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릉숲(홍릉수목원)을 나왔다. 자연의 숨결이 가득한 홍릉숲은 고요했다. 필자의 마음은 폭풍이 일었다. 역사를 알기 위해서 그 시대로 돌아가야 한다. 역사적 인물을 이해하기 위해서 역사 주인공이 되어야 한다. 조선 말기로 돌아갔다. 명성황후가 되어 본다.

영휘원. (사진=위성지 여행작가)
영휘원. (사진=위성지 여행작가)

대한제국 마지막 황태자 영친왕의 친모를 만나다
- 만해 한용운 선생 일제강점기에 청량사에서 항일투쟁

500년의 왕업이 백척간두에 섰을 때, 국정의 난맥과 혼란은 거듭됐다. 외세는 그 틈을 노려 부당한 압박을 강화했다. 국가 위기는 확대 재생산된다. 희망이 없는 나라 지도자의 슬픔과 비통함을 어찌 짐작이나 할 수 있을까. 그것도 국모로서는 더 말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그것은 그렇다고 치자. 수많은 악행을 저지르고 외세 개입을 자초했던 명성황후에 대해 그토록 애잔한 감정이 드는 이유는 무엇인가. 상징(국모)을 잃었다는 상실감 때문이 아닐까. 그것도 일본에 의해서. 상실감은 고통 공감을 낳았다. 상실감은 자기보다 더 사랑하는 사람을 잃었을 때 가장 강하게 느끼는 법이다. 고통의 마지막 안식처는 기원이다. 나무 한 그루 밑에 덜렁 하나 있는 홍릉터에 고개를 숙였다.

# 조선말기 비운의 역사 목도한 고종의 여인

조선 말기 비운 역사를 지켜본 또 다른 고종의 여인이 있다. 바로 고종의 후궁인 순헌황귀비 엄씨다. 대한제국 마지막 황태자인 영친왕의 친모다. 홍릉숲 근처 순헌황귀비 엄씨의 무덤, 영휘원이 있다. 그 곁에는 영친왕의 두 살 난 아들, 그러니깐 순헌황귀비의 손자인 이진의 묘(숭인원)가 있다.

홍릉숲을 나와 청량리역 방향을 걸었다. 불과 수 백미터 떨어져 있다. 영휘원과 숭인원은 본래 홍릉에 있던 묘역이었다. 홍릉이 조선 왕실의 가족 묘지다. 100년 전 홍릉은 지금의 홍릉숲보다 약 4배 정도 컸다. 무려 축구장 220개를 합친 면적이었다. 홍릉(명성황후의 능)1919년 고종과 합장하기 위해 남양주로 이장하면서 홍릉의 규모도 축소됐다. 한국과학기술원, 국방연구원 등 같은 국가기관에 홍릉숲에 들어섰다. 6·25 전쟁 피난민이 정착했다.

묘역에 도착했다. 주차장은 텅 비어 있었다. 휴무일로 착각했다. 다행히 그렇지는 않았다. 작은 역사적 사건 그리고 유물 한 조각도 역사에 질문을 던진다. 역사에 관한 질문은 통해 즐거움을 누릴 수도 있고 오늘을 진단해 볼 수도 있다. 더 많은 사람이 역사의 현장을 찾는다면 좋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영휘원의 비문. (사진=위성지 여행작가)
영휘원의 비문. (사진=위성지 여행작가)

묘역에 들어섰다. 하늘이 감춰놓은 명당이라는 천장산의 기운이 느껴졌다. 묘역이 작았다. 입구에 들어서자 두 개의 능이 한눈에 들어왔다. 마치 동원이강릉(두 개 이상의 봉분이 각각 다른 언덕에 배치된 형식)처럼 보였다. 흔히 볼 수 있는 Y자 형태도 아니다. 또 참도가 각각 있다. 영친왕을 낳은 후비라서 그런지 잘 정돈되어 있다. 정자각, 비석, 장명등, 향로석, 석상, 망주석, 석인상 등 격식을 갖추 황후의 능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런데 다른 왕릉과 다른 야릇한 신비로운 분위기가 느껴진다. 국운이 쇠해가던 시대의 무덤이라고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잘 가꿔져 있기 때문일까. 아니면 순헌황귀비 엄씨에 대한 고종의 배려와 사랑을 느낄 수 있기 때문일까.

# 시위상궁 엄씨 명성황후의 빈자리 채운 여인

황귀비 엄씨는 명성황후의 시위상궁이었다. 황후의 상궁이 어떻게 황제의 승은을 입을 수 있을까. 임오군란이 계기가 됐다. 명성황후의 개방정책에 대한 불만은 임오군란이 불렀다. 궐기한 군중은 명성황후를 죽이려고 궁궐까지 진입했다. 명성황후는 간신히 탈출했다. 51일간 피난 생활을 했다. 명성황후의 빈자리를 시위상궁 엄씨가 채웠다. 고종의 아픈 마음을 잘 헤아려줬다. 고종 역시 자신이 가장 힘든 시기에 곁에서 있던 여인을 잊지 않았다. 엄씨는 결국 고종의 승은을 입었다. 명성황후의 배신감은 상궁 엄씨를 용서하지 않았다. 죽이려고 했다. 하지만 고종은 죽이지만은 말아 달라고 간청했다. 결국 궁궐 밖으로 쫓겨났다.

