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요서울ㅣ김준석 언론인] 여권의 핵심 축이었던 86세대(60년대 출생·80년대 학번)의 분화가 가시화되고 있다. 20대 대선 패배 이후 사실상 각자도생에 나선 셈이다. “미련없이 정치를 그만두겠다며 자발적인 정계은퇴를 선택하는 인사들이 있는가 하면 무리한 선거출마로 전방위적인 퇴진 압박에 시달리는 인사도 있다. 86세대는 한국 정치사의 역사적인 상징이다. 전두환 군사독재를 무너뜨리고 민주화를 주도한 역사의 주역이라는 훈장이 있다. 다만 최근에는 내로남불(내가 하면 로맨스, 남이 하면 불륜)에 물든 기득권 주류세력이라는 오명에도 시달린다. 특히 대선 과정 중 송영길 전 더불어민주당 대표가 차기 총선 불출마를 선언하면서 쏘아올렸던 이른바 ‘86세대 용퇴론도 수면 위로 떠오르고 있다. MZ세대의 정치적 부상을 지원사격하면서 86세대는 이제 어느 정도 역사의 뒤안길로 물러나야 한다는 취지였다. 다만 최근 정치적 상황은 혼란 그 자체다. 86세대의 단순한 정치적 분화가 아니라 동지에서 적으로변모하는 민낯까지 보여주면서 무질서한 후퇴를 이어가고 있다. 2000년대 이후 민주당 계열 정당의 핵심 주도세력을 형성해왔던 86세대들의 분화를 자세히 들여다봤다.

송영길 전 대표와 오세훈 전 시장, 뉴시스
송영길 전 대표와 오세훈 전 시장, 뉴시스

86세대 용퇴론 선도했던 송영길 전 대표 서울시장 출마강행 논란
- 연세대 총학생회장 우상호·서울대 총학생회장 김민석, 송영길 비판
- 대선 승부처 MZ세대 정치적 부상 본격화에 세대교체 물갈이 가속

대선 패배 이후 윤석열정부의 등장을 앞두고 86세대가 선택한 길은 제각각이다. 김영춘 전 해양수산부 장관과 최재성 전 청와대 정무수석은 오랜 고민을 거쳐 미련없이 정계은퇴를 선언했다. 이들의 용기있는 선택에 아쉬움과 더불어 박수갈채가 쏟아졌다. 가장 논란이 되는 주인공은 6.1지방선거에서 서울시장 출마를 선언한 송영길 전 민주당 대표다. 대선 패배로 86세대의 2선 후퇴가 불가피한 상황에서 대안부재를 이유로 출마하는 것은 후안무치하다는 논리다. 실제 서울대 총학생회장 출신의 김민석 민주당 의원과 연세대 총학생회장 출신의 우상호 의원은 운동권 동지이지만 송 전 대표의 출마를 강력 비판했다. 특히 송 전 대표의 서울시장 출마를 놓고 당 안팎에서 크고작은 설전이 이어지면서 양측은 돌아올 수 없는 다리를 건넜다는 평가마저 나온다. 수십 여년에 이르는 기간 동안 크고작은 정치적 고비를 함께 헤쳐왔던 운동권 동지들이 사실상 결별 수순에 접어든 셈이다.

정계은퇴김영춘, 부산시장 불출마·‘호위무사최재성

민주당의 대선 패배 이후 당 핵심 주류였던 86세대는 속속 정계은퇴를 선언했다. 이를 선도한 인사는 김영춘 전 해양수산부 장관과 최재성 전 청와대 정무수석이다. 김 전 장관은 고려대 총학생회장 출신으로 김영삼 전 대통령의 비서로 정계에 입문했다. 서울 광진갑 재선을 거친 뒤 고향인 부산으로 내려가 지역주의 타파를 외치며 3선에 성공했다. 지난해 4월 부산시장 보궐선거에 도전했다가 낙선했다. 최 전 수석은 동국대 총학생회장 출신으로 200417대 총선에서 원내 입성한 뒤 내리 4선을 거쳤다. 문 대통령이 새정치민주연합 대표 시절 당 사무총장을 지냈고 청와대 정무수석으로 활약했다.

김영춘 전 장관은 6월 지방선거에서 유력한 부산시장 후보였다는 점에서, 문재인 대통령의 호위무사로 불렸던 최재성 전 수석 역시 유력한 경기지사 후보였다는 점에서 당 안팎의 파장은 컸다. 지방선거 출마보다는 대선 패배를 반성한다는 차원에서 86세대 용퇴론의 물꼬를 쏘아올린 것이다.

