이다. 속세를 떠났으니 당연한 일이다.

진관사 경내 백초월 스님과 택륵기 (사진=위성지 여행작가)
진관사 경내 백초월 스님과 택륵기 (사진=위성지 여행작가)

# 남자를 사랑한 김치향..성종 부인과 염문 진관사 탄생?

자연 음미를 마치고 진관사 대웅전 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보통의 절에는 대웅전 앞에 사대천왕이라는 산문이 있게 마련이다. 사천왕은 동서남북 사방에서 부처의 법을 지키는 네 수호신이다. 사신은 지국천왕(持國天王··국토와 백성), 광목천왕(廣目天王··불법), 증장천왕(增長天王··만물 소생), 다문천왕(多聞天王··도량과 설법)이다. 그런데 진관사에는 사천왕문이 없었다. 대신 홍제루가 있다. 홍제루 계단을 오르자 대웅전 석단이 모습을 드러냈다. 홍제루를 빠져나오고서야 대웅전 전모를 볼 수 있다. 부처님의 가르침인 겸손을 입체적으로 가르치고 있는 셈이다.

대웅전을 마주하자 다양한 진관사의 당우(堂宇·규모가 큰 집과 작은 집을 아울러 이르는 말)눈에 들어왔다. 망부전, 나한전, 동정각, 칠성각 등이 질서정연하게 배치되어 있다. 천천히 진관사 경내를 돌아봤다. 빛바래고 낡은 전각이 없었다. 세월의 때가 전혀 묻어있지 않았다. 그만이 아니다. 손상된 전각은 하나도 없었다. 나한전을 제외하고는 모두 현대적 건물 같았다.

천년고찰에 세월의 흔적이 없다? 새로 지었다는 뜻이다. 역사적 사건이 천년의 역사를 무너뜨린 것이다. 진관사는 고려 현종 2(1101)에 창건됐다. 왕이 스님에게 헌사에 유일무이한 사찰이다. 또 왕권 다툼이 만든 절이다. 고려 성종의 부인이 천추태후는 신하인 김치양과 염문을 피웠다. 당연히 김치양의 권세는 커졌다. 김치양의 득세하면서 성종의 아들이자 현직 왕인 목종은 국정에 관심이 잃어갔다. 대신 남자를 사랑한 남자가 됐다. 유행간과 유충정 등 꽃미남과 놀아났다. 남색가인 목종에게 후사가 없는 것은 당연지사. 태조 왕건의 손자인 왕순이 왕업을 잇기로 가닥이 잡힌 상황이었다.

그런데 천추태후와 김치양 사이에 아이가 태어났다. 천추태후는 조카인 왕순을 동승(12)으로 만들어 숭교사에 보냈다. 김치양과 사이에 낳은 아이를 왕으로 옹립하기 위해서였다. 동승이 된 이후에도 왕순은 이모가 획책한 죽음의 고비를 수없이 넘겼다. 신혈사에 머물던 진관스님이 이 사실을 알고 왕순을 숨겨줬다. 훗날 임금이 된 왕순(현종)은 신혈사에 대가람을 짓게 하고 그 이름을 진관스님의 이름을 딴 진관사로 하라고 명령했다.

칠성각 누각 (사진=위성지 여행작가)
칠성각 누각 (사진=위성지 여행작가)

# 수륙사...불교의 최고 사당...600년의 역사 이어져

이런 내력을 가진 진관사는 억불정책을 펴던 조선시대에도 큰 위세를 떨쳤다. 진관사에는 수륙사가 있다. 수륙사는 유교의 종묘와 같은 역할을 한다. 종묘는 조선의 최고 사당이다. 수륙사는 불교의 최고 사당인 셈이다. 수륙사는 수륙재를 지낸다. 진관사에서는 국행수륙재를 지냈다. 국가가 주관하는 수륙재라는 의미다. 무려 그 역사가 600년을 이어왔다.

조선 태조 이성계가 나라의 안녕과 국민의 평안을 기원하기 위해 네 차례나 봉행한 게 그 시작이다. 하지만 나라의 안녕과 국민의 평안은 6·25 전쟁으로 완전히 깨졌다. 이때 나한전, 그리고 칠성각 등 일부 전각만 남기고 모두 불에 탔다. 이것을 진관(眞觀)이라는 비구니 스님이 진관사 절터에 당우를 차례로 새워 비구니 도량으로 사용하여 오늘날에 이르고 있다.

진관사에는 다른 절에서 흔히 볼 수 없는 게 또 있다. 장독대와 수백 개에 이르는 장독이다. 이곳이 우리나라 사찰음식의 메카임을 알려준다. 사찰음식은 세계적으로도 매우 독특한 음식이다. 불교국가 중에서도 사찰음식의 전통이 이어진 나라는 한국과 일본, 중국뿐이다. 소승불교 국가에서는 사찰에서 음식을 만들지 않는다. 스님은 모두 탁발한다. 사부대중은 음식 공양한다. 공양하는 음식도 사부대중이 평소에 먹는 음식이다. 고기가 포함되는 게 이상할 게 없다.

즐비한 장독대 (사진=위성지 여행작가)
즐비한 장독대 (사진=위성지 여행작가)

진관사가 사찰음식으로 세계적 명성을 얻은 것은 6년 전 바이든 대통령의 부인인 질 여사가 이곳에 다녀간 뒤 콩국수 요리에 대해 극찬한 게 계기가 됐다. 질 여사에서 진관사 콩국수 요리를 소개한 사람은 바이든 부통령 시절 백악관 수석 요리사 중 한 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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