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박근혜정부 당시 당내 특정 계파에 의한 반대파 공천 숙청(肅淸)과정을 지켜보면서, 아직도 우리나라는 공화국이 아니라 왕정(王政)국가이며, 우리 국회 역시 의회주의자의 전당이 아니라, 닳고 묵은 왕당파의 소굴에 불과하단 생각을 했었다. 어디 대통령만 그런가. 민주주의를 입에 달고 사는 정당도 당내 반대파를 용납하지 않는다. 당내 비판을 허용하지 않는 더불어민주당 극성지지자들의 행태를 보라. 전화와 문자 따위를 동원한 폭력적 행위도 서슴지 않음은 물론 민주주의를 위한 양념으로 포장하기도 한다. 김대중, 노무현의 정신을 잇는다는 민주정당의 모습이 과연 저런 것인지 참으로 씁쓸하다.

과거 그 어떤 정부에서건 대통령은 과도한 권력에 스스로 짓눌려 망가졌고, 국무총리는 허수아비 노릇을 하다 존재감 없이 사라져 갔다. 지난달 28일 더불어민주당 이재명 대표는 교섭단체 대표연설에서 개헌을 이야기하면서 ‘4년 중임제를 주장했다. 생뚱맞고 뜬금없다. ‘20년 장기 집권을 호언장담(豪言壯談)하던 정당에서 할 이야기는 아니다. 그러니 자기가 8년 하고 싶어 잔꾀를 부린다.’는 비판이 나오는 것은 어쩌면 당연하다. 지금은 권력의 기간이 아니라 무게를 덜어내는 일과, 각각 선출된 입법기관인 국회의원이 당 대표라는 이름의 1인에 의해 휘둘리는 반민주적 정당 구조를 해체하는 일이 더 시급하기 때문이다.

이제는 ‘4년 중임제 개헌이 아니라 의원내각제 도입을 논의해야 할 때이며, 당 대표제가 아니라 원내정당 본연의 모습을 되찾는 일에 몰두해야 당연하다. 그런데 그조차도 이미 낡고 구리다는 것이 시대의 속도가 가하는 채찍이다. 모든 당원과 국민의 의견을 실시간으로 수렴할 수 있는 과학적 시스템 운용이 가능하고, AI를 이용한 최적의 솔루션을 제공할 수 있는 정치가 가능해졌기 때문이다.

따라서 현재의 중앙당 시스템을 파괴해 재설계하고, 생산성과 효율성이 빵점이라고 지탄받는 국회도 ‘AI 국회로 만들라는 것이 시대의 요구다. 실제로 현재 우리 헌법이 규정하고 있는 국회의원의 임무인 입법, 예결산 심사, 국정감사 등은 빅데이터를 기반으로 하는 AI가 월등한 속도와 뛰어난 결과물로 대체 가능하다는 것이 과학과 산업계의 의견이다.

누가, 어떻게 통치할 것인가?’, ‘자유의 한계는 어디까지인가?’와 같은 정치체제의 근본적인 질문을 탐구하는, 스티븐 스미스(Steven B, Smith)의 책(정치철학)을 읽다 보면, 대의(代議)민주주의 시스템의 소멸시효에 의문이 절로 생긴다. 지금과 같은 기술발전 속도라면, 모든 국민의 의사(意思)를 실시간으로 확인할 수 있는 시스템의 구현은 식은 죽 먹기보다 쉬울 것이다.

결국 지금의 대의민주주의는 직접민주주의로 대체될 가능성이 농후하다고 볼 수 있다. 그런데 역설적으로, 진정한 공포는 그런 시스템이 가능하게 한 기술 때문이다. 만약 인간에 의해 구현된 기술이 국민 개개인이 직접 표현하는 비밀스러운 의사까지도 모두 알게 된다면, 그것은 새로운 빅 브라더(big brother)에 의한 공포의 시대가 올 수 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비밀투표는 사라지고 사실상 공개투표가 된다면, 도리어 민주주의는 시궁창에 처박힐지도 모른다.

인간의 생각과 양심의 비밀공간이 수시로 열람되고 통제될 수 있는 세상은 생각만 해도 두렵고 무섭다. 보다 강력한 보안기술, 비밀의 봉인(封印)을 풀 수 없도록 하는 기술 역시 이내 다른 새로운 기술에 의해 무력화될 것이다.

지금 우리 국회만 보더라도, 전자투표가 도입된 지금도 인사(人事)와 관련된 안건은 장막 뒤에서 의원들이 직접 수기(手記)로 의사를 표기한다. 개인의 표결내용을 확인할 수 없도록 하는 아날로그 방식이다. 어쩌면 이런 방식이 정보의 유출, 생각의 해킹을 차단하는 가장 강력한 보안장치일 런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기술을 토대로 한 직접민주주의 방식을 새롭게 대체 또는 보완할 수 있는 그다음의 시스템은 과연 어떤 것일까? 어차피 인간이 자주적(自主的)으로 판단한 것으로 여기는 여러 가지 결정 역시 신문과 방송, 표본과 통계의 조작 등의 과정을 거치면서 오염된 것이다. 100% 순수한 자기결정이란 사실상 존재할 수 없다. 대의민주주의보다 민의(民意)를 더 충실히 담아낼 것이라 여겨지는 직접민주주의 역시 그만큼 허술한 시스템일 수밖에 없다.

결국 우리가 새롭게 구축해야 할 국가운영 시스템이나 정치체제는 과연 어떤 것이어야 하나? 어쩌면 조만간 인류는 AI의 꼭두각시가 되어 그들의 종노릇이나 하며 살지도 모른다. 혹성(惑星)이 아닌 지구에서, 그것도 생명체가 아닌 기계라는 존재에게 부림을 당하는 인간의 종말적 미래는 과연 상상의 영역에만 머물 것인가. 사람이 사람답게 보다 자주적으로, 보다 민주적으로 이 지구라는 별에서 평화롭게 살아갈 체제는 과연 어떤 것일까. 자잘한 영역의 보살핌과 고민도 필요하겠지만, 우리 스스로 새로운 미래에 적합한 체제를 탐구하고 현실 속에서 그것을 구현해 내려는 노력이 절실히 필요하다.

그런데도 한가롭게 4년 중임제를 대안으로 거론하는가 하면, 대통령에게 국가의 미래를 다 떠넘긴 체 손가락질로 날을 새는 우리의 현실을 보노라면 답답하다. 대통령은 물론 국무총리와 국무위원, 국회의원 모두 나라와 국민을 위해 눈을 더 크게 뜨고, 보다 정교(精巧)하고 깊게 사고하고, 진심으로 서로 포용하고 협력하지 않으면 대한민국의 미래는 어둡고 우울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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