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자는 걷기를 좋아한다. 등산도 자주 간다. 사람 냄새나는 골목길 걷기도 즐긴다. 골목길은 특히 추억을 소환할 수 있어 좋다. 대로도 괜찮다. 역사가 숨 쉬는 명소를 만나는 기쁨도 크다. 이번 주부터 이처럼 느낌이 다른 곳곳을 걷는 도봉구 역사문화탐방을 소개한다. 길이 주제다. 한글역사문화의길 두 번째 편이다.

방학3동 역사문화의길. (사진=위성지 여행작가)
방학3동 역사문화의길. (사진=위성지 여행작가)

-방학3동 역사문화길한글역사문화길의 지류
600년된 우물 원당샘, 500년 넘은 은행나무 역사의 흔적

정의공주묘에서 길을 건너면 방학3동 역사문화길이 나온다. 한글역사문화길의 지류. 원당샘 공원으로 가는 골목이다. 원당샘 공원은 작다. 면적 4,671밖에 되지 않는다. 하지만 도봉구민의 문화적 자긍심을 높이는 문화의 보고다. 600년 된 우물인 원당샘, 서울에 생존하는 최고령 은행나무, 그리고 연산군묘가 있다.

원담샘 공원에 들어서자 오른편에 연산군묘가 있다. 정면에는 방학동 은행나무가 있다. 나무보다 사람이 우선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연산군묘를 먼저 둘러봤다. 서오릉을 소개했던 장희빈 대빈묘와도 차이가 있다. 가족묘의 형식을 띠고 있다. 5개의 봉분 3단 형태로 모셔져 있다. 연산군(왼쪽)과 부인인 신 씨의 양봉이 맨 뒤에 곡장(곡담)에 쌓여 있다. 맨 아래는 사위인 구문경과 딸, 휘순공주의 묘가 나란히 누워 있다. 부부의 묘비가 한날한시에 세워졌다고 기록되어 있다. 같은 날에 이장한 것으로 보인다.

방학동 은행나무와 가족묘연산군묘

네 개의 봉분 한가운데 태종의 후궁인 의정궁주(義貞宮主) 조 씨 묘가 있다. 이 묘지의 원래 주인은 의정궁주였다. 연산군묘를 이곳으로 이장하면서 3단 형태가 갖춰졌다. 얘기가 나온 김에 의정궁주에 대해 언급하고 가자. 의정궁주는 태종 후궁으로 간택됐다. 행운은 길지 않았다. 혼례를 치르기 전에 태종이 별세했다. 혼례를 올리지 못했으니 빈이란 작호를 수여 받지 못했다. 그래서 세종이 고려 때 후궁에 수여했던 작위인 궁주라는 호칭을 내렸다. ‘의정궁주는 조선 역사에서 한번 밖에 쓰이지 않은 호칭이다.

묘지 앞에는 연산군지묘라고 쓰인 묘비가 서 있다. 묘비 앞엔 혼유석(영혼이 놀도록 무덤의 앞에 설치해 놓는 직사각형의 돌)도 있다. 왕릉에서 보이는 병풍석, 무인석. 석호, 석양 등은 보이지 않는다. 무덤을 쌓고 있는 담장이 그나마 무덤의 지위를 짐작하게 할 뿐이다.

연산군 가족묘 위치도. (사진=위성지 여행작가)
연산군 가족묘 위치도. (사진=위성지 여행작가)

연산군은 중종반정으로 1506년 폐위됐다. 강화로 유배됐다. 전염병에 걸려 궁궐을 떠난 지 두 달 만에 생을 마감했다. 31살이다. 연산군묘는 유배지인 강화 교동도에 마련됐다. 1512, 연산군 부인 신 씨가 묘 이장을 요청했다. 신 씨는 길이 멀어 남편 묘소참배가 어렵다면서 유골이라도 가까이 모시고 싶다라고 간청했다. 중종은 이를 수락했다. 그래서 이듬해 거창 신 씨의 선산이 있던 지금의 도봉구 방학동으로 묘지를 옮기게 됐다.

폐왕의 불명예를 안은 연산군 무덤은 왕릉의 지위도 얻지 못했다. 장례는 왕자의 예를 갖춰 치렀다. 왕과 왕비에 붙이는 능()은 고사하고 왕세자와 왕세자비 그리고 왕을 생산한 후궁에 붙이는 ()’이라는 능호를 부여받지 못했다. 일반 서민의 산소에 쓰는 ()’가 됐다. 반정으로 쫓겨나 왕자의 신분으로 강등시켜 왕릉이 아닌 묘로 기록되어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되지 못했다. 국가사적 (362) 지정된 게 다행이라면 다행이다.

폐왕’ ‘’. ‘도 아닌 묘로 기록된 연산군의 비애

연산군 가족묘. (사진=위성지 여행작가)
연산군 가족묘. (사진=위성지 여행작가)

