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주부터 성북구 탐방을 시작한다. 성북구는 지붕 없는 박물관이라고 불린다. 그 정도로 역사·문화·예술 자원이 풍부한 고장이다. 세계문화유산인 정릉과 의릉, 수많은 국보급 문화재를 소장한 간송미술관, 경국사·미타사·보문사 등 고찰은 물론 근현대를 대표하는 수많은 문화예술인의 체취가 살아 있다.

정릉의 산능, 능앞의 장명석은 고려 능앞의 그것과 동일한 형태로 역사적가치가 높다. (사진=위성지 여행작가)
정릉의 산능, 능앞의 장명석은 고려 능앞의 그것과 동일한 형태로 역사적가치가 높다. (사진=위성지 여행작가)

세계문화유산, ‘지붕없는 박물관국보급 문화재 '즐비'
권력 무상, 인생사 새옹지마에 답답함까지

첫 탐방은 성북구를 대표하는 문화재 정릉이다. 조선 초대 왕비인 태조 계비, 신덕왕후의 능이다. ‘최초의 조선 왕릉이다. ‘최초란 역사성은 신성하고 존엄한 것이다. 하지만 정릉은 최초라는 최상급 수식어가 무색할 정도로 시련을 겪었다. 아픈 역사를 가진 현장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얄팍한 역사 지식에 필자는 스스로 감정이입이 됐다. 정릉 가는 길은 먹먹했다. 정릉역(북한산우이선)에서 아리랑 시장을 지나 정릉으로 갔다. 1km 남짓의 거리다. 비탈길과 가파른 계단, 고불고불한 골목, 빽빽이 늘어선 낡은 양옥 그리고 전깃줄이 얼키설키 매달린 전봇대……. ‘북한산 동네풍경이다. 그 꼭대기에 정릉이 있다. 정릉의 주차장도 협소했다. 기껏 5~6대 주차할 수 있는 노상주차장이 전부다. 정릉과 정릉동 사람은 고통의 서사를 공유하고 있는 듯하다.

정릉의 ‘'아픈 역사 속으로...’

정릉의 아픈 역사 속으로 들어갔다. 세계문화유산 등록비와 정릉 배치도가 첫눈에 들어왔다. 금천교를 지나자 홍살문에서 정자각까지 이어지는 제례 공간은 널찍했다. 제례 공간인 정자각을 비롯해 수라간, 수복방, 비각 등 전각을 차례로 둘러보았다.

그런데 릉은 입구부터 여느 왕릉과는 다른 느낌이다. 정문에서 제례 공간 시작점인 홍살문이 눈앞에 보일 정도로 가깝다. 능침도 작은 듯했다. 무엇보다 생소한 느낌을 준 것은 참도(왕릉을 참배할 수 있도록 홍살문에서 왕릉 앞의 정자각에 이르기까지 만든 길, 향도+어로). 참도가 자 형태로 접혀 있다. 그것도 1960년대 바닥 남아 있던 몇 개의 돌을 바탕으로 고증을 걸쳐 복원됐다. 어느 왕릉의 참도도 이런 모양은 없다. 일직선으로 되어 있다. 그런데 정릉은 왜 이런 지경에 이른 것일까. 단지 지형적 문제를 해결하려는 방법이었을까. 이에 동의하지 않는 학자도 적지 않다.

정릉의 홍살문과 정자각 그리고 참도가 일직선상에 있지 않다. (사진=위성지 여행작가)
정릉의 홍살문과 정자각 그리고 참도가 일직선상에 있지 않다. (사진=위성지 여행작가)

아무래도 태종 이방원이 의심받고 있다. 애초 정릉은 덕수궁 옆 지금 영국대사관 자리에 있었다. 정릉이라는 이름도 왕릉이 정동에 있었기에 붙여진 이름이다. 태조 이성계가 신덕왕후를 각별하게 여겼다. 신덕왕후가 41세로 생을 마감하자 태조는 나라를 세우는 날까지 오직 부인의 내조가 참으로 많았다라면 비통해했다. 그런 마음은 사후에도 이어졌다. 자신의 곁에 두기 위해 궁궐에 가깝게 능을 섰다. 또 명복을 빌기 위해 온갖 정성을 다했다. 암자를 세워 향차를 바쳤다. 신덕왕후의 영혼을 달래기 위해 절을 지었다.

태조와 신덕왕후의 사랑은 설화로 남아 있다. 신덕왕후는 버들잎 여인으로 불린다. 이성계가 어느 날 사냥을 다녀오던 길이었다. 목이 타던 이성계는 우물가의 아가씨에게 물 한잔을 청했다. 그는 버들잎을 물에 띄워 주었다. 신덕왕후의 지혜와 고운 마음을 읽은 태조는 그녀를 두 번째 부인으로 맞았다. 그런 설화 때문인가. 정릉 주변에는 버드나무 보호수가 꽤 많다. 정릉 안에 이곳저곳, 정릉으로 들어오는 골목, 흥천사의 입구 등 수백 년 된 버드나무가 수백 년 전의 애틋한 사랑을 소환하고 있다.

