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마산에 갔다. 필자에겐 버릇이 있다. 이름에 담긴 뜻을 새기는 것이다. 이름이 그 존재감을 드러내기 때문이다. 아마도 용마(龍馬)’보다 더 신성한 느낌을 주는 이름은 흔치 않다. 용과 말만큼 길한 동물이 흔치 않기 때문이다. 혹시나 하고 용마산의 전설을 찾아봤다. 삼국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백제와 고구려의 경계에 용마봉이 있었다. 전장이었다. 전쟁터에서 큰 장군 재목의 인물은 목숨을 지키기 어려웠을 것이다. 그런 때문일까. ‘용마봉일대에 범상치 않은 자태를 갖고 태어난 아기를 죽이는 풍습이 있었다. 한 아이도 그렇게 죽어갔다. 그러자 용마봉에 깃들어 있던 용마(용의 머리에 말의 몸을 하고 있다는 신령스러운 전설상의 짐승)가 나와 다른 곳으로 자리를 옮겼단다. 아마도 삶과 죽음을 가르는 살벌한 전쟁 현장이기에 생겨난 전설일 것이다.

용마산 정상에 있는 표시석. (사진=위성지 여행작가)
용마산 정상에 있는 표시석. (사진=위성지 여행작가)

- 용의 머리에 말의 몸을 하고 있는 신령스런 전설상의 짐승
- 고구려, 백제 경계, 삶과 죽음을 가르는 살벌한 전장터

삼국시대의 은 전략무기였다. 용마(준마)로 키우는 게 곧 전략무기 개발이었다. 실제로 용마산근처는 말을 사육하던 목장이었다. 이름에 그 흔적이 남아 있다. 용마산 자락에 자리한 면목동이 그것이다. ‘면목(面牧)’은 목장 앞이다. 면목동은 말을 키우는 마을이란 의미다.

입지 탓이었을까. 조선시대도 그랬다. 북벌 정책을 폈던 효종(165391) 때의 기록(효종실록)이다. 효종은 동구릉 목릉(선조와 왕비, 계비의 능)에 거동했다. 능행을 마치고 돌아오던 길에 송계교(지금의 월릉교)에 이르렀다. 왕은 금군별장(왕의 호위대장)에게 명령을 내렸다. 말을 잘 타고 활을 잘 쏘는 군사를 뽑아 말을 달리며 과녁을 쏘게 했다. 군사가 효종이 탄 수레 뒤에서 앞으로 가로 달리며 화살을 쏘았다. 화살은 정곡에 꽂혔다. 이를 본 효종은 흡족했다. 이는 중랑천 천변이 조선의 기마병 훈련장이었음을 알려주는 기록이다.

면목동...말을 키우는 마을, 월릉교 연관

용마폭포공원에 있는 국제규격의 인공암벽장.(사진=위성지 여행작가)
용마폭포공원에 있는 국제규격의 인공암벽장.(사진=위성지 여행작가)

눈치 빠른 독자는 용마산용마봉을 혼용하는냐고 물을지 모른다. 산에도 격이 있다. 봉은 산보다 등급이 낮다. 옛날에는 용마산, 망우산, 봉화산, 아차산을 통칭해서 아차산으로 불렀다. 봉화산에 있는 봉수대를 아차산 봉수대로 부른 것도 그런 이유다. 아차산의 최고봉이 바로 용마봉(348m)이었다. 용마봉이 용마산으로 격상된 데는 사연이 있다. 순조의 셋째 아들 효명세자의 무덤(수릉·綏陵)이 천장산에서 용마봉으로 이장된 뒤 이름이 바뀌었다. 효명세자는 익종으로 추존됐다. 왕릉이 있는 산을 봉으로 둘 수 없던 것이다. 수릉은 나중에 다시 동구릉으로 옮겨졌다.

사설이 길었다. 용마인공폭포 주차장에 도착했다. 주차장에서 산을 향해 계단을 오른 뒤 축구장을 벗어났다. 진입로를 지나자 거대한 인공암벽장이 나타났다. 이곳이 바로 유쾌한 웃음을 선사했던 재난 영화, ‘엑시트의 촬영장소라고 한다. 주인공인 조정식과 김윤아가 작품 속에서 인공암벽 등반 동아리로 나온다. 인공암벽은 거의 수직이다. 경사가 90도를 넘는 암벽도 있다. 높이도 꽤 높았다. 벽에 빨간색, 노란색, 파란색, 흰색, 회색 등 다양한 색깔과 모양의 홀드가 붙어 있다. 인공암벽을 타는 사람은 없었다. 이런 암벽을 맨손으로 타고 오르는 조정식의 모습이 떠올리며 눈을 돌렸다.

