같은 길을 걸어도 사람 따라 그 느낌은 다르다. 살아온 시대가 다르고 경험한 사건도 다르니 당연한 일이다. 하지만 시대와 경험의 격차를 없애는 공간이 있다. 공유하는 역사 공간이다. 그 공간은 공감을 낳는다. 한 시대의 일면을 압축하는 위인들이 만든 공간의 공감력은 더 크다. 위인의 삶과 그 기록은 역사에 몰입하는 힘이 된다. 인물과 사건이 얽히고설키면 서사가 되기 때문이다.

근현대사기념관 앞 화원에 강북구와 인연있는  순국선열 14명의 흉상이 서 있다. (사진=위성지 여행작가)
근현대사기념관 앞 화원에 강북구와 인연있는 순국선열 14명의 흉상이 서 있다. (사진=위성지 여행작가)

인물과 사건이 얽혀 서사가 되는 근현대사기념관
도선사 명물 윤장대’, 손잡이 돌려 불경 외는 장치

그 이야기의 현장이 있다. ‘서울’, 아니 강북구의 근현대사의 인맥을 정리한 곳이다. 순례길과 흰구름길 사이에 있는 근현대사기념관이다. 손병희, 이준, 여운형, 김창숙, 이시영, 유림, 서상일, 김도연, 신숙, 신익희, 조병옥, 신하균, 양일동 선생의 이야기가 살아 숨 쉰다. 그들의 생전 독립운동 대가로 얻은 질곡과 고통의 기억을 강북구가 기록했다. 이 기념관이 2016년 개관되면서 강북구가 기록한 순국선열을 대한민국이 기억하게 됐다.

독립투사 14...대의를 위한 영웅담 산실

북한산 둘레길 순례길과 흰구름길 사이에 있는 근현대사 기념관
북한산 둘레길 순례길과 흰구름길 사이에 있는 근현대사 기념관

흰구름길과 순례길을 만나는 지점에 다다랐다. 통일교육원을 지나자 북한산공원 관리사무실인 수유분소가 나왔다. 통일교육원 골목을 벗어나자 산길이 사라졌다. 아스팔트 길이다. 길 건너편에 고급스러운 다원처럼 보이는 건물이 있다. 운치 있게 정돈된 정원도 있다. 분위기도 아늑하다. 조국의 독립을 위해 투쟁한 투사의 애달픈 인생과 파란만장한 사건을 기록한 근현대사기념관이다. 그 기록의 상징은 기념관 화원을 따라 서 있는 독립투사 14명의 흉상이다. 필자는 이들의 얼굴을 맞대는 그 자체가 근현대사기념관을 찾은 이유라고 생각한다.

위인 한 사람 한 사람 흉상 앞에 섰다. 흉상 비석에 새겨진 그들의 이력을 꼼꼼히 읽었다. 이력 자체가 대의를 위한 영웅담이다. 그보다 더 생생하고 극적인 독립투쟁사는 없을 것이다. 평안한, 아니 안일한 삶조차 행복에 겨워 스트레스 병에 시달리는 후손에게 주는 해독제같다. 기념관 내부는 자유·평등·민주의 이념이 선열들이 피땀 흘려 체득하고 축적해 온 소중한 가치임을 이야기로 전달하고 있다. 이야기가 없다면 인간 세상을 이해할 길이 없다라고 했던 윌 스토커의 말이 생각난다.

이번 둘레길 탐방은 산책에 집중했다. 지난번과 달리 순국선열의 묘역을 지나쳤다. 나만의 속도를 유지하면 천천히 걸었다. 어디선가 새소리가 들려온다. 바람도 귓가를 간지럽힌다. 자연이 필자의 동행자다. 조급해하지 않으려고 애썼다. 그런데 수없이 많은 사람이 필자를 추월해 앞서갔다. 속도를 내고 싶은 마음이 꿈틀댔다. 조바심이 점점 커간다. 압박으로 다가왔다. 나선 김에 도선사까지 다녀와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번 탐방에서 자연과 동행은 여기까지다. 발걸음이 빨라지자 새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보광사의 설법당. 선학원 소속의 사찰이라서 주로 참선  수행을 한다. (사진=위성지 여행작가)
보광사의 설법당. 선학원 소속의 사찰이라서 주로 참선 수행을 한다. (사진=위성지 여행작가)

보광사에 도착했다. 보광사는 순례길을 찾는 탐방객의 이정표와 같은 사찰이다. 순례길의 입구에 있는 절이라는 얘기다. 보광사는 여느 사찰과는 달랐다. 일주문도 없다. 천왕문도 없다. 넓은 마당을 마주한 거대한 설법당이 있다. 설법당을 돌아가자 대웅전이 있다. 대사찰의 정적을 깨는 신도 한 명이 있다. 대웅전에서 오체투지의 큰절을 올리고 있다. 머리, 다리, , 가슴, 배의 다섯 부분이 땅에 닿도록 엎드리는 예법이다. 인도식 절이다. 우리나라에서는 이런 예법은 거의 사라졌다. 우리나라는 왼쪽과 오른쪽 팔꿈치, 왼쪽과 오른쪽 무릎, 이마가 닿도록 하여 절을 한다. 이런 예법은 우리나라의 전통 절 방식과 오체투지 예법을 절충한 것이다.