신덕왕후와 이방원, ‘정치적 동지에서 적으로

태조가 죽자 상황은 급변했다. 정릉은 갈기갈기 찢기고 밟혔다. 조선 3대 왕으로 등극한 이방원에 의해서였다. 역성혁명의 공을 세운 자신과 자신의 어머니(신의왕후)를 홀대한 데 대한 앙갚음이었다.

태조가 정릉에 묻히고 싶어 했다. 태종은 수용하지 않았다. 대신 태종은 신덕왕후의 정릉을 파괴했다. 왕후의 자격을 박탈했다. 후궁으로 격하시켰다. 능을 이전, 양주로 옮기도록 했다. 그래서 정릉동으로 정릉이 옮겨진 것이다. 봉분을 깎아 무덤 흔적을 없앴다. 정자각을 헐고 그 목재를 중국 사신의 접대 장소인 태평관을 지었다. 병풍석은 태종 10년 광통교 복구공사에 썼다. 그 자리를 지나는 사람이 그 돌을 밟고 지나도록 한 것이다. 그 뒤에도 무덤은 몇 번 더 이장됐다. 그녀의 묘가 어디에 있는지 모를 지경이었다.

정릉과 정릉 주변에 수백년된  버드나무 보호수가 유난히 많다. (사진=위성지 여행작가)
정릉과 정릉 주변에 수백년된 버드나무 보호수가 유난히 많다. (사진=위성지 여행작가)

원래 신덕왕후와 이방원의 관계는 나쁘지 않았다. 아니 정치적 동지였다. 이성계의 등극시키기 위해 협력관계를 유지했다. 역성혁명도 그들의 공로를 인정하지 않고 설명할 수 없다. 두 사람이 함께 고려 왕조의 개혁에 힘쓰던 정몽주를 제거했다. 신덕왕후는 1392년 고려 공양왕이 폐위되자 현비(顯妃)로 책봉되어 조선의 첫 왕비가 됐다.

그런 두 사람 사이가 틀어졌다. 아니 앙숙이 됐다. 세자책봉을 둘러싼 권력투쟁 때문이다. 당시 조선 조정의 분위기는 이방원이 책봉 받을 가능성이 컸다. 배극렴과 조준 등 중신은 시국이 평온할 때는 적자를 세우고 세상이 어지러울 때는 공이 있는 자를 세워야 한다라고 주장했다. 이방원을 염두에 둔 고언이었다.이를 눈치챈 신덕왕후는 태조에게 자신의 소생을 세자로 삼아달라고 간청했다.

태조는 가장 친한 벗이자 정치적 동반자였던 신덕왕후의 청을 물리칠 수 없었다. 원비인 신의왕후 사이에 장성한 여섯 아들을 제치고 신덕왕후의 둘째 아들 방석을 세자로 책봉했다. 방석은 당시 10살이었다. 신권정치를 주창하던 정도전도 이에 동조했다. 하지만 왕자의 난으로 자신 핏줄로 대업을 이으려던 신덕왕후의 꿈은 산산이 부서지고 만다. 권력투쟁의 희생양이 되어 구천을 떠돌게 됐다.

그의 명예가 회복된 것은 그가 죽고 273년이 지난 현종 때다. 그것도 다소 우연한 과정을 통해서다. 당시 능참봉은 군역을 면제했다. 신덕왕후의 일가의 한 능참봉이 군역을 피하려고 자신이 신덕왕후의 묘소를 돌봤음을 밝혔다. 묘연했던 신덕왕후의 묘소를 찾게 됐다. 1669현종이 송시열의 상소를 받아들여 신덕왕후를 왕비로 인정했다. 신덕왕후의 원혼이 비로소 영면하게 됐다. 이때 정자각과 재실을 다시 짓고 정릉도 재정비됐다. 고종 때 수라간, 수복방, 비각이 세워져 오늘날 정릉의 모습을 갖추게 됐다.

세계문화유산 조선왕릉 '철판다리아쉬움

정릉의 재실. (사진=위성지 여행작가)
정릉의 재실. (사진=위성지 여행작가)

아니다. 오늘날의 모습은 불필요한 구조물로 본래 정릉의 모습을 훼손하고 있었다. 금천교 옆에 또 다른 금천교가 있다. 속세와 성역의 경계 역할을 하며 사악한 기운이 들어오지 못하게 하는 신성한 유물이다.

그런데 금천교에서 불과 5m 정도 떨어진 곳에 철판 다리가 있었다. 관람객 편의를 위한 서비스 정신이 발현된 것인가. 어처구니없다. 그것도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된 조선 왕릉에 이런 불필요한 시설물로 문화재를 훼손해서는 안 된다. 더 기가 막힌 것도 있다. 능침과 콘크리트 건물이 마주하고 있다. 화장실이다. 신덕왕후가 용변 보는 후손을 바라고 보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아연하다. 누가 이런 아이디어를 낸 것인가.

정릉을 돌아보면서 많은 생각이 든다. 권력 무상, 인생사 세옹지마거기에 답답함이 더해졌다. 답답함을 안고 신덕왕후의 원찰(願刹·죽은 사람의 위패를 모셔놓고 명복을 비는 사찰)인 흥천사와 봉국사로 자리를 옮겼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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