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에 두 개의 조선시대 공동묘지가 있다. ‘궁녀의 무덤이 있는 이말산(은평구)내시의 묘가 있는 초안산이다. 이번 주 탐방로는 초안산이다. 초안산은 노원구 상계동과 월계동, 도봉구 창동에 걸쳐 있는 나지막한 산이다. 높이가 해발 114.1m.

조선 숙종 내시 승극철 부부의 묘. (사진=위성지 여행작가)
조선 숙종 내시 승극철 부부의 묘. (사진=위성지 여행작가)

-내시네산별칭 국내 가장 오래된 내시의 묘, 승극철 부부
- 최초의 개량한옥 설계자 박길용 조선 1호 건축사 화신백화점도

초안산은 별명이 있다. ‘내시네산이다. 내시의 분묘가 상대적으로 많아서 붙여진 이름이다. 특히 가장 오래된 내시의 묘가 이곳에 있다. 승극철 부부의 묘가 그것이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초안산을 내시네산이라고 명명하는 것은 부당하다.

우선 분묘가 매우 다양하다. 사대분 분묘, 민묘(중인과 서민 무덤), 내시와 궁녀 무덤 등 1154 기가 혼재해 있다. 산 전체에 흩어져 있는 향로석(210), 문인석와 동자석(169), 묘비(182), 상석(123), 망주석(58), 장명등(1) 등 수백여 기의 석물이 이를 입증한다. 석물은 시기에 따라 형태도 다르고 죽은 이의 신분에 따라 모양이 다르다.

어떻든 이들 석물과 무덤은 조선시대의 장례 풍습과 매장 문화의 변천 과정과 석물 변천을 연구하는 데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다. 초안산 분묘군이 20023월 사적 제440호로 지정된 이유다.

'내시네산', 분묘군 사적 제4402002년 지정

초안산 등산로를 지키는 문인석이 곳곳에 있다. (사진=위성지 여행작가)
초안산 등산로를 지키는 문인석이 곳곳에 있다. (사진=위성지 여행작가)

왜 초안산에 공동묘지가 형성된 것일까. 조선시대엔 한양 도성으로부터 십 리 안에 묘를 쓸 수 없었다. 이를 성저십리(城底十里)라고 했다. 도성 십 리 밖에서 서쪽(궁궐)을 바라보는 산은 도봉산과 초안산뿐이다. 도봉산은 한성을 지키는 진산이다. 이곳에 산소를 쓸 수 없다. 자연스럽게 초안산이 묘터가 됐다. 거기다가 초안산은 명당이다. 양옆으로는 중랑천과 우이천이 초안산을 감싸고 있다. 이 때문에 초안산이 신분을 초월한 대단위 공동묘지가 된 것으로 보인다.

필자가 제일 먼저 찾은 곳은 초안산 아기소망길 초입에 있는 석물전시장이다. ‘아기소망길은 생전에 아기를 가질 수 없던 내시의 간절한 염원이 이뤄진다는 초안산의 전설을 담아 지은 산책로 이름이다. 전시장은 월계고등학교 앞 비석골근린공원에 있다. 초안산에 방치되어 있던 망주석, 문인석(금관조복, 북두공복), 동자석, 비석 등 30여 점이 필자를 맞았다. 옛 석물에서 죽은 이를 대하는 조선 사람의 마음을 읽는다. 망주석은 영혼이 자신의 육신()을 쉽게 찾도록 세운 표지석이다. 영혼이 길을 잃지 않도록 한 것인가. 횃불 모양을 하고 있다.

문인석은 능묘를 수호하는 석물이다. 그 크기와 형식도 달랐다. 크기가 죽은 이와 후손의 지위와 권세를 보여준다. 북두공복(관리의 평상복)을 입은 문인석도 있고 금관조복(잔치 때 입는 예복)도 있다. 금관조복의 문인석은 정조 이후에 세워진 것이다. 그런데 조선왕릉에서 보지 못한 석물이 있다. 동자상이다. 관모를 쓰지 않은 민머리에 손에는 뭔가를 들고 있는 어린이 석상이다. 동자상은 학문적 업적은 뛰어났지만 벼슬에 오르지 못한 선비 혹은 당하관(3품 이하의 관리) 이하의 관리 무덤에 세운 석물이다.

우리나라 최초 개량한옥 각심재(恪心齋)

각심재(사진=위성지 여행작가)
각심재(사진=위성지 여행작가)

초안산 기슭을 벗어나 1.5km를 걸었다. 우리나라 최초의 개량한옥인 각심재(恪心齋)를 찾아가는 길이다. 초안산 자락은 거대한 컴퍼스였다, 월계고등학교를 벗어나자 신창중학교가 나왔다. 다시 염광고등학교와 월계초등학교, 염광여자메디택고등학교 그리고 염광중학교가 잇달았다. 거기가 끝이 아니다. 아시아퍼시픽국제외국인학교 서울캠퍼스도 붙어 있다. 월계동은 한마디로 교육의 고장이다.

