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마산과 아차산은 능선이 이어져 있다. 경계가 없다. ‘아차산 4보루를 알리는 푯말을 보고서야 아차산으로 접어들었음을 알았다. 종종걸음으로 고구려 역사의 현장으로 다가갔다. 벅차오르던 가슴이 뛰기 시작했다.
 

고구려정에서 본 서울시내 전경. (사진=위성지 여행작가)
고구려정에서 본 서울시내 전경. (사진=위성지 여행작가)

17개보루 475년 장수왕이후 551년 신라와 백제까지 건재
- 아차산 4보루는 남한에서 발견된 첫 고구려 보루


[본문]아차산 4보루는 남한에서 발견된 첫 고구려 보루다. 또 복원된 유일한 아차산 보루다. 아차산 일대의 17개 보루는 475년 장수왕이 한강 유역에 진출한 후 551년 신라와 백제에 의해 물러날 때까지 사용했다.

보루의 성벽을 둘러보았다. 둘레가 249m. 보루의 성벽은 성인 두 키가 넘을 듯하다. 방향에 따라 성벽 축조방식이 다른 게 특이하다. 어떤 면은 화강암으로 가지런하게 축대를 쌓았다. 다른 면은 돌의 크기도 고르지 않았다. 마치 흙 속에 돌이 박혀 있는 듯했다. 그렇게 만든 이유가 성벽 축조 시기가 다른 때문일 거다. 어떻든 2000년 복원 공사 당시 본래의 성벽 모습대로 축성했다고 한다.

고구려 성벽에서만 볼 수 있는 ()’

아차산 4보루 성벽과 건물지. (사진=위성지 여행작가)
아차산 4보루 성벽과 건물지. (사진=위성지 여행작가)

성벽을 둘러보면서 감격과 흥분은 더욱 격해졌다. 고구려 성벽의 전형적 형태인 ()’를 눈으로 확인했기 때문이다. 치는 성벽 일부를 톱니처럼 튀어나오게 쌓은 구간을 말한다. 침투하는 적군의 감시에 유리한 입지를 마련하기 위한 설계이다. 접근한 적군을 양면에서 공격할 수 있게 디자인된 축성법이다. 이는 고구려 성벽에서만 볼 수 있는 독특한 형태이다. 고구려인의 지혜를 엿볼 수 있다. 아차산 4보루는 5개 치가 있다. 이들 모두 각진 형태를 이루고 있다. 이 같은 획기적 성곽 구조는 고구려의 대표적 산성인 요녕성, 안시성, 오녀산성, 대성산성 등에도 이와 똑같은 구조물을 만들었다.

성벽 위에 올랐다. 광장이다. 어림잡아 축구장 하나는 될 만큼 컸다. 건물지는 잔디로 덮여 있다. 고구려 병사의 생활터로 각종 주거시설과 편의시설이 있던 자리다. 학계는 여기에 적게는 10, 많게는 100명 정도가 생활했을 것으로 추정한다. 아차산 자락에 있는 고구려 철기문화 유적 테마공원인 고구려대장간마을에는 아차산 4보루를 재현한 전시실을 마련해 뒀다. 또 아차산 보루에서 나온 유물을 전시하고 있다.
 

아차산 보루에서 출토된 유물. (사진=위성지 여행작가)
아차산 보루에서 출토된 유물. (사진=위성지 여행작가)

가장 주목받는 유물은 온돌, 대장간, 등자 등이다. 온돌은 세계에서 가장 뛰어난 난방 시스템이다. 실내공간 전체가 돌로 깔려 있었다. 복사, 대류, 전도라는 열전달 방식을 몽땅 동원한 난방방식이다. 전 세계에서 우리 민족만이 이런 난방방식을 채택했다. 아차산 4보루에 온돌이 있다는 것은 온돌 역사가 고구려까지 올라간다는 사실을 알려준다.

간이대장간도 마찬가지다. 당시 대장간은 지금의 반도체 공장과도 비견되는 중요한 산업장이었다. 산성에서 간이대장간과 철제 농기구(쇠스랑, 풀무, 모루)와 무기(, 화살촉)가 발견된 것은 고구려가 철기를 얼마나 잘 다루는 나라였는지를 알 수 있다. ‘고구려대장간마을에 간이대장간이 재연되어 있다. 아차산 보루에서 발굴된 수많은 철제 도구가 전시되어 있다. 발굴된 철제 제품 중 가장 눈길을 끈 유물은 등자다. 말을 탈 때 발을 딛는 등자가 고구려가 활의 민족(東夷族)’임은 간접적으로 입증한다.

북방계열 유목민, 기마 민족의 특성 보여줘

우리 민족은 기본적으로 유목 생활하던 북방계열 민족이다. 유목 생활을 끝내고 한반도에 정착했다. 공동체 조직을 형성하고 국가 질서를 만들었다. 종족분류의 기본이 되는 언어와 문화에서 압도적으로 북방 기마민족의 특성을 보인다.

고구려 무용총 수렵도는 그 증거다. 역사 교과서에 나오는 이 벽화의 주인공을 누구나 기억할 거다. 주인공은 달리는 말 위에서 몸을 돌린 채 활시위를 당기는 역동적인 모습을 하고 있다. 이런 자세를 파르티안 샷(背斜騎馬法)’이라고 한다. 말을 탄 기수가 뒤로 돌아 추격해 오는 적에게 활을 쏘는 기술이다.