그가 다시 궁궐로 돌아왔다. 을미사변으로 명성황후가 시해되자 고종이 다시 엄씨를 찾은 것이다. 고종을 직접 모시며 상궁의 최고위직인 지밀상궁이 되었다. 을미사변 이듬해인 1896년에 아관파천에 동행했다. 아니 아관파천의 주역이었다. 고종이 러시아 공사로 가던 정동길은 최근 고종의 길로 복원됐다. 엄 상궁은 러시아 공사관에서 8개월을 모셨다. 이때 엄씨는 고종의 후궁이 아니라 정치파트너였다. 1년 후 영친왕을 출산하며 귀인에 봉해졌다. 사실상 황비 역할을 했다.

그러나 그는 계비는 되지 못했다. 엄씨의 묘가 능이 아니고 원이 된 이유다. 엄씨의 신분이 문제였다. 평민 출신은 절대 왕비가 될 수 없다는 원칙이 있다. 거기다가 엄씨는 후궁이었다. 이 역시 조선 왕가에서 허락되는 일이 아니었다. 물론 고종은 계비로 삼고자 했다. 신하들은 엄씨의 신분을 이유로 극구 반대했다. 이 논쟁 역시 자신들의 권력 기반의 상실할 것을 두려워하며 세운 명분이었을 뿐이었다.

# 순헌황귀비 양정.진명.숙명학교 설립

영휘원 경내 순헌황귀비의 묘. (사진=위성지 여행작가)
영휘원 경내 순헌황귀비의 묘. (사진=위성지 여행작가)

순헌황귀비는 그런 것에 아랑곳하지 않았다. 허물어져 가는 나라를 위해 안간힘을 다했다. 근대 교육기관 설립에 전력을 다했다. 그가 세운 학교가 바로 양정·진명·숙명학교 등이다. 그에 대한 고마운 마을 기리기 위해 숙명여대 앞에는 그의 이름 딴 순헌황귀비길이 있다. 영휘원에는 천연기념물이었던 산사나무가 있다. 일명 영휘원 산사나무. 2012년 태풍(볼라벤)을 견디지 못하고 죽었다. 그런데 죽은 나무 옆에 자식 산사나무가 자라고 있다. 마치 양정·진명·숙명학교의 후학이 인류의 주역으로 자라듯이.

아관파천과 관련한 야사 속 에피소드는 아직도 전해 내려온다. 명성황후를 시해한 일본은 고종에 대한 감시와 압박의 강도를 더해 왔다. 이를 보다 못한 엄 상궁은 친러 독립운동가였던 이범석 장군과 내통한 뒤 고종을 러시아 공관으로 모시기로 했다. 일본 경찰의 눈을 피하려 궁궐 내에서 가마를 준비했다. 물론 고종도 모르게 한 일이다. 상궁의 신분으로 궁궐에서 가마를 탄다는 것은 목숨을 내놓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목숨을 건 계략은 성공했다. 고종은 엄 상궁과 같은 가마를 타고 궁궐을 벗어났다는 게 매천야록에 전해진다.

옛 홍릉터에 절이 있었다. 왕릉은 죽은 자의 궁궐이다. 특히 유교 국가인 조선에서 궁궐에 사찰을 둔다는 것은 상상할 수 없는 일이다. 홍릉숲에 있던 사찰은 바로 청량리라는 지명을 낳은 청량사다. 그만큼 역사가 깊다. 신라 때 창건된 것으로 추정된다. 고려시대의 <<고려사절요>>에 예종 12년에 이자현이 머물며 임금을 위해 글을 썼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지금의 자리로 옮겨진 청량사에서는 그 역사의 흔적을 찾을 수 없다. 한신아파트와 동부센트레빌로 쌓여 있는 도시화된 절이 됐다. 지리적 여건만 그런 게 아니다. 건물도 그렇다. 사찰의 부대시설과 건물이 도시화되어 있다. 필자가 많은 절을 다니면서 느끼는 게 있다. 최근 지어진 사찰 건물에서는 역사를 읽을 수 없다는 점이다. 종교는 길고 인생은 짧다. 그런데 역사에 남을 불교 건축물을 짓지 않는 것일까. 현세화된 불교의 현실을 반영하는 것은 아닌지 묻고 싶다.

청량사. (사진=위성지 여행작가)
청량사. (사진=위성지 여행작가)

# 대한독립의 기원이 실린 사찰 청량사

사찰 입구는 대문 형식이다. 두 기둥에 두 분의 부처가 있다. 한 분은 입을 벌리고 한 분은 입을 다물고 있다. 이는 아움이다. 시작과 끝이다. 곧 진리를 뜻한다. 그 진리를 찾기 위해 한용운 선생과 박영헌 스님 등이 일제강점기에 이곳에 머물며 항일투쟁과 불교 진리 연구에 온몸을 바쳤다. 특히 이곳에서 한용운 선생의 환갑 잔치가 열렸다고 한다. 만해의 환갑연은 단순한 잔치가 아니었다. 대한독립의 기원이었다. 독립운동의 산증인들이 새로 결심을 다짐하는 자리였다. 청량사는 그런 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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