김 전 장관은 지난달 21일 페이스북에 올린 글을 통해 정계은퇴를 전격 선언했다. 김 전 장관은 근본적으로 저의 정치적 역할에 대한 고뇌 때문에 이번 부산시장 선거에 출마하지 않겠다저는 이제 정치인의 생활을 청산하고 국민 속으로 돌아가려 한다고 밝혔다. 특히 이제 민주주의, 통일, 기득권 타파 등 거대 담론의 시대가 아니라 생활 정치의 시대가 됐다. 국민에게 더 중요한 것은 먹고사는 문제의 해결이고 일상의 행복이라며 저를 정치에 뛰어들게 했던 거대 담론의 시대가 저물고 생활 정치의 시대가 왔다면 저는 거기에 적합한 정치인인가를 자문자답해봤다. 선거만 있으면 출마하는 직업적 정치인의 길을 더는 걷고 싶지는 않다고 말했다.

김 전 장관에 이어 최 전 수석 또한 정계은퇴를 선언했다. 최 전 수석은 지난 6일 페이스북에 올린 글에서 저는 오늘부로 정치를 그만둔다. 문재인 대통령과 함께했던 시련과 영광의 시간과 함께 퇴장한다고 말했다. 이어 첫 출마를 하던 20년 전의 마음을 돌이켜봤다. 제 소명이 욕심이 될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지금까지 무겁게 걸머지고 온 저의 소명을 이제 내려놓기로 했다. 단언하건대 저는 이제 정치인이 아니다. 정치는 그만두지만, 세상을 이롭게 하는 작은 일이라도 있다면 찾겠다고 덧붙였다.

서울시장 출마 강행내로남불·후안무치비판 봇물

우상호 의원, 뉴시스
우상호 의원, 뉴시스

김 전 장관과 최 전 수석이라는 중량급 정치인들의 정계은퇴 선언에도 86세대 용퇴론은 사실상 원점으로 되돌아갔다. 86세대의 정계은퇴와 세대교체 흐름은 여전히 탄력을 받지 못하고 있다. 이는 송영길 전 대표의 서울시장 출마를 둘러싼 당 안팎의 논란 탓이다. 서울시장 선거 대안부재론과 인물난 탓에 송 전 대표가 유력 후보로 부상했지만 대선 패배에 적잖은 책임이 있는 송 전 대표의 지방선거 출마가 정치도의적으로 과연 합당하느냐는 것이다. 김남국 의원을 비롯해 이재명 상임고문의 측근 그룹들이 송 전 대표의 출마를 지원사격하고 있지만 내로남불, 후안무치 등 격한 비판이 더 많은 상황이다. ‘작은 이익을 탐하다 큰 것을 잃는다는 소탐대실(小貪大失)을 차용해 송탐대실이라는 신조어마저 등장했다.

송 전 대표는 지난 1일 페이스북을 통해 서울시장 출마를 공식화했다. 송 전 대표는 주소를 서울 송파구로 옮겼다이제 누가 서울에서 승리할 수 있을지 당과 당원과 지지자들께서 판단하는 시간이 될 것이다. 오직 지방선거의 승리를 위해 당원으로서 직책과 직분을 가리지 않고 헌신하겠다고 밝혔다. 이어 본인의 출마를 둘러싼 당 안팎의 비판에는 이낙연 전 총리나 임종석 전 의원, 박주민 의원, 박영선 전 장관 등 좋은 분들이 잘해서 경쟁력이 있다면 굳이 내가 거론될 필요는 없을 것이라며 출마 의지를 강조했다. 민주당 소속 서울시의원 40여명도 기자회견을 통해 서울시민은 폭주하는 중앙권력을 강력하게 견제할 후보를 원하고 있다며 송 전 대표의 선거출마를 공식 요청했다.

송 전 대표의 출마선언으로 민주당은 순식간에 내홍에 휩싸였다. 대선 과정에서 86세대 용퇴론은 내걸고 차기 총선 불출마를 선언한 마당에 서울시장 출마 자체가 어불성설이라는 비판이다. 앞서 송 전 대표는 지난 1“586 세대가 기득권이 됐다는 당내외 비판의 목소리가 있다. 선배가 된 우리는 이제 다시 광야로 나설 때라며 총선 불출마를 선언한 바 있다.

