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기념관 앞에서 대각선으로 멀리 국방부 본관을 바라보며 1인 시위를 하고 있는 김지묵 씨. [이창환 기자]
전쟁기념관 앞에서 대각선으로 멀리 국방부 본관을 바라보며 1인 시위를 하고 있는 김지묵 씨. [이창환 기자]

[일요서울 | 이창환 기자] ‘비가 오나 눈이 오나’ 국방부 용산 청사 앞에서 “국방부 장관은 6.25 참전 사실 인정하라”라며 혈혈단신 ‘1인 시위’를 해오던 김지묵 씨가 쫓겨났다. 2015년부터 이어온 시위지만 지난 5월10일 대통령 집무실이 청와대가 아닌 용산 청사로 이전한 뒤 경호 업무 등으로 인근에서 시위를 할 수 없게 된 것. 전쟁기념관으로 장소를 옮겨 시위 중인 그를 찾았다. 그런 그에게서 그간 수차례 참전 사실 인정 요청 민원을 기각 또는 각하하면서도 국방부가 그의 도움을 받았던 일이 있음을 확인했다. 국방부의 이중 잣대를 비판하면서도 김 씨는 여전히 참전 사실을 인정해달라는 시위를 이어가고 있다. 그러던 중 한 보훈단체를 통해 김 씨를 찾아온 국방부 관계자가 있었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국방부 관계자는 왜 그를 찾아왔던 걸까.

국방부의 이상한 행각, 전사자 유해 발굴 도움 받고…‘참전’ 사실은 부정
“1951년, 중학교 1학년 대신 5816 유격대에서 북한군 정찰 연락병 되다”

김지묵(84세) 씨는 중학교 1학년으로 올라갈 예정이던 1951년 3월, 중학교가 아닌 유격대에 들어갔다. 그때는 한국전쟁이 중반으로 치닫고 있던 중으로, 주변 여건을 잘 알고 있던 김 씨는 국군에게 도움이 될 수 있었다. 그는 북한군의 장소 파악이나 동태를 살펴 전달하는 연락병 임무를 맡았다. 퇴로를 차단당해 강화에 남겨진 부대의 주요 정보 전달책 역할도 했다.

앞서 백선엽 장군이 사단장으로 있던 육군 제1사단 정보처에서는 강화도 및 교동도에는 중공군 개입 이후 반공 청년 및 탈북 청년 중심으로 향토방위와 치안유지 방위대가 결성된 것을 파악하고 1951년 2월28일 이들을 포함시켜 육군 제 5816부대 직속 유격대를 조직했다. 처음 1사단 소속이었으나, 전쟁 후반 연합군 업무로 편성돼 미군 소속의 8240부대로 바뀌었다. 

고향이 개풍인 김 씨는 강화도로 피신해 지역 방위대 조직에 앞장선 아버지 뜻을 따라 연락병 역할을 수행키로 했고, 3월부터 중학교 대신 5816 유격부대 연락병이 됐다. 김 씨에 따르면 임무가 위험해 아버지가 김 씨를 빼내고자 했으나, 국군에게는 지역 여건을 잘 알고 있는 어린 김 씨가 유용했다. 혹 들키더라도 북한군의 의심을 적게 받을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김 씨가 소속됐던 것으로 추정되는 5816 부대가 1951년 2월28일 창설됐다고 기재돼 있다. 강화보훈회관 내 독립유격대동지회 사무실에 전시된 당시 유격대 부대의 활동 내용. [이창환 기자]
김 씨가 소속됐던 것으로 추정되는 5816 부대가 1951년 2월28일 창설됐다고 기재돼 있다. 강화보훈회관 내 독립유격대동지회 사무실에 전시된 당시 유격대 부대의 활동 내용. [이창환 기자]

김 씨에게만 부정된 6.25 참전용사 인증

이런 김 씨가 참전용사로 인정을 받고자 했던 것은 2012년이다. 참전 이후 평생을 난청으로 고생했던 김 씨는 TV를 통해 참전용사에게 보훈 혜택이 있음을 접하고, 처음으로 자신의 한국전쟁 참전 사실 확인에 나섰다. 무척 쉬운 일이었다. 참전 용사들이 해당 사실을 증명하고 이를 인증 받는 것은 흔한 일이기도 했고 김 씨로서는 당연한 사실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여러 사유로 그의 사실 증명은 지연됐다. 2012년 8월 보훈처를 찾았을 때 보훈처는 “국방부로부터 참전 확인을 받아오라”고 했고, 국방부는 “증명할 근거를 가져오라”고 했다. 사실 증명에 도움 줄 사람이라고 소개받은 1951년 귀순해 유격대에 들어왔던 임 모씨는 서류 작업에만 3년이 걸렸고, 우여곡절 끝에 제출했으나, 국방부는 이를 기각했다. 재심을 앞두고 임 모씨가 병환으로 김 씨를 도울 수 없게 됐다.

