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시민에게 북한산이 있다는 것은 큰 행운이다. 서울시민이 가장 즐겨 찾는 산이다. 빼어난 경관에서 위로와 휴식을 얻는다. 장대한 백선 능선의 자태, 신비에 빠져들게 하는 계곡, 계절 따라 변하는 나무와 나무 따라 변하는 풍경……. 어떻게 북한산의 유혹을 뿌리칠 수 있겠는가. 북한산이 주는 행운은 오늘을 사는 서울시민에게만 있는 게 아니다. 옛날에는 지금보다 훨씬 중요했다. 단순한 휴식처가 아니다. 더욱이 산을 오르는 즐거움을 주는 곳도 아니다. 북한산의 역사·문화의 기록적 가치와 특성이 그것을 반증한다. 이를 잘 보여주는 게 있다. 바로 사찰이다. 두 번째 삼천사를 다녀왔다.

북한산 능선-삼천사 뒤로 북한산 능선이 또렷이 보인다. (사진=위성지 여행작가)
북한산 능선-삼천사 뒤로 북한산 능선이 또렷이 보인다. (사진=위성지 여행작가)

진신사리 모신 적멸보궁...마애여래입상 보물 유명
- 
물골 마래불, 부처님 자비 서린 삼천사...산사의 즐거움

지난호에 이어 북한산 산사를 찾았다. 응봉 중턱에 있는 삼천사다. 삼천사는 진관사에서 자동차로 10분 정도 거리에 있다. 직선거리는 1km도 채 되지 않는다. 삼천사는 원효대사가 창건한 절(661)이다. 혹자는 묻는다. 신라시대의 고찰은 왜 원효대사 아니면 의상대사가 지은 것이냐고. 사실 그렇다. 신라불교는 귀족불교였다. 이들 두 명의 종교 지도자에 의해 신라불교는 대중 속으로 들어왔다. 그들이 창건한 사찰이 많다는 것은 그들이 얼마나 민중과 함께 했는지를 반증한다.

# 대중 불교 일환, 원효대사 창건

삼천리골 입구에서 출발했다. 산자락에 있는 진관사와 다르다. 굽이치는 계곡을 따라 난 산길을 올라야 한다. 겨울 산사로 가는 길에는 자연의 속살이 잘 드러난다. 앙상한 가지의 숲길, 추위에 움츠린 계곡, 속세를 잊게 하는 찬 바람……. 자연의 속살에서 불심을 느낀다. 불심은 체험하는 산행은 부처가 되는 고행과 같다.

힘들게 삼천사에 다다랐다. 삼천사는 661년 원효대사가 개산(開山·절을 세움)했다. 1482(성종 12)에 편찬된 <<동국여지승람>>(1482)<<북한지>>(1745)에 따르면, 삼천사에서 3,000여 명의 승려가 도량을 닦았다. 삼천사는 대가람(大伽藍·수많은 승려가 살면서 불도를 닦는 도량)이었다는 얘기다. 그 위세가 어떠했는지 짐작이 간다. 그 위세가 삼천사(三千寺)’라는 이름의 유래라는 설이 있다.

이는 사실이 아니다. 원효대사가 세운 절은 三川寺(삼천사)’. 이 절은 소실됐다. 그 이유는 기록에 남아 있지 않다. 임진왜란 때의 일이라고 한다. 당시 절은 항일 저항운동의 거점이었다. 승병 집결지였다. 당연히 승병과 일본군이 격돌했을 것이다. 이 과정에서 삼천사가 불탄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불교를 배척하던 조선시대에 재건되지 못했다. 불에 타지 않고 남은 일부 전각도 6·25전쟁 때 전소됐다. 지금의 삼천사(三千寺)에서 계곡을 따라 30여 분 올라가면 그 흔적을 만날 수 있다. 삼천사지(三川寺址). 삼천사 옛터는 탐방 금지 구역이다. 인터넷 자료에 의하면 장대석과 석축 등을 볼 수 있다고 한다. 1,500여 년의 삼천사 폐사지는 1964년 국립중앙박물관 조사에 의해 발굴됐다.

# 탐방금지 구역된 삼천사지...삼천사 옛터

세존진신사리보탑.(사진=위성지 여행작가)
세존진신사리보탑.(사진=위성지 여행작가)

원효의 유업을 이어 삼천사를 중건한 이는 평산 성운 화상이다. 삼천사 본사의 부속 암자가 있던 자리에 새 절터를 잡았다. 1970년대의 일이다. 절 이름도 바꿨다. ‘三川寺三千寺로 바꿨다. 3,000여 명의 승려를 거느린 과거의 영예를 회복하겠다는 의지를 드러낸 것일까.

삼악산 삼천사라는 현판이 걸린 일주문을 지났다. 직감적으로 흔히 볼 수 있는 신라시대의 사찰과는 다른 모습이다. 신라시대의 도량은 마당이 넓은 게 특징이다. 마당도 텅 비어 있는 게 보통이다. 넓고 빈 마당은 신라의 정신인 화엄 사상을 상징한다. 하지만 지금의 삼천사의 마당은 좁았다. 석탑과 보살상, 용 조각, 벽화 등 다양한 치장이 되어 있었다. 특히 승천하듯 꿈틀대는 대리석 용이 마당의 양쪽에 담장처럼 조각되어 있다. 담장엔 다양한 탱화가 그려져 있었다.

