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월 22일 ‘수교 30주년’을 맞는 한중 관계는 그 어느 때보다 어려운 도전을 맞고 있다. 윤석열 정부 출범 후 첫 한·중 외교장관 회담(8월 9일)에서 왕이(王毅) 부장은 박진 장관에게 ‘외부 영향 배제’, ‘중대 관심사 배려’, ‘내정 불간섭’, ‘공급망 유지’, ‘다자주의’ 등을 열거하며 한중 관계에서 ‘5개의 마땅함’이라는 요구사항을 꺼냈다. 한국이 미국 편향 외교에서 벗어나 사드, 반도체, 대만 문제 등에서 중국 입장을 존중하라는 압박이다.

왕원빈(汪文斌) 중국 외교부 대변인은 회담 다음 날 “한국 정부는 대외적으로 ‘3불(不) 1한(限)’의 정치적 선서를 정식으로 했다”며, 사드의 운용을 제한한다는 의미의 ‘1한(限)’이라는 새로운 주장까지 들고 나왔다.

문재인 정부의 대중(對中) 부채가 된 ‘3불(不)’(‘사드 추가 배치, 미국 미사일 방어 체계(MD) 참여, 한미일 동맹 불가’)은 한 나라의 주권에 관한 사항으로, 국가 간 공식 합의가 아니다. 중국은 앞으로 1한(限) 이행을 줄기차게 압박해 올 것인 만큼 문 정권 관계자들이 그 당시 중국에 어떤 약속을 했는지 책임을 추궁해야 마땅하다.

북핵과 미사일 위협에 대한 대응은 자위적 방어수단이며 안보주권 사안이다. 타협이 있을 수 없다. 정부는 중국과 협력은 확대해 나가되 부당한 압력에는 단호하게 맞서서 이겨내야 한다.

중국 공산당은 상대가 약세를 보이면 굴종시키려 든다. 시진핑 주석은 과거 “한반도가 중국의 일부였다”는 말까지 했다.

634년 전인 1388년(우왕 14년). 명나라 주원장이 철령위(鐵嶺衛)를 설치한 것은 한국사의 줄기를 바꿔 놓았다. 이에 반발한 우왕과 최영(崔瑩, 1316~1388)장군이 요동정벌을 단행했는데, 이성계가 위화도(威化島)에서 회군(回軍)해 조선을 개창함으로써 ‘대륙경영의 꿈’이 좌절되었다.

최영은 명장군이자 재상이었다. 본관은 철원 최씨(동주 최씨)로, 사헌부 간관을 지낸 최원직(崔元直)의 아들이다. 문신 가문이었지만 무장의 길을 걸었다. 최원직은 최영이 16세 경에 ‘황금 보기를 돌같이 하라.’는 유언을 남겼다.

명나라가 철령위를 설치하려하자, 73세의 최영은 건국 직후의 명나라가 내정 불안정으로 전쟁에 전력하기 어렵다고 판단하고 이 기회에 요동까지 쳐들어가자는 주장을 폈다.

그러나 신진 사대부들로부터 신망을 얻고 있던 이성계는 ‘사불가론(四不可論)’을 들어 최영의 주장에 반대했고, 결국 정권을 탈취하였다.

우왕이 폐위되고, 아들 창왕이 즉위하자 최영의 처단을 요구한 죄목은 ‘공이 죄를 덮을 수 없다(功不掩罪者공불엄죄자)’였다. 최영은 ‘공죄론(功罪論)’의 덫에 걸려 처형되었다.

최영은 “평생에 있어서 탐욕이 있었다면 자신의 무덤에 풀이 자랄 것이고 결백하다면 무덤에 풀이 자라지 않을 것”이라고 유언을 했다. 실제로 그의 무덤(경기도 고양시)에는 오랜 세월 동안 풀이 자라나지 않는 ‘적분(赤墳)’이었다.

최영의 비극적인 삶에 대한 아쉬움은 고려 멸망 후 민간 무속신앙으로 변모하였다. ‘최영장군’ 신은 조선시대부터 널리 숭배 받는 신이 되었고, 지금도 한반도 최고의 장군 신으로 군림하고 있다.

역사에서 가정은 무의미하지만 만약 최영이 우왕의 부탁을 거절하고 직접 요동정벌군을 지휘했다면 과연 고려는 어떻게 되었을까. 4년 후(1392년) 조선건국은 수 십 년 늦어지고, 조선도 명에게 처음부터 휘둘리지 않았을 것이다.

오직 나라와 백성을 위해 평생을 헌신하다 쓰러져 간 청렴의 상징이요, 민중의 흠모 대상인 최영 장군을 경모하는 필자의 자작 한시를 소개한다.

見金如石遺言難(견금여석유언난) 황금보기를 돌같이하라는 부친 유언을 힘껏 따랐고

麗運傾斜德業寒(려운경사덕업한) 고려의 국운이 기울자 (최영의) 덕업이 퇴색했네

北虜南倭全粉碎(북로남왜전분쇄) 북쪽 홍건적과 남쪽 왜구를 완전히 쳐부쉈고

貪官汚吏各銷殘(탐관오리각소잔) 탐관오리들은 모두 힘없이 사그라졌네

遼東北伐專憂國(요동북벌전우국) 요동정벌은 오로지 나라를 걱정하는 마음이었으나

威化回軍忽慨嘆(위화회군홀개탄) (백성들은) 위화도 회군을 홀연히 개탄했네

三尺街童知捏造(삼척가동지날조) 철없는 아이들도 (최영)죄가 날조된 것을 알았는데

赤墳萬古示人丹(적분만고시인단) 풀 나지 않는 묘는 만고에 최영의 단심을 보여주네

일요서울 논설주간 우 종 철

저작권자 © 일요서울i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