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작품의 새로움이 무대에서 표현될 때 전율과 희열 느껴요”

김나영 극작가
김나영 극작가

[일요서울ㅣ장휘경 기자] 10·20대 청년들은 장래 직업에 대한 원대한 꿈이 있지만, 자신의 진로 설계가 과연 올바른 것인지 확신을 얻지 못해 고민하는 경우가 많다. 이에 일요서울이 다양한 직업군의 멘토를 만나 그 직업에 대한 경험과 지식을 알아봄으로써 청년들에게 올바른 직업관을 심어주고 진로를 정하는 데 도움을 주고 있다. 이번에는 극작가를 꿈꾸는 10·20대 청년들의 멘토로 김나영 작가를 만나 인터뷰를 진행했다.

 

지난 1998년 문화일보 신춘문예로 등단해 24년째 희곡을 쓰고 있는 김나영 극작가는 젊었을 때부터 작은 소극장을 갖고 싶어했다. 좋은 작품을 가졌으나 돈이 없는 젊은 연극인들이 언제든 이용할 수 있는 작은 소극장을 짓고 싶은 것이 그의 소망인 것.

그는 자신의 소극장 꼭대기에 작업실을 만들어 그곳에서 커피를 마시며 햇살을 즐기고 심심하면 글도 조금씩 쓰는 삶을 상상한다.

김 작가는 올해 딱 50세가 됐다. 50세가 넘으면 좀 슬렁슬렁 살아도 될 것 같았는데, 그는 여전히 분주하고 산만하며 간혹 자신도 모르게 전투적인 삶이 되곤 한다며 너털웃음 짓는다.

소극장을 짓는 건 앞으로도 요원하지만 대신 좀 천천히 살아볼까 한다는 김 작가는 오늘도 하나둘 서서히 내려놓는 연습을 하고 있다.

작품 '밥'을 공연한 배우들과 함께 기념촬영 '찰칵'
작품 '밥'을 공연한 배우들과 함께 기념촬영 '찰칵'

- 극작가가 된 동기는 무엇인가요.

▲좀 우스운 이야기지만 주입식 교육의 결과라고나 할까요? 동화작가인 아빠 친구분이 저를 볼 때마다 “나영이 너는 커서 작가 될래?”라고 말씀하셨어요. 운명인가? 저는 아주 어릴 때부터 읽고 쓰는 걸 좋아했어요. 초중고 12년 내내 장래희망이 작가였고 중학교 1학년 학예회를 기점으로 극작가의 꿈을 꾸기 시작했어요. 공연할 대본을 직접 쓰고 연출했는데 지금 생각하면 유치하기 짝이 없는 이야기에 웃고 우는 친구들을 보면서 마치 벼락을 맞은 듯한 충격을 받았거든요. 수십 년이 지난 지금도 그때 그 순간이 마치 어제 일처럼 생생해요.

- 극작가가 되려면 어떤 능력을 갖춰야 하나요.

▲잘 읽는 훈련이 되어야 해요. 많이 읽다 보면 잘 읽게 되고 잘 읽어야 잘 쓸 수 있습니다. 관찰하고 기록하는 습관도 중요해요. 순간을 놓치지 않는 섬세함은 타고 나는 경우도 있지만 훈련을 통해 얼마든지 발전시킬 수 있기 때문이죠. 극작가는 예리한 눈으로 남들이 보지 못하는 걸 보는 사람이어야 해요. 예민한 귀로 남들이 듣지 못하는 걸 듣는 사람이어야 하는 거죠. 오감을 열어놓고 늘 채집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 어떻게 희곡을 써야 훌륭하다는 평가를 받게 되나요.

▲글쎄요. 평가에 초연해졌을 때 비로소 훌륭한 희곡을 쓰지 않을까요? 하하~.

- 작가님의 작품 스타일이나 작품세계에 대해 말씀해 주세요.

▲한 가지 스타일을 고수하진 않습니다. 이야기나 인물이 떠올랐을 때 거기에 맞는 스타일을 추구하는 편이죠. 저만의 확고한 작품세계가 있는 것도 아니에요. 다만 한 가지 추구하는 바는 있어요. 작가로서 어떤 순간에도 인간에 대한 연민을 잃지 않으려고 노력합니다. 그런 노력이 작품세계에 영향을 끼치지 않았을까 생각되네요.

