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주도 자연이 준 혜택에 호사를 누린다. 19일 다시 북한산을 찾았다. 북한산은 어딜 보아도 무릉도원이다. 반석 위로 흐르는 옥류와 소나무가 어우러진 계곡의 아름다움, 험준하면서도 수려한 산세와 수려한 경관……. 겹겹이 이어지는 산자락은 산수화 속의 한 장면이다. 어딜 둘러봐도 격조가 느껴지는 풍광이다.

대동문가는길 표지판. (사진=위성지 여행작가)
대동문가는길 표지판. (사진=위성지 여행작가)

6개성문(북문, 대동문, 보국문, 대성문, 대남문, 대서문)6개 암문
- 북한산성 축조 숙종 결사항전 의지, “선조.인조 굴욕 더 이상 안돼

천혜의 자연 속에 배치된 인공물이 있다. 북한산성이다. 12.7km나 된다. 북한산의 최정상인 백운대, 만경대, 인수봉을 둘러싸고 있다. 북한산 정상을 가기 위해서는 반드시 산성의 문을 통과해야 한다. 북한산성에는 6개의 성문(城門·북문, 대동문, 보국문, 대성문, 대남문, 대서문)6개의 암문(暗門·위문<백운동암문>, 용암문<용암봉암문>, 보국문<동암문>, 청수동암문, 부암동암문, 가사당암문), 2개의 수문, 군사지휘소인 3개의 장대(將臺·동장대 남장대 북장대)가 있다.

북한산성을 오르는 길은 여러 갈래가 있다. 선택의 여지가 없다. 강북구에 유일하게 대동문이 있기 때문이다. 진달래능선을 따라 곧장 대동문으로 가는 대신 용암문을 경유했다. 용암문까지는 도선사에서 불과 1.1km. 코스가 변화무상하다. 험난하다. 수없이 많은 계단을 올라도 또 계단이다. 등산로는 깊은 숲길이다. 서울 시내나 북한산의 봉우리를 볼 수도 없다. 꽤 힘들고 지루한 등정이었다.

물자 이송하고 시신 옮기던 용암문

용암봉 아래있는 용암문. (사진=위성지 여행작가)
용암봉 아래있는 용암문. (사진=위성지 여행작가)

왜 이 코스는 험한 것일까.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북한산성을 한눈에 내려다 볼 수 있는 동장대(시단봉)는 용암문(용암봉)과 대동문 중간 언저리에 있다. 산성의 문은 당연히 한성 방위적 측면에 입지를 고려했을 것이다. 험한 게 이상한 일이 아니다.

숨을 돌릴 겸 계곡의 물가에 앉았다. 물은 투명했다. ! 가재가 놀고 있다. 필자가 산행에서 가재를 만난 것은 처음이다. 자리에서 일어났다. 얼마쯤 올랐을까. 가재를 사진에 담지 못했음을 뒤늦게 깨달았다. 후회가 몰려왔다.

고생 끝에 용암문에 도착했다. 용암봉 아래 위치해 용암문이라고 한다. 우이동으로 통하는 관문 중 하나다. 암문은 성곽에 문루를 세우지 않고 뚫은 문을 말한다. 주로 일반인이나 적들이 알지 못하게 후미진 곳이나 깊숙한 곳에 만들어진다. 주로 전시에 적이 알지 못하도록 비밀스럽게 물자를 이송하거나 시구(시신)를 옮기는 비밀 출입구이다.

하지만 밑에서 본 용암문은 비밀스럽지 않았다. 거대한 바위의 문이었다. 비록 규모는 작고 문루가 없을 뿐이다. 대문에 못지않은 견고한 철옹성이었다. 바위를 가로세로로 끼워 세운 문주(문짝을 끼워 달기 위하여 문의 양쪽에 세운 기둥)의 두께는 1m는 훨씬 넘어 보였다. 문주 위의 성벽은 치밀하고 튼튼했다. 그 위에 성벽이 서 있다. 부동자세로 서 있지 않은 듯하다. 능선을 따라 이리 휘고 저리 틀어져 돌고 있다. 성벽은 북한산 정상부를 돌아 8.4km나 이어진다. 북한산성의 길이가 12.7km라고 하지 않았냐고 반문을 할 것이다. 그렇다 4.3km는 험준한 자연 암석이 만든 천연 성벽이다.

북한산성 길이 12.7km 4.3km 천연 성벽

사진=위성지 여행작가
사진=위성지 여행작가

용암문 성벽 하단부는 온통 이끼가 덮고 있었다. ‘초록 바위. 이는 켜켜이 쌓인 세월을 의미한다. 그런데 성벽을 쌓은 돌이 무척 컸다. 그 시절에 헬리콥터도 없었을 텐데, 어떻게 저렇게 큰 돌을 산 능선까지 옮겼을까? 성벽에 쓰인 돌은 모두 북한산에서 조달했다. 거대한 바위에 정으로 줄을 맞춰 구멍을 냈다. 그곳에 나무를 박았다. 그리고 물을 부었다. 비교적 반듯하게 그리고 비슷한 크기로 돌을 빗을 수 있었다. 그것을 벽돌 쌓듯 어긋물려 정연하게 면과 선을 맞추어 쌓았다. 그러니 성벽을 쌓은 돌 사이의 틈이 벌어지지 않았다. 이것은 남한산성의 축성법과 전형 다른 방식이다. 남한산성 성벽 돌은 북한산성의 것보다 10배가량 작다. 또 돌 사이의 틈새가 벌어져 있다. 그 틈을 작은 돌로 메웠다.

