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산 탐방의 마무리는 북한산 조망이다. 은평구 최고의 조망 포인트인 봉산 전망대에 올랐다. 눈에 익은 북한산이 아니었다. 사패산, 도봉산, 삼각산(북한산)으로 이어지는 능선은 하나의 파노라마였다. 가히 압도적이다. 북한산의 풍광을 뒤로 하고 봉산을 내려왔다. 서오릉 고개를 지나 서오릉으로 향했다. 그 곁에 서삼릉이 있다.

문안인사를 하듯 고개 숙인 소나무가 병풍처럼 희릉을 둘러싸고 있다. (사진=위성지 여행작가)
문안인사를 하듯 고개 숙인 소나무가 병풍처럼 희릉을 둘러싸고 있다. (사진=위성지 여행작가)

서삼릉의 면적은 140만 평, 공개지역은 불과 7만평
왕후.세손.세자 불안했던 그들의 비극적인 한() 서려

서오릉 곁에 서삼릉이 있다. 도보로 20분 거리다. 서오릉만큼 아는 사람이 많지 않다. 아마도 이곳에 모셔진 왕과 왕후의 업적이 대단하지 못하고 명성도 높지 않은 탓일 것이다. 서삼릉은 이름에서 짐작할 수 있듯이 한양 서편에 있는 세 개의 능이다. 인종(1515~1545)과 인성왕후가 모셔진 효릉(孝陵), 철종과 철인황후가 주인인 예릉(睿陵), 중종의 제1계비 장경왕후가 안치된 희릉(禧陵)이 있다.

인종.인성왕후 효릉, 철종.철인황후 예릉...희릉

서삼릉의 입구에 안내도를 봤다. 이게 왜 일인가. 안내도에는 비공개지역이 훨씬 컸다. 비공개지역에 효릉과 연산군의 어머니인 폐비 윤씨의 회묘도 있다. 태실, 소경원, 왕자공주묘, 후궁묘 등도 마찬가지다. 관람객을 맞는 묘역은 예릉과 희릉뿐이다. 공개지역은 불과 7만 평에 지나지 않는다. 한때 서삼릉의 면적은 140만 평이었다. 옛 왕릉 터는 지금 경마훈련원과 보이스카우트 야영장 등으로 사용되고 있다. 문화재청은 이들 기관과 협의를 통해 비공개지역의 공개를 협의 중이라고 한다.

서삼릉 입구에 들어서자 이정표가 있다. 오른편에 자리한 희릉으로 발을 옮겼다. 곧 홍살문이 나타났다. 서오릉보다 훨씬 왕릉의 기운이 느껴졌다. 넓은 평지 저편에 장자각이 서 있다. 물론 희릉 봉침은 정자각 뒤에 숨어 있다. 정자각 뒤로 가자 참로(향로와 어로)가 봉침 언덕인 강()까지 이어져 있다. 40개 왕릉 중 유일한 경우다. 봉침을 둘러싼 소나무는 허리를 숙인 채 봉침을 향해 서 있다. 마치 신하가 왕후에게 문안 인사를 드리는 듯했다. 똑같은 능이지만 느낌이 사뭇 다르다.

장경왕후는 중종의 계비다. 정비인 단경왕후는 퇴출됐다. 아니 정확하게 말하면 왕비로 책봉되지 못했다. 중종이 왕이 되던 날, 궁궐에서 쫓겨났다. 중종반정에 반대한 신수근의 딸이라는 이유 때문이다. 지금 같으면 정상참작이 됐을지도 모른다. 신수근은 연산군의 매형였다. 반정에 참여도, 반대도 할 수 없는 사정이었다. 단경왕후가 ‘1일 중전’, 단경왕후 뒤를 이어 장경왕후가 왕비에 책봉됐다.

희릉의 정자각(사진=위성지 여행작가)
희릉의 정자각(사진=위성지 여행작가)

하지만 그도 왕비로서 영화를 누리지 못했다. 인종을 낳다가 산후 후유증으로 절명했다. 25세 꽃다운 나이다. 정경왕후 무덤은 본래 희릉에 있던 건 아니다. 태종의 헌릉 서쪽 언덕에 조성됐다. 능호도 정릉이었다. 사후 17년 뒤 중종의 세 번째 왕비 문정왕후에 의해 이곳으로 천장했다.

왼쪽으로 눈을 돌렸다. 멀지 않은 곳에 예릉이 있었다. 예릉에는 철종장황제와 철인장황후가 모셔진 쌍분이다. 어느 독자는 왕이 아니라 황제라고 명명하는지 궁금해 할 것이다. 황제의 칭호는 1897년 대한제국 선포한 이후에 사용했다. 1863년에 돌아가신 철종에게 황제 호칭이 맞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당연한 의문이다. 그 이유는 고종이 1908년에 철종을 황제로 추존한 때문이다. 42세 세상과 이별한 철인황제후는 철종 곁에 묻혔다.[‘신의 정원명당...굿하고 만지고....500년 역사 훼손]

예릉은 <<국조상례보편>>의 예에 따라 조성된 마지막 조선왕릉의 형태이다. 쌍릉의 형식으로 앞쪽에서 바라보았을 때 서쪽이 철종장황제 동쪽이 철인장황후의 능침이다.