수소문 끝에 강화보훈회관에 소재한 강화독립부대유격군동지회(유격대동지회) 문을 두드렸고, 박주만 사무국장을 만나 현장 답사까지 마치고 인우보증에 나섰다. 이를 토대로 김 씨는 참전사실 인정을 위한 민원을 다시 진행했으나, 국방부는 또 불가 판정을 내렸다. 당시 소속 부대 창설 일자를 다르게 서술한 다른 증언자의 말을 토대로 김 씨의 주장이 인정받지 못했다. 박 국장과 김 씨는 재차 국방부와 보훈처에 민원을 제기했지만 국방부는 박 국장에게 “김 씨의 일로 더 이상 이의제기하지 말라”고 당부했다. 

국방부는 김 씨의 민원에 대해 이미 두 차례 미확인 된 사안으로 동일 건으로 신청됐다는 이유로 기각 결정을 통보했다. [이창환 기자]
국방부는 김 씨의 민원에 대해 이미 두 차례 미확인 된 사안으로 동일 건으로 신청됐다는 이유로 기각 결정을 통보했다. [이창환 기자]

국방부, “김 씨 안타까워” 훈령 상, 재심 신청 불가

박 국장은 “잘잘못을 따지는 일이라면 시비 판단을 위한 소송이나 이의제기에 한계가 있지만, 참전 용사의 사실 인증 여부는 입증하는 과정에서 부족한 증거를 채워나가면서 인증 받는 것이 당연하다”는 입장. 그에 대해 국방부는 “민원으로 진행할 수 있는 것은 더 이상 불가하니, 불복하면 행정소송을 제기하라”는 말만 남겼다는 것. 

일요서울은 김 씨 상황과 처우에 대한 국방부의 입장을 물었다. 국방부는 “김 씨 사연 안타깝고, 도움 줄 수 있는 방법이 있다면 드리겠으나 현재로는 불가하다”라며 “다만 관련 법규나 (훈령 등을) 토대로 김 씨의 경우는 국방부에서 다시 심사하는 것도 어렵다”고 답변했다. 훈령에 따라 두 번이나 기각된 동일 사안에 대한 민원제기는 불가했다. 이에 행정 소송만 가능하다는 의미로 보인다. 

앞서 국방부가 김 씨에게 행정 소송을 언급했지만 이는 말처럼 쉽지가 않다. 준비 과정이나 시간과 노력도 그렇지만 결론이 나기까지 정부나 행정기관을 상대하는 일이 일반인에게는 무척 힘들다. 박 국장은 취재진에게 “국가유공자 인정을 받기위해 행정 소송을 진행했던 분이 있었다”라며 “우리가 적극 도왔는데도 최종 승소까지 무려 7년이 넘는 시간이 걸렸다”라고 말했다.

국가유공자 및 참전 사실을 인증받고자 하는 이들이 대부분 80대가 넘은 사실을 고려할 때 이들에게 행정소송의 긴 싸움은 몸도 마음도 쉽게 허락하지 않는다. 이런 가운데 김 씨에게 국방부가 참전 사실을 충분히 유추할 수 있었을 법한 이야기를 들었다.

다시 만났던 김 씨는 국방부 직속 부대인 유해발굴감식단의 전사자 유해 발굴을 도운 대가로 받은 교통비 명목의 7만 원이 표기된 거래 내역서를 가슴 위 주머니에서 꺼내 취재진에게 보여줬다. [이창환 기자]
다시 만났던 김 씨는 국방부 직속 부대인 유해발굴감식단의 전사자 유해 발굴을 도운 대가로 받은 교통비 명목의 7만 원이 표기된 거래 내역서를 가슴 위 주머니에서 꺼내 취재진에게 보여줬다. [이창환 기자]

국방부 유해발굴감식단 그를 참전용사 인정했나

국방부 유해발굴감식단이 2017년 강화도의 6.25 전사자 유골을 찾기 위해 당시 해당 지역에서 활동했던 유격대 등 참전용사의 증언이 필요했던 것. 유해발굴단은 이를 토대로 전사자의 유해가 묻힌 곳을 유추해 발굴해 내는 방법을 쓰고 있었는데 당시 해당 지역에서 참전했던 것으로 추정되는 10여명이 유해발굴단과 인터뷰를 진행했다. 