연산군묘가 이곳으로 옮겨진 뒤 파평 윤씨 집성촌이 생겼다. 그게 신당(신령을 모셔둔 곳)이 있던 원당마을(元堂里)이다. 연산군의 어머니의 본관인 폐비 윤씨 일족이 이곳으로 이사했다. 어머니 폐비 파평 윤씨에 대한 연산군의 효성을 기리겠다는 게 집성촌을 이룬 목적이라고 한다. 하지만 이는 파평 윤씨가 만들어 낸 이야기일 가능성이 크다. 파평 윤씨 가문은 연산군이 폐위될 때 큰 피해를 봤다. 파평 윤씨가 폐비될 때 못지않았을 것이다. 파평 윤씨 일가가 멸족의 위기를 벗어나기 위해 원당마을로 옮겨왔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그 증거가 바라 원당샘이다. 이 우물은 방학동 은행나무 곁에 있다. 원당샘은 정자와 커다란 대리석 뚜껑으로 가려져 있다. 대신 조그만 파이프에서 약수가 졸졸 흐르고 있다. 방학동 주민이 물통에 물을 받고 있다. 원당샘은 옛날에 피양우물로 불렸다. 피양(避陽)’이란 혼란한 사회를 피해 숨어들 정도로 외진 곳이라는 뜻이다. 파평 윤씨 일족도 사회적 혼란을 피해 이곳으로 피양한 것일지도 모른다. 집성촌을 이루고 살던 파평 윤씨의 전통은 꽤 오래 이어졌다. 지금도 15가구 정도가 원당마을에 살고 있다고 한다.

원당샘은 원당마을 주민의 생활용수였다. 특히 가뭄에도 물이 마르지 않았다. 한겨울에도 얼지 않지 않았다. 일년내내 일정한 양의 물이 고여 있는 아주 좋은 샘이었다. 600년의 역사를 이어온 이유다. 하지만 지난 2009년 가을 샘물이 말라 물이 흐르지 않았다. 도시개발의 후유증이었다. 지역 주민이 나섰다. “원당샘 되돌려달라고 요구했다. 2011년에 드디어 원당샘은 복원됐다. 지하수를 연결하여 물이 마르지 않게 했다.

원당마을 주민의 생활용수 원당샘(사진=위성지 여행작가)
원당마을 주민의 생활용수 원당샘(사진=위성지 여행작가)

원당샘 샘물을 마시며 원당우물과 역사를 함께 한 나무가 있다. 서울시 보호수 제1(1968)와 서울특별시 기념물(2013)로 지정된 방학동 은행나무가 그것이다. 국립수산과학원이 추정한 수령은 550(500~600)이다. 높이는 25m, 둘레는 10.7m. 구부러진 거목의 줄기마다 역사가 묻어 있다. 울퉁불퉁 튀어나온 옹기는 역경의 흔적 같다. 수령만큼이나 뛰어난 신통력을 갖고 있다. 나라에 변고가 있으면 몸을 태워 위험을 예고했다. 일례로 박정희 전 대통령이 총탄에 희생되기 직전에 이 나무에 화재가 발생했다.

당연히 원당마을의 수호신이 됐다. 위기도 있었다. 흥선대원군이 경복궁 증축할 당시 징목 대상으로 지목됐다. 원당마을은 마을의 수호신을 잃을 수 없는 일. 마을 사람이 온몸으로 지켜냈다. 이 일이 있은 방학동 은행나무는 흥선대원군을 이겼다고 대감나무라는 별명을 얻었다.

원당샘 옆 은행나무 흥선대원군이긴 대감나무

우리 조상은 예로부터 은행나무를 신목(神木)으로 여겼다. 장수한 은행나무를 가진 마을에서는 행목대신제를 지내는 게 보통이다. 원당마을도 그랬다. 또 대접도 융숭했다. 세종은 경기도 용문사에 있는 은행나무(수령 1100)에 당상직첩(堂上職牒)이라는 벼슬을 하사했다. 이렇게 귀한 대접한 탓일까. 우리나라엔 수령이 1000년 넘는 은행나무가 100그루 이상 있다. 전 세계의 1/10이 우리나라에 있다.

유교가 은행나무 전파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공자가 은행나무 밑에서 제자를 가르쳤다. 그것을 행단(杏壇)이라고 한다. 공자와 관련되는 교육기관에는 모두 은행나무를 심었다. 조선 교육기관인 성균관에는 은행나무를 심었다. 지방의 향교도 마찬가지다. 성균관대의 배지(휘장)가 은행잎인 게 우연이 아니다.

은행나무가 유교의 상징이 된 이유가 있다. 암수가 구별되는 특징은 남녀유별, 열매 하나에 씨가 하나인 것은 충성과 지조, 벌레가 없는 것은 청렴의 표상으로 여겨졌다.

그만이 아니다. 은행나무는 장수를 상징한다. ‘살아있는 화석’, ‘시간을 망각한 나무로 여겨진다. 그것도 오직 하나의 종만으로 존재하는 흔치 않은 나무다. 세계에 있는 은행나무는 모두 같은 종이라는 얘기다. 전 세계에 골고루 분포하는 나무 중에 동일 종의 나무는 은행나무가 유일하다. 특이성은 가치를 높이는 법이다.

서울 방학동 은행나무.서울시 보호수 제1호로 수령 약 550살로 추정되고 있다. (사진=위성지 여행작가)
서울 방학동 은행나무.서울시 보호수 제1호로 수령 약 550살로 추정되고 있다. (사진=위성지 여행작가)

원당샘 공원은 16세기초 조선의 역사단면

특이한 은행나무의 성질에 대해서는 아직도 할 얘기가 많다. 여기서 퀴즈를 하나 풀고 가자. 은행나무는 활엽수일까? 정답은 침엽수다. 침엽수의 특징을 모두 갖고 있다. 꽃잎 없이 꽃이 피는 나라식물이다. 잎도 모여나기를 한다. 소나무는 3, 잣나무는 5, 은행나무는 4~7개가 모여난다. 잎의 무늬를 보면 모여나기의 흔적을 확인할 수 있다. 이는 은행나무의 진화 과정을 보여주는 예이다.

연산군묘와 원당샘 그리고 방학동 은행나무가 있는 원당샘 공원은 그 자체가 16세기 초의 조선 역사의 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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