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즈 트러스 영국총리가 취임 44일 만에 사임했다. 영국 내각책임제 사상 최단명 총리 기록인 119일을 경신했다. 지난달 23일 리즈 트러스 총리는 1972년이후 가장 큰 폭의 감세 정책을 발표했다. 향후 5년간 450억 파운드(71조 원) 규모의 감세를 하겠다는 내용이었다. 트러스 총리의 감세안에는 구멍 난 재정을 어떻게 메울지에 대한 내용은 없었다.

금융시장은 트러스 총리의 감세안을 보고 영국 정부가 결국 구멍 난 재정을 메우기 위해 국채를 대량 발행할 것으로 받아들였다. 영국 국채 신뢰도가 급전직하했고, 국채가격이 폭락했다. 국채가격 폭락은 금리 상승과 파운드화 가치폭락으로 이어졌다. 영국의 심장인 런던 금융가는 초토화됐고, 결국 총리의 사임으로 이어졌다.

트러스 총리는 애초에 감세안이 문제가 되고, 파운드화가 떨어지고, 영국발 금융위기가 닥쳐온다고 했을 때도 사임할 생각이 없었다. 감세안을 철회하지 않겠다고 고집을 부렸고, 최측근 재무장관을 사임시키면서까지 자리를 지키려 했다. 트러스 총리가 이렇게 고집을 부린 것은 영국 국민보다 16만 명의 보수당 당원들 비위만 맞추면 된다고 봤기 때문이다.

이번 사건의 근본적인 원인은 트러스 총리가 40년 전에 운명을 다한 대처리즘을 신봉하는 신자유주의 경제철학을 추종했기 때문이다. 보수당의 기득권 당원들은 감세안에 적극적이었고, 일부에서는 상속세 폐지까지 주장했다. 트러스 총리는 이런 기득권 지지층만 바라보는 경제 정책을 고집하다 총리직에서 물러나게 되었다.

영국의 더 타임스는 트러스 총리가 유력해지자 사람들은 그녀를 조금은 기묘하고, 이상하게 공허하며, 잠재적으로 위험하다고 생각한다. 정부는 불안정한 리더가 해악을 끼치지 않도록 리더를 제어하기 위해 노력할 것이고, 그 과정에서 품위를 잃을 것이다.’라는 칼럼을 실었다. 남의 나라에서 그 나라 지도자를 놓고 평가한 말인데, 묘한 기시감이 있다.

불과 몇 달 전 정치적으로, 경제적으로 선진국 문턱을 넘었다고 믿었던 우리도 지금 이상하게 기묘하고, 공허하며, 위험한 권력을 마주하고 있다는 느낌을 강하게 받는다. 지난 대선에서 우리 국민은 현 대통령이 귀담아들을 구석이 있다고 믿었고, 시대의 과제를 해결할 능력이 있다고 믿었다. 물론, 지금은 많은 사람이 그때 자신의 결정을 의심하고 있다.

영국은 트러스 총리가 자신의 실수에 대해 사과도 하고, 결국 책임을 지고 물러나게 되었지만, 우리 같은 대통령제 국가에서는 거의 불가능한 일이다. 박근혜의 사례가 있어도 그렇다. 영국은 트러스 총리보다 덜 위험하고, 덜 공허하며, 덜 기묘한 리더를 갖게 될 가능성이 크지만, 우리는 4년 동안 기묘하고, 이상하고, 위험한 권력과 살게 될 운명이다.

다행이라면, 우리나라 대통령제는 5년 단임제이다. 5년 임기 뒤에는 안 보고 살 수 있다는 것만큼은 가냘픈 희망이며, 큰 위안이다. 이 지점에서 대통령제의 단점은 임기제의 장점으로 상쇄할 수 있다. 어떤 제도도 완벽할 수 없지만, 나름의 장점이 있다는 사실이 새삼 와 닿는다. 제도가 아니라 늘 사람이 문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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