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하일 고르바초프(고르비) 전 소련 대통령이 8월30일 91세로 별세했다. 1985년 소련 공산당 서기장에 오른 그는 1991년 사임할 때까지 단 6년에 걸쳐 20세기 역사를 바꿨다. 그는 1917년 공산혁명 이후 1당 독재로 병든 소련 체제 개혁에 나섰다. 상점 매대에는 생필품이 텅 빌 정도로 경제는 파산상태였다. KGB(비밀경찰)는 저항세력을 잔인무도하게 처단했다. 고르비는 “이 대로는 계속 살 수 없다”며 폐쇄된 독재체제를 ‘페레스트로이카(개혁)’와 ‘글라스노스트(개방)’로 개조 키 위해 뛰어들었다. 언론·출판·결사의 자유와 공산당의 거수기였던 국회에도 자유토론의 새바람을 불어넣었다. 

고르비는 동독·헝가리·벨라루스 등 동유럽 위성국들에도 소련과 같은 자유 바람을 불어넣었다. 반체제 인사 안드레이 사하로프 박사도 석방했다. 그는 빈곤탈출을 위해선 군사비를 줄여야 한다며 1987년 미국과 ‘중거리핵전력조약(INF)을 체결했다. 동유럽 위성국들은 고르비의 자유 열풍을 타고 공산독재의 손아귀에서 벗어났다. 동독인들은 1989년 11월 ‘베를린 장벽’을 무너트렸고 다음 해 서독의 자유시장경제 체제로 편입했다. 서독인들의 90%는 고르비를 신뢰한다고 했으며 그를 “고르비”로 애칭 했다.

그는 1989년 12월 조지 H. W. 부시 미국 대통령과 ‘냉전 종식’을 선언했고 다음 해 6월엔 한국과 수교에 합의했다. 그러나 공산당 기득권자들은 1991년 8월 쿠데타를 일으켜 고르비를 감금했다. 하지만 쿠데타는 당시 소련연방국들 중 하나였던 러시아공화국 대통령 보리스 옐친에 의해 진압되었다. 이어 옐친은 12월8일 우크라이나와 벨라루스 최고 지도자들과 함께 소련연방 해체를 결의했다. 그에 따라 소련연방 대통령인 고르비는 12월25일 사임했다. 그는 1990년 노벨 평화상을 수상했다.

고르비는 1931년 소련 북부의 스타브로폴에서 상하수도 시설도 없는 가난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났다. 모스크바 국립대학에서 법학을 전공하면서 마키아벨리, 게오르그 헤겔, 잔 자크 루소, 미국 헌법 등을 읽었다. 대학 댄스파티에서 미모의 철학 전공 학생 라이사를 만났고 라이 사는 그를 콘서트와 박물관으로 데리고 다니며 촌티를 벗게 했다. 둘은 1953년 결혼했다. 고르비는 아버지가 요셉 스탈린의 집단농장화로 굶주림에 시달렸고 수많은 사람들이 아사했던 참상을 기억하면서 스탈린 독재체제에 회의를 품게 되었다. 

고르비는 정력적이고 창의적이며 통찰력이 강했다. 1980년 49세의 젊은 나이로 공산당 정치국 정회원으로 발탁되었다. 그는 1982년 레오니드 브레즈네프 사망에 이어 유리 안드로포프와 콘스탄틴 체르넨코가 잇달아 1-2년 사이 병사하자 54세의 젊은 나이로 1985년 당 총서기로 피선되면서 자유화의 길로 나섰다. 그러나 고르비는 ‘탄압으로 유지된 권력이 자유화할 때 파괴되고 만다’는 권력 속성을 간파하지 못했다. 그는 결국 자유화 저항세력에 직면, 사임해야 했다. 그는 사임했지만 그가 남긴 자유 유산은 지금도 동구권에서 활활 타오르고 있다.

하지만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은 소련연방 붕괴가 20세기 “가장 큰 지정학적 재앙”이라며 고르비를 증오한다. 푸틴 지지자들은 고르비가 타계하자, “지옥에서 타 죽어야 할 사람”이라고 악담했다. 고르비의 인권과 자유 열망은 중국 공산 독재국가로 확산되었다.

하지만 중국 최고 지도자 덩샤오핑(鄧少平)은 1989년 6월 텐안먼(天安門) 광장에서 자유를 절규하던 시민들을 탱크로 깔아 죽였다. 덩샤오핑은 ‘탄압으로 유지된 권력이 자유화할 때 파괴되고 만다’는 위기를 직감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헤겔은 ‘인류 역사는 자유를 향해 진보한다’고 했다. 푸틴의 러시아, 시진핑의 중국, 김정은의 북한 독재국가들에서도 언젠가는 자유의 불꽃은 화산처럼 폭발하리라 확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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