복원되지 않은 아차산 2보루. ​ (사진=위성지 여행작가)
복원되지 않은 아차산 2보루. ​ (사진=위성지 여행작가)

이는 페르시아의 원조인 파르티아, 로마의 천적인 흉노, 시베리아 대평원을 지배했던 스키타이, 중국과 유럽 대륙에 걸친 대제국을 형성했던 몽골, 헝거리 민족의 원류인 마자르 등만이 사용한 고급 기술이다. 이런 기술의 원천은 무용총 수렵도에서 확인할 수 있는 등자에 있다. 만일 기수가 발을 디디고 균형을 잡는 데 도움을 주는 등자가 없다면 이 같은 고난도 기술을 구사할 수 없다.

건물지에 올라 본 서울 경관은 장관이다. 도도하게 흐르는 한강을 따라 파노라마처럼 펼쳐지는 서울 경치를 볼 수 있다. 사방이 탁 틔어있다. 막히거나 거치적거리는 게 없다. 아차산이 서울 야경의 최고전망대라는 말이 허언이 아닌 듯하다. 어둠 속의 매력은 날이 밝아지면서 사라진다고 했던가.

아차산 능선에서 본 서울의 대낮 풍경은 그렇지 않다. 아름다운 풍광은 아차산 4보루에서 아차산 3보루아차산 5보루아차산 1보루해맞이광장을 거쳐 능선의 끝자락에 자리한 고구려정(고구려 양식의 정자)까지 이어졌다. 이 길을 전망이 좋은 숲길이라고 한다. 멀리서 본 서울은 수직 도시였다. 고층 아파트가 마천루를 이루고 있다. 마치 아파트 병풍으로 한강을 쌓은 듯했다. 한강 천변의 스카이라인은 수평선이 되어 있다.

전망이 좋은 숲길1500년 전에 삼국의 치열한 전선(戰線)이었다. ‘전선을 걸으며 백제 개로왕의 처형과 고구려 온달 장군의 전사를 떠올린다. 이 두 사건은 역사의 교차점(백제고구려, 고구려신라)이다. 삼국시대의 한강의 역사에서 대한민국의 한강의 기적을 생각한다. 오늘날의 한강이 투영된 게 먼 옛날 삼국시대의 한강일지도 모른다. 삼국시대나 오늘날이나 한강은 도전과 발전의 상징이라는 얘기다.

전망이 좋은 숲길에서 본 서울과 숲길에 있는 아차산 보류분포도. (사진=위성지 여행작가)
전망이 좋은 숲길에서 본 서울과 숲길에 있는 아차산 보류분포도. (사진=위성지 여행작가)

아차산 3보루 430m 공간, 5보루 경관조망 탁월

아차산 4보루 이외의 고구려 보루는 복원이 되어 있지 않다. 그저 보루의 흔적을 확인할 수 있을 뿐이다. 아차산 3보루는 보루 중 면적이 제일 넓다. 둘레가 420m. 아차산 5보루는 경관 조망이 가장 좋은 보루로 통한다. 아차산 5보루에서 아차산 1보루가 보일 정도로 가까이 있다. 아차산 1보루는 고구려대장간마을에서 낙타고개를 지난 첫 번째로 만나는 성곽이다. 아차산성과 풍납토성, 몽촌토성 자리를 한눈에 볼 수 있다. 독자는 왜 1보루 다음에 5보루냐고 물을지 모른다. 고구려 보루가 발견될 당시 한강에 가까운 순서대로 일련번호를 붙였다. 5보루 다음부터는 발견된 순서대로 순번을 붙이고 있다.

아차산 2보루는 전망이 좋은 숲길에서 떨어져 있다. 능선 밖에 있다. 범굴사 절벽 위에 있다. 범굴사는 문무왕 때 의상대사가 자리 잡은 사찰이다. 범굴사에는 인간의 욕심을 꾸짖은 쌀바위가 있다. 의상대사가 참선하던 자리에 위쪽 암벽에 구멍이 있다. 이곳에서 필요한 만큼 쌀이 나왔다. 더 많은 쌀을 얻길 원하는 누군가 더 큰 구멍을 옆에 뚫었다. 그러자 검은쌀과 뜬 물이 나왔다. 그리고 더 이상 쌀이 나오지 않았다. 쌀바위 전설이다.

고구려성 오른편으로 약 200m 가면 아차산성이 나온다. 외롭게 홀로 서 있는 산성이다. 이유가 있다. 아차산성의 주인은 고구려가 아니라 백제다. 백제가 고구려의 남진을 대비하기 위해서 광주(廣州)에 도읍을 두었을 때 쌓았다. 고구려의 보루가 산 능선을 따라 만들어졌다. 반면 아차산성의 홀로 서 있다. 성벽도 봉우리 꼭대기에서 경사면을 따라 내려와 산허리를 둘러쌓고 있는 게 특징이다. 물론 한강을 향하고 있다. 현재 동쪽·서쪽·남쪽에 각각 문과 수구(水口) 터만 남아 있다. 성안에 작은 계곡을 아우르고 있을 정도로 규모가 크다.

범굴사 암벽의 쌀 바위 인간의 욕심을 경계하는 전설이 담긴 바위. (사진=위성지 여행작가)
범굴사 암벽의 쌀 바위 인간의 욕심을 경계하는 전설이 담긴 바위. (사진=위성지 여행작가)

개로왕, 온달장군 죽음을 맞은 아차산성

필자가 이곳을 찾았을 때 보수공사 중이었다. 먼발치에서 성벽 한 면만 볼 수 있었다. 성벽은 약 1정도라고 한다. 아차산성은 한강을 사이에 두고 남쪽 맞은편에 있는 서울풍납동토성과 함께 가장 중시된 성곽이었다. 개로왕과 온달 장군이 죽음을 맞은 곳이 바로 아차산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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