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0년 수도서울탐방은 성북구에서 동대문구로 이어진다. 동대문구는 조선의 한성 도성 근접 지역이다. 당시 도성과 가깝다는 지리적 이점은 곧 경제적·문화적 수혜를 의미한다. 청량리는 조선 최대의 왕실 묘역인 동구릉으로 가는 능행의 중간 기착지다. 또 농경 제례의 상징인 선농단과 적전(왕이 직접 농사를 짓는 농지)이 있다. 왕의 행차는 교통의 발전을 의미한다. 교통의 발전은 상업의 발달로 이어진다. 전국 최대의 전통시장이 들어섰다. 그뿐만 아니라 약령시장, 나무 시장 등 특화된 시장이 발달했다. 동대문구 곳곳에서 차곡차곡 쌓인 시간의 흔적을 찾을 수 있다. 동대문구는 역사적 경험을 토대로 새로운 문화를 만들어가고 있다. 한양의 경계 지역인 동대문구가 전통과 현대가 어우러진 역사와 문화도시로 변모해 가는 과정을 쫓아가 본다.

국립산림과학원 정문과 홍릉숲 배치도. (사진=위성지 여행작가)
국립산림과학원 정문과 홍릉숲 배치도. (사진=위성지 여행작가)

전통현대가 어우러진 역사와 문화의 도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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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나라 산과 숲에 남다른 애정을 가졌던 일본인 다쿠미

첫 번째 코스는 홍릉이다. 청량리역 2번 출구로 나와 15분 정도 홍릉로를 따라 직진하면 국립산림과학원이 나온. 과학기술로 산림 가치를 창출하는 연구기관이다. 연구동을 제외하면 산림연구 시험지다. 우리나라 최초의 임업시험지(공식 명칭 : 홍릉시험지)이다. 1922년에 만들어졌으니깐 올해로 그 역사가 꼭 100년이 됐다. 얼마 전까지 홍릉수목원으로 불렸다. 지금도 홍릉숲이라고 친숙하게 불리는 도심의 숲이다.

# 우리나라최초 임업시험지 홍릉숲

나무 갈림 막 모양의 정문을 통과했다. 나무의 세상에 들어왔다. 도심에 이처럼 울창한 숲이 있다는 게 놀랍다. 사실 도시에서 나무로 살아간다는 것은 고통스러운 일, 아니 위험한 일일지도 모른다. 홍릉숲에 있는 나무는 행복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홍릉숲에는 서로 이어지는 5개의 산책길(천년의 숲길, 황후의 길, 숲속 여행길, 천장마루길, 문배나무길)이 있다. 한 바퀴 도는데 넉넉잡고 1시간 30분이면 충분하다.

천장산 기슭으로 이어지는 천장마루길(낙우송과 소나무길)로 들어섰다. 첫눈에 색바랜 10여 그루의 메타세쿼이아가 눈에 들어왔다. 메타세쿼이아는 대표적 낙우송이다. 한 줄로 정렬해 있다. 모두 나무의 키도, 둘레로 비슷하다. 왜 그럴까. 메타세쿼이아도 자신의 생존과 번식을 위해 적자생존의 전략으로 살아간다면 저런 일이 벌어질 수 있을까. 광릉수목원(국립수목원) 해설사로 봉사하는 지인(윤인호)에게 전화했다. ! 놀랍다. 메타세쿼이아는 뿌리가 서로 연결되어 있어서 서로 영양분을 나눠 갖는단다. 모두 함께 살아가기 위해서 나눈 영양의 대가가 고른 키와 몸집이라는 사실이 신기하다.

수목원내 모습. (사진=위성지 여행작가)
수목원내 모습. (사진=위성지 여행작가)

# 다섯 개의 산책길 천정마루길부터 문배나무길까지

문배나무길도 들렸다. 문배나무가 우리나라에서 처음 발견되어 학계에 보고되어 이런 이름이 붙었다. 홍릉수목원의 문배나무는 우리나라에 두 개밖에 없는 기준표본목이다. 기준표본목이란 다른 곳에서 발견된 비슷한 나무에 동일성 여부를 가름하는 중요한 나무다. 만일 해외에서 비슷한 나무를 발견했다면 문배나무인지 아닌지를 홍릉수목원에서 판정한다. 다른 하나의 기준표본목은 광릉풀부레나무다.

그런데 숲속의 여행길에서 만난 초본식물(줄기가 연하고 물기가 많으며 꽃이 피고 열매를 맺은 뒤에 전체가 말라죽거나 땅 위 줄기만 말라 죽는 식물)한국적인 이름은 뭔가. 꿀풀, 큰개현삼, 쥐개풀, 세잎꿩의비름, 개미자리, 뱀무, 큰애기나리, 넓은잎외잎쑥, 큰가지수염, 놋저가락나물, 도꼬로마, 매듭풀, 긴개싱아, 쥐오줌풀, 노루오줌, 미치광이풀, 톱풀, 은꿩의다리……. 이름만 들으면 모두 우리나라에만 자생하는 기준표본목이어야 할 것 같다. 이 역시 나무와 풀에 관한 연구가 늦은 데서 생긴 아픔일지 모른다.