북한산성은 숙종 37(1711)에 축조됐다. 불과 6개월(43~1019) 만에 완공했다. 또 다른 의문이 생겼다. 어떻게 이 험악한 북한산에서 그 짧은 기간에 산성을 완성할 수 있다는 말인가? 잘 믿어지지 않는다. 사정이 있다. 조선은 병자호란에 패배한 뒤 청나라와 강화조약을 맺었다. 일명 정축약조. 여기에는 조선이 이행해야 할 11개 항목이 적시되어 있다. 일종의 항복 조건이다. ‘수성(修城)을 허락하지 않는다는 것도 그중 하나다. 사실 숙종은 즉위하면서부터 북한산성 수축 의지를 드러냈다.

하지만 정축약조를 둘러싼 논쟁으로 결단을 내리지 못했다. 북한산성 수축은 숙종 즉위 37년째에 드디어 이뤄졌다. 그것도 청이 자신의 필요로 허락한 것이다. 숙종은 청이 변심하기 전해 일사천리로 수축을 서둘렀다. 4만 명의 병사와 승려 그리고 백성이 동원됐다. 성벽의 돌을 현지 조달하고 돌도 상대적으로 크게 만든 것도 축성 기간을 단축하기 위한 수단이었는지도 모른다. 어떻든 그렇게 해서 6개월 만에 북한산성은 완성됐다.

대동문에서 바라본 서울시내. (사진=위성지 여행작가)
대동문에서 바라본 서울시내. (사진=위성지 여행작가)

4만명의 병사와백성 동원 6개월만 완성 북한산성.

대동문으로 발길을 옮겼다. 대동문과 보국문이 수리 중이라는 보도를 봤다. 그렇다고 여기서 길을 돌릴 수는 없다. 어떤 공사를 어떻게 하는지 궁금했다. 용암문에서 대동문까지 1.5km. 거리도 가깝다. 길도 순탄했다. 생각할 여유가 생긴 것일까. 문뜩 숙종에게 북한산성은 어떤 의미였을까라는 의문이 들었다.

북한산성 축조는 숙종의 결사 항전 의지였다고 생각한다. 그것은 남한산성과 비교하면 근방 알 수 있다. 남한산성은 물이 있다. 농지도 있다. 반면 북한산 정상을 에워싼 산성에 생존의 조건이 충족될 리가 만무하지 않은가. 북한산성은 남한산성이나 강화산성 같은 피난처가 아니다. 유일한 역할은 군사적 방어기지다. 이는 외침을 당하더라도 한성을 버리지 않겠다’, ‘백성과 함께 한양도성을 지키겠다는 결기를 보인 것이다. 산성 축조보다 분명한 대국민 약속은 없다. 다시는 선대 왕인 선조와 인조가 겪은 망신과 굴욕을 되풀이하지 않겠다는 백성을 향한 약속이었다. 필자가 숙종의 마음을 제대로 읽었는지는 장담할 수 없다.

드디어 대동문이다. 대동문 해체보수 공사가 한창이다. 본체는 파란 철망과 천막으로 쌓여있었다. 문루도 해체되어 볼 수 없었다. 천막 사이로 문주 위에는 오려진 깨끗한 화강암이 보였다. 대동문을 비롯한 성문과 성곽 그리고 임금이 머무는 행궁은 1912년과 1925년 대홍수 때 상당 부분이 유실됐다. 그것을 1996년에 복원했다. 이번은 두 번째 보수 공사인 셈이다. 북한산성의 중심인 행궁터도 발굴작업을 마쳤다. 임금이 기거하고 정사를 돌보는 내·외전과 행랑, 왕실의 족보를 보관한 보각(추정)의 터를 찾아냈다.

구천계곡을 따라 하산했다. 하산길에 조선시대 왕릉 조성에 쓰는 돌을 채석하던 사릉 석물 채석장을 만났다. 사릉은 단종의 비인 정순황후 송 씨의 묘다. 북한산 구천계곡 일대에서 석재를 채취한 사실을 계곡 바위에 새겨 놓았다. 왕실의 채석장이므로 일반인의 석재 채취를 금한다는 내용의 부석금표 바위글씨, 금표 바위글씨 등이 그것이다. 이들 바위글씨는 이곳이 사릉의 석재를 재취했던 채석장임을 증명한다.

정순왕후의 묘지 석비 재료를 채석했던 사릉 채석장. (사진=위성지 여행작가)
정순왕후의 묘지 석비 재료를 채석했던 사릉 채석장. (사진=위성지 여행작가)

조선시대 왕릉 조성 쓰는 돌 사릉석물채석장

이 채석장 앞에는 인종의 셋째 아들 인평대군이 조성한 별장이 있었다. 구천은폭, 송계별업 바위글씨만 남아 있다. 인평대군의 사후 그 후손들이 1680년 역모 사건에 휘말려 축출되어 관리가 소홀해졌다. 거기다가 채석장이 들어서면서 아름다운 풍광이 사라지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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