순례길을 찾는 사람 이정표, 보광사

대웅전 앞에는 커다란 맷돌이 있다. 6·25 한국전쟁 때 절이 전소됐다. 절을 다시 짓는 과정에서 발굴된 맷돌이다. 1m, 두께 40cm나 된다. 이 정도의 크기라면 수백 명의 스님이 기거했던 대사찰임을 짐작하게 한다. 보광사의 전신이 신원사로 추정되는 이유다. 또 다른 근거도 있다. <<가람고>>(조선 후기 문신인 신경준이 지방에 있는 절의 명칭과 소재지·기문 등을 기록한 불교서)<<북한지>>(조선 후기 승려 성능이 북한산성에 관하여 1745년에 편찬한 지방지)에 의하면 북한산성 대동문 아래 신원사가 있다. 그 규모는 무려 75칸이나 됐다. 사실 보광사 뒤로 산길로 오르면 진달래 능선이 나온다. 진달래 능선은 대동문으로 이어지는 산행길이다. 신원사가 보광사일 가능성이 크다는 근거다.

우이동 계곡. (사진=위성지 여행작가)
우이동 계곡. (사진=위성지 여행작가)

도선사를 빼놓고 북한산의 사찰을 말할 수 없다. 내친김에 우이동 계곡을 따라 도선사까지 걸어 올랐다. 도선사로 가는 길은 풍요롭다. 계곡을 따라 옮기는 걸음 따라 풍경이 달라진다. 특히 아름다운 명소 9곳을 우이구곡(위로부터 아래로 만경포, 적취병, 찬운봉, 진의강, 옥경대, 월영담, 탁염암, 명옥탄, 재간정)이라고 한다. 우이구곡은 조선 중기 문인인 홍양호가 설정했다. 산사로 가는 명소 9곳의 사진과 함께 지명과 해설이 적힌 푯말이 서 있다. 사진의 모습과 얼마나 닮았는지 확인하고 싶었다. 우거진 숲에 가려 우이계곡의 속살을 볼 수 없었다.

강남에 봉은사가 있다면 강북에 도선사가 있다. 서울의 제일 명찰이라는 얘기다. 하지만 도선사는 1963년 청담 대종사에 의해 개명되기 전까지 도성암이라는 작은 암자였다. 강북의 대표 사찰이 된 데는 청담 대종사라는 걸출한 불교 지도자가 있었기 때문이다. 청담 대종사는 사회 대중에게 좀 더 가까이 가는 불교 운동을 전개한 선각자였다. 이를 위해 생활불교와 실천불교를 역설했다. 왜색 탈피를 위한 불교 정화 운동, 평화통일을 위한 참회기도 제창, 승려 교육기관인 호국참회원 설립도 그 일환이었다. 청담 대종사는 입적한 뒤에도 큰일을 했다. 사리탑을 조성할 때 고려 범종을 비롯한 다양한 유물이 출토됐다.

청담 대종사의 호국 참회가 박정희 정권에 깊은 감명을 줬다. 도선사의 불사 중흥에는 영부인 고 육영수 여사가 있다. 도선사와 육 여사의 인연은 1967817일 도선사 방문부터 시작된다. 그 인연은 육 여사의 사망 때까지 이어진다. 육 여사는 청담 대종사로부터 대덕화라는 법명을 받았다. 1972년 문세광의 총탄에 피격된 뒤 도선사 명부전에 모셔졌다. 주는 게 있으면 받는 게 인지상정. 불가라고 다르지 않다. 우이동 버스 공영주차장에서 도선사까지 이어지는 청담로는 권력의 도움으로 만들어진 것으로 알려졌다. ‘청담로는 무려 54년 전인 1968년 개통됐다. 당시 서울 도심조차 도로 환경이 열악한 상황이다.

도선국사가 신통술을 부려 지팡이로 조각했다는 마애서불 관음상. (사진=위성지 여행작가)
도선국사가 신통술을 부려 지팡이로 조각했다는 마애서불 관음상. (사진=위성지 여행작가)

도선사의 출발은 마애석불에서 시작된다. 1,200여 년 전인 862(신라 경문왕 2) 신라의 고승 도선국사가 명산 승지를 답사했다. 삼각산의 백운대, 만경대, 인수봉 세 봉우리가 알을 품은 형상을 보고 절터를 잡았다. 도선국사는 이 터를 “1000년 후 말법 시대에 불법을 다시 일으킬 명당이라고 예언했다. 신통력을 발휘해서 바위를 가른 뒤 한쪽 면에 지팡이로 마애석불 관음상을 새겼다. 지금은 참회 도량으로 도선사의 최고 인기를 누리고 있다. 마애석불 관음상의 영험한 능력 탓이다. 해마다 수많은 신자가 각자의 소원을 담아 기원하는 곳이다. 필자가 방문했던 날도 수십 명이 수능 합격 기도를 드리고 있었다.

도선사 참회도량소원성취 사찰 유명세’ 

도선사는 산중의 절 같지 않았다. 사람도 많다. 또 대웅전을 비롯한 전각 앞에는 연등을 달았던 철사들이 어지럽혀져 있다. 연등 축제를 이어 국화축제가 예정되어 있었다.

어수선한 틈을 타 대웅전 앞에 섰다. 셔터를 누르는 순간 한 여성 보살이 주지 스님이 오신다라며 내려가라고 쫓았다. 허탈한 마음을 뒤로 하고 명부전으로 자리를 옮겼다. 보리수 한 그루가 서 있다. 200여 년 전 인도 승려가 심은 나무란다. 초여름 담황색 꽃 열매로 염주를 만든다. 그래서 보리수를 염주나무라고 부른다.

도선사의 명물로 통하는 윤장대.  (사진=위성지 여행작가)
도선사의 명물로 통하는 윤장대. (사진=위성지 여행작가)

명부전 옆에는 도선사의 또 다른 명물이 있다. 윤장대이다. 윤장대란 불교 경전을 안에 넣어두고 손잡이를 돌려가며 불경을 외는 장치다. 불교에서는 지혜를 상징하는 최고의 예술품으로 여겨진다. 경전을 읽는 것과 같은 공덕이 생긴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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