송 전 대표의 고집에 운동권 동지들이 공개 저격에 나섰다. 김민석 의원은 지난 4일 예정에 없던 기자회견을 자청해 대선 책임을 지고 대표직을 사퇴한 지 얼마 안 돼 큰 선거의 후보를 자임한 데 대한 대국민 사과가 필요하다고 직격탄을 날렸다. 특히 하산 신호를 내린 기수가 갑자기 나 홀로 등산을 선언하는 데에서 생기는 당과 국민의 혼선을 정리해줄 의무가 있다고 지적했다. 연세대 81학번 동기로 송 전 대표와 40년 지기인 우상호 의원도 비판에 가세했다. 우 의원은 대선 패배한 지 20일도 안 됐는데 책임지고 물러난 사람들의 측근들이 송영길밖에 없다고 주장하는 건 성급했다선거에서 패배한 지도부를 바로 다음 선거에서 전략공천한 경우는 없었다고 비판했다. 이어 정치라는 것은 한 번 뱉어놓은 말은 지킬 줄 아는 그런 정치 윤리를 계속 가지고 가야 한다고 꼬집었다.

이러한 지적은 송 전 대표의 86세대 용퇴론에 호응해 우상호 의원, 김영춘 전 장관, 최재성 전 수석 등이 총선 불출마 또는 정계은퇴를 선언한 마당에 정작 송 전 대표가 서울시장 출마에 나서면서 당 전체에 엄청난 부담이라는 것이다. 송영길 불가론이 확산되는 가운데 박지현 공동비상대책위원장도 논쟁에 가세했다. 박 위원장은 8일 비대위 회의에서 대선 패배에 책임을 지겠다며 물러난 당 대표도 마찬가지로 (지방선거 예비후보로) 등록했다과연 민주당에서 반성과 쇄신은 가능한 것인지 깊은 고민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고 비판했다.

386 젋은피 정치권수혈기득권세력 비판 각자도생

정계은퇴 선언한 김영춘 전 의원, 뉴시스
정계은퇴 선언한 김영춘 전 의원, 뉴시스

86세대는 과거 90년대 중후반 김대중 전 대통령의 젊은피 수혈론을 통해 정계에 입문했다. 특히 참여정부 시절인 200417대 총선에서 열린우리당이 과반 승리를 거두면서 86세대의 정계입문이 집단적이고 조직적으로 이뤄졌다. 이 때문에 ‘386(30·80년대 학번·60년대 출생)’이라는 표현은 운동권 출신의 젊은 정치인을 가리키는 유행어가 됐다. 문제는 세월이 흐르면서 386세대가 486세대를 거쳐 586세대가 되면서 우리 사회의 완전한 주류 기득권 세력이 됐다는 점이다. 정치입문 초기의 순수한 이상과 개혁 열정은 온데 간데 없이 여의도 주변에서 흔하게 찾아볼 수 있는 보통의 정치인과 크게 다를 바 없는 부류가 됐다.

세대교체 흐름과 대선패배의 여파로 86세대는 이제 바람 앞에 촛불신세가 됐다. 여의도 정치권 주변에서는 86세대 정치인들이 향후 정치행보를 놓고 깊은 고심에 빠져있다는 이야기들이 꼬리에 꼬리를 문다. 특히 김 전 장관과 최 전 수석의 정계은퇴 선언 탓에 수많은 86세대 정치인들이 2선 후퇴 압박도 느낀다는 후문이다. 86세대가 기득권을 포기해야 MZ세대를 비롯한 후배 정치인들이 활동 공간이 열리고 민주당 또한 대선패배에서 벗어나 새로운 좌표를 찾을 수 있기 때문이다.

여야 사정에 정통한 한 정치권 관계자는 40대 기수론을 예로 들며 정치권 세대교체는 늘 진통이 뒤따른다고 지적했다. 71년 대선을 앞두고 김영삼·김대중 전 대통령이 기존 신민당 지도부를 비판하면서 40대기수론을 내걸었을 때 격노한 당 지도부는 구상유취(口尙乳臭)’라며 비판한 적도 있다. 이어 “4년 전 지방선거에서 압승을 거뒀던 민주당이 대선 패배에 이어 6.1지방선거에서마저 참패한다면 86세대 용퇴론은 앞으로 거스르기 힘든 물결이 될 것이라면서 이 과정에서 86세대 정치인들의 급속한 분화가 이뤄지면서 동지에서 적으로 얼굴을 맞이하는 생소한 현상들이 나타날 수도 있을 것이라고 진단했다.

아울러 송영길 전 대표의 서울시장 출마에는 이심(李心)’, 이른바 이재명 상임고문의 의중이 반영돼 있을 것이라는 관측이 나온다민주당이 서울시장 공천문제를 어떻게 정리하느냐에 따라서 이재명 상임고문의 재등판 시기도 연동될 수밖에 없을 것이라고 내다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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