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요서울 ㅣ이범희 기자] 국내 상장기업 가운데 경영권을 가족이 아닌 전문경영인이 승계하는 경우가 늘고 있다. 재계에 3~4세 시대가 본격화한 가운데 이 같은 흐름은 소유와 경영의 분리 필요성을 시사해 의미가 깊다. 일부 기업에서는 전문경영인에게 전권을 맡기고 오너는 총괄로서의 역할을 수행하는 변화의 모습도 보인다.  

- 최수연(네이버) 김준(SK) 원덕권(안국약품) 등 재계 전반으로 확산
- 재무관리와 경영승계 대비...오너일가 증가 업종 서비스 유일


주요 국내 상장사들의 주주총회가 본격 시작되면서 최대 화두는 '경영승계'와 '새판짜기'로 압축되는 모습이다. 일부 국내사는 오너 3~4세의 경영승계 작업이 포착됐고 몇몇 기업은 전문경영인(CEO) 교체가 예상된다.

지난 16일 기업데이터연구소 CEO스코어가 국내 500대 기업 중 조사가 가능한 411개 기업의 2012년부터 2022년까지 CEO 출신과 담당 분야 이력을 조사한 결과, 2022년 현재 이들 기업의 대표이사 총 563명 중 오너일가 출신은 16%, 전문경영인 출신은 84%로 각각 집계됐다.

- 두각 나타내는 전문경영인 누구

업계에 따르면 삼성전자는 한종희 사장을 부회장으로 승진시키면서 기존 가전(CE)과 모바일(IM) 부문을 통합한 ‘DX(Device eXperience) 부문’ 수장을 맡도록 했다. 한 부회장은 TV 개발 전문가 출신으로 2017년 11월부터 영상디스플레이사업부장을 맡아 삼성전자가 TV 사업에서 15년 연속 세계 1위를 차지하는 기록을 세운 주역이다.

LG그룹에선 권봉석 LG전자 사장이 부회장으로 승진해 ㈜LG 최고운영책임자(COO)에 선임됐다. 이로써 차석용 LG생활건강 부회장, 권영수 LG에너지솔루션 부회장, 신학철 LG화학 부회장 등 LG그룹 부회장은 4명이 됐다. 권 부회장은 주력 사업 경쟁력 강화를 지원하고 장기적 관점에서 LG의 사업 포트폴리오 고도화와 미래 준비를 강화하는 등 지주회사 운영과 구광모 회장의 보좌 역할에 주력한다.

SK그룹에선 김준 SK이노베이션 총괄사장이 그린 중심의 성장전략을 통해 회사의 미래가치를 높인 공로를 인정받아 부회장으로 승진했다. 김 부회장은 1987년 SK이노베이션 전신인 유공으로 입사해 SK수펙스추구협의회 사업지원팀장, SK에너지 사장 등 현장과 전략 등 주요 부서를 거쳐 2017년부터 SK이노베이션 CEO를 맡고 있다. SK수펙스추구협의회 환경사업위원회 위원장도 겸하고 있다.

농심은 지난해 말 오너 경영을 마무리하겠다고 선포했다. 오너 2세인 신동원 회장이 대표이사 자리에서 물러나면서 박준 부회장과 이병학 부사장이 공동대표로 농심을 이끌게 됐다. 이 부사장은 1985년 농심에 입사해 36년간 생산현장에서 근무해온 생산 전문가다. 

KT는 2002년 공기업에서 민영화된 후로 줄곧 주인 없이 전문경영인 체제로 운영되고 있고, KT는 올 초 안전보건 업무를 총괄하는 대표이사에 박종욱 경영기획부문장(사장)을 선임하며 구현모 단독 대표 체제에서 구현모·박종욱 각자대표 체제로 전환됐다. LG유플러스도 전문경영인이 대표를 맡아 회사를 이끌어오고 있다. 

네이버는 최수연 대표이사를 새 대표로 선임했다. 최 신임대표는 네이버를 신사업 인큐베이터로 키우면서 기술혁신을 이어가겠다고 취임 소감을 밝혔다. 네이버는 지난 14일 성남시 분당 네이버 사옥에서 23기 정기 주주총회와 이사회를 열어 최 대표를 신규 선임됐다. 최 대표의 선임으로 네이버는 창업 세대에서 인터넷과 함께 성장한 세대로 교체된다.