이들은 전투 장소나 부대 주둔지 등을 포함한 작전 지역의 위치를 설명했다. 유해발굴감식단은 (고증을 거쳐) 그 중 김 씨의 서술만을 유일하게 인정했다. 강화 일대 주둔지나 전사자 매장위치 및 전투 장소 등의 정보는 정확한 것으로 판단됐다. 실제 6.25 전사자 유해가 발굴되면서 김 씨 진술이 사실로 확인됐고 국방부는 김 씨에게 교통비 명목으로 7만 원을 입금했다.

해당 내역을 확인시켜 주겠다고 다시 만났던 김씨. 그는 조끼 왼쪽 윗주머니에서 손바닥 절반 크기로 접어둔 종이를 소중하게 꺼내 보였다. 2017년 8월28일 국방부유해발굴단 7만 원 입금. 6.25 참전 인증을 거절했던 국방부가 한쪽에서는 김 씨를 참전 사실에 근거해 유해발굴 증인 또는 참고인으로 모은 10인 중 한명 이라는 사실도 납득이 어렵지만, 그 증언을 근거로 전사자 유해를 발굴하고 교통비를 입금한 사실은 더욱 놀라웠다.

무엇보다 당시 사실을 생생히 기억하고 현장의 위치를 파악해 낸 유일한 증인으로 김 씨가 인정받았다는 사실은 오히려 취재진이 유격대동지회를 취재하는 동안 가슴을 답답하게 했다. 

강화보훈회관 사무실에 붙어 있던 국가보훈처의 포스터. [이창환 기자]
강화보훈회관 사무실에 붙어 있던 국가보훈처의 포스터. [이창환 기자]

국방부 소속 관계자는 왜 김 씨를 찾아왔나

지난해 9월 국방부 소속의 정년이 얼마 남지 않은 A씨가 강화도 보훈회관을 찾았다. A씨는 유격대 사무국에 “6년여의 시간을 한결같이 시위를 이어온 김 씨 주장이 사실인지” 여부를 물었고, 갖가지 근거로 그 주장이 사실임을 확인한 A씨는 자신의 퇴직 전까진 김 씨의 6.25 참전 사실 인증을 돕겠노라고 했다. 

하지만 A씨는 그 이후로 연락이 없었다. 국방부에서 무슨 일이 생긴 걸까. 이에 지난해 12월 기다리다 못해 박 국장이 먼저 연락을 취했다. A씨는 “후임자에게 전달해 뒀으니, 잘 처리해 줄 것”이라는 말을 남기고 전화를 끊었다. 그리고 나서 6개월째 소식이 없다. 

이에 대해 국방부 관계자는 일요서울에 “당시 관계자도 안타까운 마음에 김 씨를 도우려고 노력한 것으로 보이나, 역시 훈령 상 어려움에 이르렀을 것”이라며 “훈령 수정이 불가한 것은 아니지만 그에 따른 문제 발생 등을 고려할 때 어려움이 있어 현실적으로 수월하지 않다”고 했다. 다만 “김 씨 상황을 다시 한 번 해당 부서에 전달해 고려할 수 있는지 확인해 보겠다”고 덧붙였다.

말없이 취재진을 한참 응시하던 김씨가 입을 열었다. “내가 6.25에 참전했고, 연락병으로 직접 발로 뛰었고, M1이 보급되면서 직접 총 들고 전투 현장에도 있었어요”라면서 “그런데 이걸 지금 인증 받지 못했다고 해서 사실이 아니라고 할 수는 없잖아요”라고 말했다.

취재진을 만나 그의 사연을 풀어내고 있는 김지묵 씨. [이창환 기자]
취재진을 만나 그의 사연을 풀어내고 있는 김지묵 씨. [이창환 기자]
취재진과 인터뷰를 마친 김 씨가 전쟁기념관 입구의 '형제의 상' 앞으로 지나 걸어나가고 있다. 그의 한 손에는 1인 시위를 위한 플래카드가 들려있다. 그는 지난 2월 "대통령께서는 사기 행각을 멈추시고 나의 6.25 참전 사실을 인정하시지요"라고 내용을 바꿔 적었다. 어떤 대통령이든 그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 주기를 바라는 의미였다. [이창환 기자]
취재진과 인터뷰를 마친 김 씨가 전쟁기념관 입구의 '형제의 상' 앞으로 지나 걸어나가고 있다. 그의 한 손에는 1인 시위를 위한 플래카드가 들려있다. 그는 지난 2월 "대통령께서는 사기 행각을 멈추시고 나의 6.25 참전 사실을 인정하시지요"라고 내용을 바꿔 적었다. 어떤 대통령이든 그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 주기를 바라는 의미였다. [이창환 기자]
강화보훈회관 내 사무실에 걸려 있는 6.25 전사자 유해 발굴 장면. [이창환 기자]
강화보훈회관 내 사무실에 걸려 있는 6.25 전사자 유해 발굴 장면. [이창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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