광장 끝에 병풍처럼 벽을 감싼 용마 인공폭포가 나왔다. 물은 흐르지 않았다. 산을 가르는 폭포수를 떠올린다. 가슴이 뻥 뚫리는 듯하다. 이 인공폭포는 1999년에 개장됐다. 개장 당시 동양 최대의 인공폭포였다. 높이가 무려 51.4m. 왼쪽에는 청룡폭포(21.4m), 오른쪽에는 백마폭포(21.0m)가 있다. 폭포 아래 펼쳐진 700여 평의 연못이 있다. 용마인공폭포가 만들어진 데는 다 이유가 있다. 용마산은 한때 골재 채석장으로 유명했다. 27(1961~1988) 동안 깎긴 용마산의 속살을 감추기 위해 인공폭포를 만들었다. 이곳이 채석장임은 눈을 왼쪽으로 돌리면 곧 알 수 있다. 깎아지는 절벽이 드러나 있다. 철망이 이불처럼 채석장 절개면을 덮고 있다.

서울시민의 휴식명소로 다시 태어난 용마인공폭포.(사진=위성지 여행작가)
서울시민의 휴식명소로 다시 태어난 용마인공폭포.(사진=위성지 여행작가)

최고의 야경을 선사하는 용마산 정상

본격적인 등반이 시작됐다. ‘등린이(등산+어린이=등산 초보자)’를 위한 등산코스라는 용마산 소개는 거짓임을 직감할 수 있었다. 처음부터 오르막이다. 그것도 모두 돌계단뿐이다. 그나마 위안을 주는 것은 활짝 핀 진달래와 개나리다. 꽃을 본 탓일까. 땀내가 향기롭다는 착각이 든다. 얼마를 올라갔을까. 삼거리에 팔각정이라는 푯말이 나타났다. 팔각정은 광진구 소관이다. 그냥 정상을 향해 걸었다. 중간중간에 뒤돌아 내려다본 경치는 듣던 그대로였다. “최고의 서울 야경을 보고 싶다면 용마산에 오르라는 얘기가 있다. 드디어 정상이다. 고생한 보람이 있다. 서울이 전체가 필자의 발밑에 있는 듯했다. 이상하다. 정상으로부터 20~30m 아래 전망대가 있다. 꼭대기보다 밑이지만 시야는 훨씬 넓어졌다. 레고 같은 집들 사이로 저 멀리에 중랑천과 한강이 만난다.

용마산에서 바라본 서울시내.(사진=위성지 여행작가)
용마산에서 바라본 서울시내.(사진=위성지 여행작가)

중랑천의 지명에 관해 뒤늦게 알게 된 얘기를 해야겠다. 언제가 중랑천의 설화를 설명했다. 중이(仲伊)라는 장님의 딸이 남장한 채 아버지 군역을 대신했다고. 그리고 딸은 여성임이 드러나지 않기 위해 대나무 대롱으로 소변을 봤다는 얘기도 기억날 것이다. 과연 대나무 대롱으로 용변을 볼 수 있었을까. 필자는 전설이려니 하고 말았다. 망우리 역사문화공원을 동행했던 작가 김영식은 그에 대해 의문을 제기했다. 설화의 중이적 표현이라면서 하나의 실화를 알려줬다. 중랑(中浪)은 고려말 조선초 문신 변중랑(卞仲良)에서 나온 것이라고 말했다. 그의 설명은 이렇다.

변중랑은 이성계의 이복형인 이원계의 사위였다. 이방원이 정몽주의 살해 의도를 알아차리고 이를 정몽주에게 알렸던 사람이다. 이를 못마땅하게 여겼던 이방원은 제1차 왕자의 난 때 세자 방석의 편을 든 변중랑을 참사했다. 변중랑의 동생 계량은 형의 시신을 안고 건넜던 나누터를 형의 이름의 에서 변을 빼고 중랑포(中浪浦)라고 불렀다. 설화는 바로 억울하게 죽임을 당한 변중랑의 얘기를 꾸민 것이다.”

이런 주장은 변계량의 후손인 변희룡 교수(부경대)가 주장했고 김 작가는 이를 설화보다 더 믿는다고 말했다.

중랑천과 왕자의 난, 그 숨겨진 역사적 비극

월릉교가 보이는 중랑천.(사진=위성지 여행작가)
월릉교가 보이는 중랑천.(사진=위성지 여행작가)

정상에 다시 섰다. 태극기가 봄바람에 춤추고 있다. 거대한 표지석이 서 있다. 무게감이 느껴질 정도로 육중하다. 전면에는 용마봉’, 뒷면에는 한자로 고구려의 기상이라고 씌어 있다. ‘고구려의 기상은 용마산에 산재한 고구려 유적, ‘보루의 현장임을 알려준다. 고구려 보루는 실물이 남아 있는 아차산에서 이야기를 이어갈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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