교보생명은 2018년까지 신창재 회장 단독대표 체제를 유지했었다. 이후 2019년 3월 윤열현 보험총괄 사장을 대표로 선임해 각자대표 체제로 전환했고, 지난해 3월에는 편정범 부사장을 사장으로 승진시키며 3인 각자대표(오너 1명, 전문경영인 2명) 체제를 구축했다.

손해보험사는 현재 모두 전문경영인이 대표를 맡아 회사를 이끌어오고 있다. KB손해보험의 경우 옛 LIG손해보험 시절 구자준 회장이 대표를 맡아 오너일가 경영을 이어갔으나, 2015년 KB금융지주에 인수된 이후 전문경영인 체제로 변경됐다. 보증 보험사인 SGI서울보증은 10년 전부터 전문경영인 체제를 유지 중이다. 재보험사인 코리안리는 2013년 박종원 전 대표의 퇴임 이후 오너 일가인 원종규 사장이 대표직에 올라 지금까지 경영을 맡고 있다.

안국약품은 53년만에 오너 경영체제에서 전문경영인 체계로 완전히 체질을 바꾼다. 어준선 회장과 장남인 어진 부회장이 자리에서 물러나고, 원덕권 전문경영인이 대표이사직에 올랐다. 실적 증대를 위한 신약 연구개발(R&D)에 힘을 싣겠다는 것이 회사의 설명이다. 안국약품 관계자는 "이번 전문경영인체제 전환으로 매출 퀀텀점프 목표를 갖고 있다"고 설명했다.

건설·건자재 업종의 경우에는 한화건설, 부영주택, 태영건설, 한진중공업, DL, 한라, 유진기업, 신영, 제일건설 등 9개 기업이 2012년 오너일가 경영체제에서 2022년 현재 전문경영인 경영체제로 운영되고 있다. 석유화학 업종도 2012년 오너일가가 이끌던 한화, 금호석유화학, 코오롱인더, SK이노베이션, SKC, 이수화학 등 6개 기업이 2022년 현재는 전문경영인체제로 운영 중이다.
철강 업종도 LS니꼬동제련, 영풍, 세아베스틸, KG동부제철, 고려제강, 대한제강 등 6개 기업이 같은 기간 오너일가 체제에서 전문경영인 체제로 탈바꿈했다.

[제공 : CEO스코어]
[제공 : CEO스코어]

유통업계에서는 백화점 부문 전문경영인의 몸 값이 크게 올랐다. 지난해 10월까지 신세계 대표이사를 맡았던 차정호 신세계 백화점부문 기획전략본부장(사장)은 작년에 급여 8억5700만 원에 상여금 7억4300만 원을 받으면서 총 16억 원을 보수로 수령했다. 이는 전년의 보수 대비 15.6%가 늘어난 규모다.

장호진 현대백화점 대표이사 겸 기획조정본부장, 김형종 현대백화점 대표이사 사장은 각각 지난해 급여 9억3500만 원과 상여 3억1100만 원 등 총 12억5200만 원을 챙겼다. 이는 전년의 총 보수 9억4600만 원보다 32.4%가 늘어난 규모다. 
 
- 신속한 의사 결정이 관건

반대로 오너 일가가 경영에 복귀하는 사례도 있다. 금융감독원 전자공시시스템에 따르면 교촌은 오는 30일 열리는 주주총회에 창업주인 권원강 전 회장과 윤진호 전 비알코리아 경영기획실장을 사내이사로 선임하는 안건을 상정했다. 안건이 통과될 경우 권 전 회장은 3년 만에 경영 일선에 복귀할 전망이다.

앞서 권 전 회장은 지난 2019년 3월 창립 28주년 기념일 행사에서 경영 퇴임을 공식 선언하고 창사 이래 최초 전문경영인 체제로의 전환을 선포했다. 교촌의 지속 성장을 위해 필요한 것은 급변하는 환경에 유연하게 대응할 수 있는 체계적이고 전문화된 시스템을 구축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판단에서다. 

재계의 한 관계자는 “창업주가 아닌 회사에서 드러나는 특징"이라며 "전문경영인이 회사를 운영하면서 업무 성과를 내는 것이 뚜렷하게 나타나고 있다"고 했다. 이어 그는 "오너와 역할 분담을 통해 회사 경영에 집중하는 경영인의 특성상 매출 향상에도 크게 기여하고 있다"고 덧붙였다. 반면 오너 경영 회사에 비해 신속한 의사결정이 못 내는 경우가 종종 있어 이 부분에 대한 아쉬움을 토로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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