5층 석탑이 내방객을 가장 먼너 맞았다. 나한사리를 봉안한 석탑이다. 나한사리는 성운화상이 1988년 미얀마에서 받은 것이라고 한다. 이어 9층 석탑이 또 나타났다. ‘세존진신사리보탑이다. 부처님의 진신사리를 봉안한 탑이다. 그런데 우리의 고찰에서 흔히 볼 수 없는 형태다. 탑신은 한국적이다. 탑 꼭대기와 기단과 기단 주변부는 인도풍이다. 상층부에는 황금빛 사자상 4마리가 있다. 또 기단 주변에는 다양한 동물 모양의 석물이 서 있다. 아니나 다를까. 무여 스님은 인도 사르타트 아소카 석주의 4두 사자상과 월정사 9층 석탑을 접목한 새로운 형태의 탑이라고 설명했다.

아소카 시대의 탑을 접목한 이유가 무엇일까라는 의문이 든다. 아소카는 8개 나라로 나뉘어 있던 인도를 통일한 군주다. 아소카는 8개의 사리탑을 전국에 세웠다. 그 당시의 양식이 바로 아소카 석주의 4두 사자상이다. 석가모니가 생전에는 머리카락, 손톱도 호신용 기물로 소중한 대접을 받았다. 입적하게 되자 석가모니의 사리는 더욱 신성하고 신령한 영물이 됐다. 인도의 8개국이 사리를 나눠 가졌다. 심지어 더 많은 사리를 갖기 위해 전쟁 일보 직전까지 갈 정도로 치열했다.

인도를 통일한 아소카 왕은 여덟 나라에 흩어진 사리를 다시 수습했다. 그리고 8개의 사리탑을 세워 석가모니의 위업을 기렸다. 그때 만든 사리탑이 바로 4두 사자상 탑이다. 4두 사자상이 바로 석가모니 진신사리를 상징하는 셈이다. 4두 사자상 탑은 곧 진신사리를 모신 기념탑(파고다 혹은 수투파)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진신사리를 모신 사찰을 적멸보궁이라고 한다. 삼천사에는 4두 사자상 탑 말고도 부처님 사리 3과가 더 모셔져 있다. 마애여래입상 근처의 종형사리탑에 있다.

대웅보전-일주문에서 바라본 대웅보전과 경내.(사진=위성지 여행작가)
대웅보전-일주문에서 바라본 대웅보전과 경내.(사진=위성지 여행작가)

# 사리탑 4두사자상...석가모니 전신사리 상징

사찰 마당 오른쪽 위쪽에 지상보살 입상이 서 있다. 불전의 안녕을 기원하듯 내려다보고 있다. ‘지옥이 텅 빌 때까지 성불하지 않겠다는 지상보살의 서원과 진신사리의 영력이 삼천사를 지키는 듯하다. 지상보살 입상에서 부처님을 모신 본당, 대웅보전의 옆면이 한눈에 들어왔다. 옆면에서 볼 때 또렷이 자가 모양이다. 밋배지붕 형태의 전통가옥이라는 얘기다. 대웅보전 내부는 주불 왼쪽엔 지혜의 표상인 문수보살이, 오른쪽에는 덕의 상징인 보현보살이 봉안되어 있다.

대웅보전 뒤로는 천태각과 산령각이 있다. 이들 전각은 나한상으로 유명하다. 특히 2층 구조로 된 산령각 1층에 나한전이 있다. 나한전에는 500명의 황금 나한이 모셔져 있다. 나한을 대하는 순간 황홀한 금빛에서 눈이 부실 지경이었다. 그렇게 화려한 불전을 본 적이 없다. 제천 박달재에 있는 목굴암 나한상에 못지않은 감동을 줬다. 그만이 아니다 천태각에는 나반존자상과 16나한상이 봉안되어 있다. 나반존자상은 삼각산에서, 16나한상은 전국의 명산에서 채취한 자연석으로 빚은 조각상이라고 한다.

삼천사에는 진신사리 못지않은 보물이 있다. 조금 전에 언급한 마애여래입상이다. 연화대좌에 서 있는 부처의 모습을 부조한 마애여래입상은 1979년에 보물로 지정됐다. 고려시대의 마애불로 북한산 승가사와 삼천사만이 보물로 지정되어 있다. 그만큼 예술성이 뛰어나고 보존상태가 훌륭하다는 얘기다. 마애불 위로 지붕돌이 있고 물골이 패어 있는 게 그 이유라고 한다. 불심 없는 최적 입지는 없다는 얘기가 새삼 떠오른다. 만약에 지붕돌이나 물골이 없었다면 삼천사 마애불의 자애로운 미소를 볼 수 없었을 것이다. 부처님의 자비가 느껴진다.

마애불-연좌대좌에 서 있는 부처의 모습을 부조한 삼천사 마애여래입상.(사진=위성지 여행작가)
마애불-연좌대좌에 서 있는 부처의 모습을 부조한 삼천사 마애여래입상.(사진=위성지 여행작가)
저작권자 © 일요서울i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