드디어 각심재를 만났다. 불행스럽게도 문이 닫혀 있다. 낯설었다. 전통가옥도 아니다. 현대식 개량한옥과도 달랐다. 한옥에는 볼 수 없는 현관이 보였다. 유리 창문도 있다. 지붕은 한옥 풍이고 창호는 일본 나가야(일본 저택) 풍이다. 겉모습은 일본풍의 한옥이라고 해야 맞을 듯하다. 어쩌면 그게 당연한지도 모른다. 각심재는 1930년대에 지어진 최초의 개량한옥이다. 설계자는 박길용 건축사다. 박길용은 1987년에 헐린 화신백화점을 설계했던 조선인 1호 건축사다. 어떻든 전통 한옥의 고풍스러운 멋을 살린 채 생활의 편의성을 제고했다는 점에서 건축가 박길용의 실험정신은 평가할만하다.

각심재는 원래 종로구 경운동에 있었다. 1994년에 초안산 기슭으로 옮긴 것이다. 여기서 한옥의 위대성은 다시 한번 확인된다. 한옥은 완전한 조립식 건물이다. 해체와 조립이 가능하다. 하지만 터를 중시했던 우리 조상이 집을 옮기는 일은 없었다. 일본인에 의해 한옥을 철거한 뒤 복구한 일이 있다. 경복궁 자선당(동궁)이 그것이다. 1914년 당시 일본 최대의 부자였던 오쿠라 기하치로가 자신의 집으로 가져갔다. 자선당을 문화재 수장고로 개조했다. 각심재 안에는 조선시대 청백리였던 정간공 이명 묘역과 신도비(神道碑)가 있다.

청백 아파트 뒤편에서 본격적인 산행을 시작했다. 승극철 부부의 묘를 찾아야 했다. 초안산의 최고 유적이다. 이정표도 없었다. 물어물어 찾았다. 녹천정을 배경으로 산 아래를 내려다보고 있다. 묘지는 잡초로 덮여있다. 상석에는 자그마한 꽃이 핀 화분이 놓여 있다. 묘지 둘레에는 나무 펜스가 둘러있다. 비교적 관리가 잘 되고 있다는 인상을 받았다.

1930년대 지어진 한국 개량한옥인 월계동 각심재. (사진=위성지 여행작가)
1930년대 지어진 한국 개량한옥인 월계동 각심재. (사진=위성지 여행작가)

승극철은 숙종 때 활약한 내시였다. 조부인 김계한과 함께 자리하고 있었다. 선조 때 호성공신이었던 조부는 양주 효촌리로 이장했다. 묘비에는 통훈대부 행내시부 상세 승공극철 양위지묘라 쓰여 있다. 통훈대부는 종3품이고, 상세는 궁중의 그릇을 담당하는 자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양위는 승극철과 그의 부인을 함께 모셨다는 뜻이다. 부부애를 엿볼 수 있다.

승극천 묘소 위에 녹천정이 있다. 녹천(鹿川)의 전설을 기리기 위해 최근에 만든 정자다. 조선 중기 때 큰 홍수로 인해 하천이 넘쳐 마을 전체가 폐허가 됐다. 한 사람의 꿈속에서 준 신선의 암시대로 사슴에게 마을 처녀를 시집보냈다. 곧 마을을 덮은 물이 빠졌다. 그 냇물을 처녀의 눈물이라고 녹천이라고 했다. 이날 이후 마을이 번성하기 시작했다. 오늘날 녹천역 부근의 옛이야기다.

사슴에게 시집간 마을 처녀 기린 녹천정

아기소망길 안내도(사진=위성지 여행작가)
아기소망길 안내도(사진=위성지 여행작가)

산은 우거졌다. 숲속은 탐방객을 거부했다. 1000기가 넘는 무덤과 유물 중에서 눈으로 확인할 수 있는 것은 50개도 되지 않았다. 아기소망길을 따라 오르면서 길목을 지키던 문인석 정도가 인상적일 뿐이었다. 그런데 잣나무힐링숲에 다다르자 상황은 달라졌다. 곧은 절개를 상징하는 잣나무는 하늘을 찌른다. 대신 나무 기둥 사이 사이에 조선시대의 흔적이 드러났다. 고대 유적처럼 다양한 석물이 산재해 있다.

이곳에 세워진 안내판에는 상궁 개성 박씨의 묘의 위치가 표시되어 있다. 반드시 세워진 비석을 샅샅이 뒤졌다. 하지만 찾지 못했다. 무거워진 다리를 이끌고 등산로를 따라 걸었다. 어디쯤 왔을까. 안내판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안골치성제와 초안산 문화제라는 설명이 있었다. 숲에 반쯤 묻혀 비스듬히 누운 비석 사진에 상궁개성박씨묘표라고 적혀 있었다. 비록 쓰러진 비석이지만 무덤의 주인공을 알려주는 3기의 궁녀 묘비 중 하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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