참 이상하다. 수목원에 오면 숲이 아니라 나무를 보게 된다. 나무 하나하나에 눈이 간다. 옷을 벗은 나무가 보였다. 나무의 몸매가 드러난다. 훤칠하고 늘씬한 나무 기둥과 하늘로 뻗은 가지 그리고 거미줄 같은 유연한 가지까지 속속히 보인다. 나무의 몸매만 봐도 대충의 연륜을 짐작할 수 있다. 적어도 수십 년은 된 나무들이다.

<나는 풍요로웠고 지구는 달라졌다>, <랩걸>을 쓴 생물학자 호프 자런은 식물은 우리처럼 공간을 이동하면서 여행하지 않는다. 대신 그들은 사건을 하나하나 경험하고 견디면서 시간을 통한 여행을 한다라고 말했다. 홍릉의 나무는 역사를 기억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6·25전쟁, 4·19혁명, 광주민주화항쟁, 88서울올림픽, 2002 한일월드컵 그리고 2022년 카타르 월드컵 대회 16강 진출……. 이런 생각을 하면 지나는데 그루터기로 탁자와 의자를 만든 쉼터가 나왔다. 황후의 길에 있는 홍릉터앞이다.

명성황후 초상화. (사진=위성지 여행작가)
명성황후 초상화. (사진=위성지 여행작가)

# 홍릉 무텀터 19~20세기 명성황후 비극사

이곳은 일제에 의해 시해당한 명성황후의 묘소가 있던 자리다. 1919년 고종이 승하하면서 홍릉을 경기도 남양주로 이장해 부부합장이 이뤄졌다. 1922년 홍릉이 있던 빈터에 임업시험장이 조성되면서 우리나라 최초의 수목원이 됐다. 홍릉수목원으로 불린 이유도 바로 이 무덤터 때문이다.

이 무덤터는 우리의 19세기 말~20세기 초의 지난했던 비극사가 고스란히 담겨 있다. 189510월 새벽 명성황후는 일본 로닝(浪人)에 의해 시해됐다. 시신은 경복궁 건청궁 옆 녹산에서 불태워졌다. 전대미문의 치욕적 사건이었다. 하지만 황후의 죽음을 세상에 알릴 수도 없었다. 열강의 침탈 앞에 무력한 조선왕조의 민낯이었다. 오히려 일본의 강요로 명성황후의 죽음을 발표해야 했다. 애당초 동구릉에 왕비의 능을 조성하려 했다. 그러나 이런 와중에서 능의 명당 공방이 벌어져 장례조차 치르지 못했다. 사망한 지 21개월 만에 홍릉에 묻혔다. 홍릉에도 22년밖에 머물지 못했다. 1919년에 고종황제가 승하하시면서 비운에 간 명성황후는 경기도 남양주에 있는 홍릉으로 합장됐다.

# 홍릉.광릉 수목원 조성 일조 일본인 다쿠미
 

망우리공원 묘지에 모셔진 아사가와 다쿠미의 무덤. (사진=위성지 여행작가)
망우리공원 묘지에 모셔진 아사가와 다쿠미의 무덤. (사진=위성지 여행작가)

홍릉에는 명성황후의 절절한 사연 이외에도 또 다른 이야기가 있다. 오늘날의 홍릉수목원이 있게 한 일본인 아사가와 다쿠미(淺川巧). 왕비의 능이 옮겨진 뒤 1922년 북아현동에 있던 임업시험소(1913년 출범)가 홍릉으로 이전됐다. 이때 다쿠미는 산림과 임업연구원으로 부임했다. 그가 사실 홍릉수목원과 광릉수목원(국립수목원)을 만드는 데 크게 일조한 사람 중 하나다. 그의 일대기를 다룬 영화(백자의 사람)도 만들어질 정도 잘 알려진 인물이다.

당시 우리나라 산은 국가 소유다. 하지만 관리가 안 되면서 주인 없는 산(無主空山)이 됐다. 땔감이나 건축 자재로 마구 채취했다. 조선의 많은 산은 민둥산이 됐다. 조선을 강제 병합한 일본은 산의 관리라는 명목으로 산림의 소유를 구분했다. 그리고 세금을 징수했다. 동양척식주식회사를 만들어 조선의 토지와 자원을 파악했다. 이를 일본인에게 나눠주거나 되팔았다. ·임업을 발전시킨다는 명목이었다.

하지만 그것은 구실일 뿐이었다. 조선의 자원을 약탈하기 위한 핑계였다. 그런 와중에서도 다쿠미는 달랐다. 우리나라 산과 숲에 남다른 애정을 가졌다. 한반도 산림녹화에 애썼다. 잣나무의 노지 발아법을 개발해서 농민에게 알렸다. 한반도의 희귀식물에 관한 연구도 했다. 천연기념물 지정을 토대를 마련했다. 그는 죽어서도 조선의 흙이 됐다.

# 홍릉숲 자랑 130년 수령의 반송 나무

반송나무. (사진=위성지 여행작가)
반송나무. (사진=위성지 여행작가)

그가 얼마나 홍릉숲을 사랑했는지를 보여주는 증거가 있다. 홍릉숲의 자랑인 최장수 나무 반송도 그가 홍파초등학교에 있던 것을 홍릉에 옮겨심은 것이다. 수령이 무려 130년이다. 그의 이 같은 노력은 홍릉숲 조성의 씨앗이 됐다. 홍릉숲에는 총 1572,035, 2만여 개체의 식물(2021년 현재)이 살아가고 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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