조선왕릉은 신의 정원이란 말이 있다. 그만큼 자연 친화적인 명당이라는 얘기다. 명당은 무당이 기를 얻기 위해 자주 찾는 곳이다. 필자가 서삼릉에 가기 이틀 전인 25일 서삼릉에 비상이 걸렸다. 무당이 명당 중 명당인 예릉에서 간편식 굿을 벌인 것이다. 봉침 앞에서 칼로 닭의 목을 찔러 피 흘리게 했다. 그리고 주문을 외우는 등 간편식 굿을 했다. 왕릉은 본래 통행 제한구역이다.

언제가 한 탐방객이 제한구역을 넘어가 왕릉을 지키는 문인석의 코를 만졌다. 코를 만지면 사내아이를 출산한다는 속설을 믿고 한 행동이다. 문제는 그때 발생했다. 문인석의 코가 떨어진 것이다. 오래된 왕릉은 5백 년이 넘는다. 아무리 단단한 화강암으로 만든 문인석이라고 해도 세월의 풍파를 이기기에 벅차다. 조금만 충격에도 부서지고 만다. 그 이후 왕릉 주변의 통제가 현저히 강화됐다고 한다. 그런데 왕릉 앞에서 닭의 피를 뽑았으니 서삼릉이 비상 걸리는 것은 당연지사다.

얼마 전 김의겸 의원(민주당)소의 가죽을 벗겨 사회적 물의를 일으킨 굿판을 주도한 일광조계종과 건진법사는 깊은 연관이 있다면서 건진법사는 일광조계종 네트워크 고문이라고 주장했다. 이 행사 때 걸린 윤석열 국민의힘 후보 그리고 부인 김건희 씨 명의의 등롱을 근거로 윤 후보를 비판한 것이다.

와릉전망대에서 본 예릉의 서물들. 다른 능보다 다소 커보인다. (사진=위성지 여행작가)
와릉전망대에서 본 예릉의 서물들. 다른 능보다 다소 커보인다. (사진=위성지 여행작가)

필자는 그것이 진실이든 거짓이든 관심이 없다. 다만 우리나라 전통 굿 중 동물을 죽여서 신에 받치는 굿거리가 있다. 이를 타살(打煞)굿이라고 한다. 타살굿의 가장 중요한 의식은 동물의 피를 흘리게 하는 것이다. 그 피가 바로 액막이와 액땜의 매개물이다. 무당은 이 짐승을 죽인 칼로 자신의 혀를 베기도 한다. 베어낸 고기를 생것으로 먹기도 한다. 그런 기괴한 행동을 한 무당은 탈이 나지 않는다. 신기하다.

무당이 왕릉 앞에까지 올라간 비행은 아마도 왕릉은 보이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조선왕릉은 가까이 갈수록 언덕()이 무덤을 가리도록 설계되어 있다. 예릉에는 호기심 많은 관람객을 위한 배려가 있다. 왕릉 왼편에 왕릉 전망대를 설치해 놓았다. 멀리서나마 왕릉 전체를 조망할 수 있다.

의령원과 효창원...비극적인 세손.세자의 운명
 

조선왕릉은 자연과 독특한 건축양식이 조화를 이룬 공간임을 파란 하늘을 나는 기러기가 확인시킨다. (사진=위성지 여행작가)
조선왕릉은 자연과 독특한 건축양식이 조화를 이룬 공간임을 파란 하늘을 나는 기러기가 확인시킨다. (사진=위성지 여행작가)

다음 순서는 의령원과 효창원이다. 의령원은 추존 장조(사도세자)와 세자빈 혜경궁 홍씨 사이에 태어난 적장자이자 정조의 친형인 의소세손의 무덤이다. 다시 말하면 영조의 첫째 손주였다. 영조는 적장자가 아니었다.

조선 27대 왕 중 유일한 왕세제 출신이다. 거기다가 어머니는 무수리 출신이다. 태생적 약점으로 인해 수많은 도전을 받았다. 영조에게 장자는 선망이었다. 또 아들이 사도세자가 끊임없는 신경전을 벌이던 시점에 세손의 탄생은 영조에게 기쁨 그 자체였다. 아이가 태어나자마자 세손에 봉한 것을 보면 그 기쁨이 어떠했는지 짐작이 간다. 기쁨도 잠시였다. 의소세손은 3살 때 심각한 피부병에 시달리다 죽었다.

의소세손의 바로 앞에는 문효세자의 무덤인 효창원이 있다. 의소세손은 문효세자의 큰아버지다. 즉 정조의 아들이다. 최근 큰 인기를 끈 드라마, <옷소매 붉은 끝동>의 주인공인 정조와 의빈 성씨, 덕임 사이에서 태어난 맏아들이다. 두 살 때 왕세자로 책봉했으나 5살에 죽었다. 정조의 불행은 거기에 그치지 않았다. 정조의 사랑하는 여인은 임신한 채 사망했다. 한꺼번에 3명의 가족을 잃은 정조의 마음은 어떠했을까. 가슴이 아프다.

슬픔은 죽어서도 이어졌다. 의령원과 효창원에는 각각의 정자각도 없다. 일자형 배위청 하나를 나눠 쓰고 있다. 이는 어떻든 큰아버지와 조카가 한 곳에 묻힌 것과 관계가 있다. 두 사람의 무덤이 모두 이장됐다. 의소세자는 1949년에 서울 북아현동에서, 문효세자는 1944년 서울 청파동(효창공원)에서 이곳으로 옮겨졌다. 광복 전후, 어려운 국가 재정이 간소한 무덤을 만든 이유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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