尹-펠로시 접견 불발...김진 출타에 김진표 의장만 펠로시와 회동
아시아 5개국 중 한국만 정상 외교 포기...한-미 관계 약화 우려도
미-중 갈등 국면 속 中 자극 최소화하려는 尹 정부 '고도 외교술'?

낸시 펠로시 미국 하원의장이 4일 오전 서울 용산구 그랜드하얏트 호텔을 나서고 있다. [뉴시스]
낸시 펠로시 미국 하원의장이 4일 오전 서울 용산구 그랜드하얏트 호텔을 나서고 있다. [뉴시스]

[일요서울 l 정두현 기자] 윤석열 대통령이 지난 3일 방한한 낸시 펠로시 미국 하원의장과의 접견을 마다하고 '휴가'에 집중하고 있다. 미-중 갈등이 고조되는 등 대외 정세가 급박하게 돌아가는 가운데, 윤 대통령이 군사 우방국인 미국과의 외교 '속도조절'에 나선 까닭에 이목이 집중된다.

낸시 펠로시 미국 하원의장은 대만에 이어 지난 3일 한국을 찾았다. 그러나 대통령실은 이날 윤 대통령이 휴가 중이라며 펠로시 의장과의 회동 일정을 잡지 않았다고 밝혔다. 앞서 대통령실은 윤 대통령이 '펠로시 의장과 면담을 가질 것'이라고 했다가 이를 번복하는 등 메시지 방출 과정에서 혼선을 빚기도 했다.  

박진 외교부 장관 등 대외 부처 고위 관계자들도 펠로시 의장과의 회동 일정이 성사되지 않았다. 박 장관은 이날 아세안 외교장관 회담 참석차 캄보디아로 출국했다.  

아시아 외교 순방에 나선 펠로시 의장은 앞서 대만 차이잉원 총통, 싱가포르 리셴룽 총리, 말레이시아 이스마일 사브리 야콥 총리와 순차적으로 회동을 가졌다. 오는 5일에는 일본 기시다 후미오 총리를 만날 예정이다. 한국을 제외한 4개국 모두 국가 정상들이 직접 펠로시 의장과 만나며 대미 외교에 적극 나선 셈이다.

펠로시 의장의 이번 해외 순방은 미-중 관계가 악화일로를 걷는 가운데, 아시아 주요국들과 우호를 다지며 중국을 고립시키려는 미국의 전통적인 외교 압박 전략이다. 펠로시 의장에게는 국제 무대에서 존재감을 과시하며 정치 입지를 다질 수 있는 기회이기도 하다.    

펠로시 의장은 미 하원에서 민주당을 이끌고 있으며, 조 바이든 대통령, 카멀라 해리스 부통령에 이어 바이든 정부 3인자로 여당 차기 대권주자로도 지목되는 인사다. 다만 83세(만 82세)의 고령인 펠로시 의장의 정치 지속가능성에 의문을 제기하는 시각도 적잖다.   

미 현역 하원의장의 방한은 윤석열 정부의 대미(對美) 노선을 재점검하는 외교 시험대가 될 것이란 전망이 나왔다. 그러나 윤 대통령은 '휴가'를 이유로 펠로시 의장과의 접견에 선을 그었다. 펠로시 의장 입국 당일 저녁 윤 대통령 부부는 대학로 소극장 연극을 관람한 것으로 알려졌다. 결국 4일 윤 대통령은 펠로시 의장을 직접 만나지 않고 '전화 외교'를 택했다. 박진 외교부 장관도 해외 일정으로 부재 중인 만큼, 김진표 국회의장이 이날 대신 펠로시 의장과 회동에 나섰다. 지난 2015년 펠로시 의장이 민주당 원내대표 자격으로 한국을 찾았을 당시 박근혜 대통령을 비롯해 정의화 국회의장, 윤병세 외교부 장관을 모두 만난 것과 극명하게 대조되는 대목이다.

미국 의전 서열상 최상위 인사가 방한해 국회의장만 만난 경우는 드물다. 그간 미국과의 연대를 강조했던 윤석열 정부의 이같은 '돌발 행보'에 일각에선 외교적 우려가 분출했다. '휴가'를 이유로 미 고위급 인사 접견을 마다한 배경에 이목이 쏠릴 수밖에 없는 이유다.  

정치권에선 윤석열 정부가 펠로시 의장과의 만남에 소극적인 것은 미-중 갈등 전선에서 한발짝 물러서는 전략적 외교술이라는 분석이 대체적이다. 미국과 대치 중인 중국을 자극하지 않겠다는 계산이 선 것으로 보인다.   

다선을 지낸 보수정당 출신 전직 의원은 "거대 양국의 줄다리기에 휩쓸리는 것은 득보다 실이 많다고 판단한 것"이라며 "다른 아시아 4개국과 달리 대통령 휴가 때문에 미국 정부 3인자와의 접견이 무산된다면 향후 대미 노선에 문제가 생길 수 있다. 대통령실의 이번 대응은 세련되지 못하다"라고 지적했다.   

한편 펠로시 의장은 이날 국회에서 김진표 국회의장을 만나 국제 현안을 놓고 회담을 가진 뒤 오후엔 판문점 공동경비구역(JSA)을 방문해 국군 장병들을 격려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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