작품 '밥'을 공연한 또다른 배우들과 함께 기념촬영 '찰칵'
작품 '밥'을 공연한 또다른 배우들과 함께 기념촬영 '찰칵'

- 극작가로서 희곡의 진짜 가치는 무엇이라고 생각하나요.

▲희곡은 문학이면서 문학으로 온전히 평가받기 힘든 장르예요. 그 어떤 경우에도 희곡의 가치는 책이 아닌 무대 위에 존재하니까요. 연출가와 배우에 의해 변화하고 새로운 생명체로 거듭났을 때 희곡의 가치 역시 완성되기 때문이에요. 물론 여기에는 중요한 전제가 따릅니다. 극작가는 자신의 희곡이 변화하는 걸 두려워해선 안 되고 작업자들은 희곡에 대한 존중을 끝까지 잃지 않아야 해요.

- 희곡을 창작할 때 주요한 모티브는 주로 어디서 찾아서 설정하나요.

▲책을 읽거나 뉴스를 보다가 어떤 장면 혹은 사건이 영감을 줘요. 낯설고 독특한 인물, 오랜 시간 잘 알던 사람의 급격한 변화에서도 영감이 떠오르고요. 모티브를 찾기 위해 특별히 노력하는 편은 아니지만 발견될 때까지 세상을 허투루 보지 않는 세심한 눈은 갖춰야 한다고 생각해요. 집 근처에 큰 도서관이 있는데 간혹 서고를 걸어 다니며 제목을 쭉 읽어나가곤 해요. 그렇게 한참 동안 제목을 읽는 것만으로 어떤 영감이 떠오르기도 하거든요. 도서관과 친해져야 합니다. 책을 읽지 않을 때도 도서관에 머물러 보세요.

취미로 합창단 활동을 하고 있다
취미로 합창단 활동을 하고 있다

- 희곡을 쓰시는 일 외에 시간에는 주로 무엇을 하나요.

▲노래 부르는 걸 좋아해요. 연극인합창단 <함께 노래한다면>에서 6년째 활동 중인데 최근에는 JTBC <뜨거운 싱어즈>라는 프로그램에 출연하기도 했어요. 도서관에 머무는 걸 좋아하고 저녁 산책을 즐겨요. 간혹 친구들이랑 둘레길, 자락길 등을 걷곤 하는데 앞으로 8년 정도 더 글을 쓰고 나면 국내외 좋은 길을 찾아 걸어 다니고 싶어요.

- 발표하신 희곡 중 가장 기억에 남는 작품은 어떤 것이고, 그 이유는 무엇인가요.

▲재작년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창작산실 대본공모에 당선된 희곡 <당신은 아들을 모른다>예요. 작가 이전에 철저하게 엄마의 감정으로 집필을 시작한 이 희곡은 준비 기간만 1년 가까이 걸렸고 가장 오랜 시간 깊은 감정이입 상태에서 탄생한 작품이거든요. 때문에 결말을 놓고 작가와 엄마 사이에서 무수히 갈등했어요. 당선 이후에도 여러 번 수정을 거쳐 드디어 올 9월 대학로예술극장에서 공연됩니다.

후배 양성을 위해 극작 강의를 하고 있다
후배 양성을 위해 극작 강의를 하고 있다

- 특별히 글을 쓰고 싶다는 충동을 느낄 때는 언제이고, 반대로 회의가 느껴질 때는 언제인가요. 또한 글을 쓰시는 이유와 목적은 무엇인가요.

▲좋은 희곡이나 공연을 보면 더 좋은 작품을 쓰고 싶다는 열의를 갖게 돼요. 제게 질투는 글을 쓰게 하는 큰 원동력인 거죠.

적절한 보상이 따르지 않을 때는 회의가 느껴지기도 해요. 금전적 보상만을 이야기하는 게 아니에요. 관객들의 호응과 관심, 동료들의 응원과 격려도 훌륭한 보상입니다. 간혹 그 어떤 보상도 얻지 못했다고 느껴지는 공연이 있어요. 그럴 땐 참 힘이 빠지죠. 결과에 상관없이 월급은 받는 삶이 부럽기도 합니다. 하하~.

글을 쓰는 거창한 이유나 목적은 없어요. 행복해지기 위해, 조금 더 나은 인간이 되기 위해 쓰는 것 같아요. 누군가를 변화시키고 어떤 영향력을 끼치는 건 그다음 문제가 아닐까 생각해요.

- 극작가로서 어떤 연출가와 배우가 훌륭하다고 생각하시나요.

▲수많은 퇴고를 거치는데도 결국 무대 위에서 완성되는 것이 희곡이에요. 그러므로 연출가와 배우에 의해 새로운 무언가가 발견되고 무대에서 표현되었을 때 극작가는 전율과 희열을 느끼곤 해요. 결과를 떠나 과정에서 훌륭함이 드러나는 연출가와 배우들도 많아요. 설령 부족함이 있는 작품이라도 쓴 사람의 의도를 이해하려고 노력하는 분들이 정말 훌륭해 보여요. 특히 작가만큼 읽었는데도 이해할 수 없을 때, 그때 질문하고 제안하는 분들이 정말 자신의 일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할 줄 아는 훌륭한 분이라고 생각해요.

- 현시대 극작가들이 공통으로 안고 있는 고민이나 과제가 있다면 무엇일까요.

▲글쎄요. 다른 작가님들의 고민까지 제가 다 알 수는 없으니 최근 저의 고민을 말씀드릴게요. 극작가는 시대의 환부를 노골적으로 드러내는 일을 합니다. 그러다 보면 누군가를 불편하게 만드는 일이 더러 있어요. 최근 들어 젠더갈등이나 계층갈등 같은 민감한 사회적 이슈들이 많은데요. 좋은 화두를 던질 수 있음에도 양날의 검이 되어 작가에게 돌아오기도 합니다. 저는 논쟁을 일으키는 작품이 좋은 작품이라고 생각해요. 그런데 요즘 논쟁 가운데는 건강하지 못한 것들이 섞여 있어요. 나와 다른 생각에 귀를 기울이고 비방 대신 건강한 논쟁을 시작했으면 좋겠습니다.

김나영 극작가
김나영 극작가

- 극작가는 다양한 인물을 만들어내는데, 작가님은 개인적으로 어떤 캐릭터를 선호하시나요.

▲조금은 바보 같은 캐릭터를 사랑해요. 우직한 사람, 약빠르지 못한 캐릭터를 사랑합니다. 조금 손해 보고 상처 입더라도 그의 사랑으로 주변을 변화시키는 바보를 사랑해요. 선호하는 캐릭터가 그렇다는 겁니다. 하하~. 사실 저는 거의 모든 인물에 저 자신을 투영하곤 해요. 저의 어떤 일면을 극단적으로 끌어내 캐릭터화한다고 볼 수 있겠네요. 그러다 보니 제 작품에는 대놓고 악인은 등장하지 않는 편이에요. 적어도 작가 자신은 이해하고 공감할 수 있는 악을 그려내려고 합니다. 악의 저편에 한때는 선이 존재했음을 믿는다고나 할까요.

- 마지막으로 극작가를 꿈꾸는 10·20 청년들을 위해 조언 부탁드립니다.

▲좋아서 하는 일도 때론 힘에 부쳐요. 그런데 힘에 부쳐 안 하다가도 좋아하는 일이니까 결국엔 다시 하고 싶어져요. 저는 그렇게 24년 동안 글을 쓰고 제 글이 무대 위에 서 있는 시간을 즐겨왔어요. 그리고 견뎌왔습니다. 관객과 함께 자기 작품을 감상해야 한다는 건 생각보다 즐겁고 생각보다 고역이거든요. 시인이나 소설가는 얼마나 좋을까요. 독자의 얼굴을 보지 않아도 되니까요. 졸고 있는 관객 옆에 나란히 앉아있는 건 세월이 아무리 흘러도 변함없이 별로예요. 그래도 이 일이 감동적인 건 누군가 내가 써낸 한 마디 한 마디를 혼신의 힘을 다해 보여주고 들려준다는 점이에요. 고민의 흔적이 새카만 대본을 마지막 공연까지 손에서 놓지 않는 연출가와 배우들 덕분에 극작가는 더할 수 없이 멋진 직업이라고 생각하고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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