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 뜰 무렵에 아침 긴 터널을 빠져나오는 철마처럼 대한민국은 건국 당시 최빈국에서 질풍노도처럼 산업화·민주화의 길을 달려와 선진국에 진입했다. 그러나 아직 넘어야 할 산들과 건너야 할 강들이 우리를 시험하고 있다. 진정한 선진국에 걸맞는 정치·경제·사회 모든 영역에서 품격을 갖춰야 한다.

국가의 명운을 좌우할 북핵은 발등에 떨어진 불이지만, 우리 정치는 여전히 극단적인 좌우 이념으로 갈라져 있고 포퓰리즘에 매몰돼 있다. 대한민국이 명실상부한 선진국이 되기 위해서는 백년대계를 위한 ‘국가대개조 방안’을 세워야 한다. 특히 외교는 초당적이어야 국익을 지킬 수 있다.

미국 국무부 비확산·군축 담당 특별보좌관을 지낸 로버트 아인혼 브루킹스연구소 수석연구원은 지난 해 12월 ‘2022 한미핵전략포럼’에서 한국의 독자적 핵무장은 “순전히 한국인이 내릴 수 있는 자주적인 선택”이라는 주장을 했다. 또한 “한국이 핵무기를 확보하면 미국은 결국 이를 용인할 것이지만 주요 안보 동반자인 미국과의 관계에 미치는 영향도 세심히 살펴야 한다”고 제언했다.

박진 외교부 장관은 북핵문제의 해법으로서 한국의 독자적 핵무장이 미국의 입장에서도 전략적인 이득이 될 수 있다는 점을 미국 조야에 설득해 제시해 주기 바란다.

2009년 외교부가 선정한 ‘우리 외교를 빛낸 인물 1호’가 고려의 서희(徐熙, 942~998)이다. 서희의 본관은 이천, 자는 염윤(廉允), 시호는 장위(章威)이다. 광종 대의 대쪽 재상 서필(徐弼)의 아들이다. 19세에 문과에 급제, 광평원외랑에 이어 내의시랑이 되었다. 982년 송나라에 가서 10여 년간 단절되었던 국교를 트고 송 태조로부터 검교병부상서 벼슬을 받아 귀국했다.

고려 건국 75년이 되는 993년(성종 12). 거란 장수 소손녕은 고려를 침공하여 “80만 대군이 출병했으니 빨리 항복하라”고 위협했다. 그러나 서희는 당당하게 맞서 담판으로 소손녕을 굴복시켰다. 서희가 이 외교담판에 사용한 전략은 크게 세 가지이다.

첫째, ‘지피지기 백전불태(知彼知己 百戰不殆)’ 전략이다. ‘적을 알고 나를 알면 백 번 싸워도 위태롭지 않다’는 손자병법의 활용이다. 서희는 송과 거란이 건곤일척의 용호쟁투를 벌이는 국제정세를 정확하게 읽고 있었다. 거란이 송을 제압해 동아시아의 패자가 되기 위해 배후세력인 고려와 송의 관계를 단절하고, 고려의 중립화와 북진정책 봉쇄가 침입목적이라는 사실을 간파한 것이다.

둘째, ‘선항전 후협상(先抗戰 後協商)’ 전략이다. 당시 고려 조정에서는 항복과 할지(割地, 서경 이북의 땅 양도)로 의견이 나뉘었고, 할지로 기운 상태였다. 그러나 서희는 안융진전투 이후 산악지대 전투에 자신감을 잃은 거란군의 상황을 파악, 지형지세를 이용한 항전으로 거란군에 타격을 줄 수 있다는 판단에서 ‘우선 항전해보고 후에 협상해도 늦지 않다’는 대안을 제시했다.

셋째, ‘여명분 득실리(與名分 得實利)’ 전략이다. 명분은 주고 실리를 얻는 방안으로, 송과의 국교를 단절하고 거란과 군신관계를 맺어(명분) 싸우지 않고 대군을 돌려보냈으며(부전이승不戰而勝), 옛 고구려 땅 ‘강동 6주’를 고구려를 계승한 고려가 차지했으니(실리) 우리 역사상 가장 성공한 외교라 할만하다. 이로써 고구려 멸망 이후 처음으로 국경이 압록강에 이르렀다.

대한민국이 ‘글로벌 코리아’로 도약하기 위해서는 1000년 전 ‘서희의 협상 리더십’을 배워야 한다. 영토 상실의 위기를 영토 확장의 기회로 활용한 ‘탁월한 병법가’이자 ‘외교의 영웅’. 장위공 서희 선생을 경모하는 필자의 자작 한시를 소개한다.

不爭而勝協商雄(부쟁이승협상웅) 싸우지 않고 승리한 협상(외교)의 최고 영웅으로

北失江東返國中(북실강동반국중) 잃어버린 강동 6주를 반환받아 강토로 만들었네

割地投降論議發(할지투항논의발) (조정에서) 할지론과 투항론의 논의가 분분했지만

與名得實目標終(여명득실목표종) 명분 주고 실리 챙기는 전략으로 목표를 정했네

謀攻赫赫圖謀狄(모공혁혁도모적) 혁혁한 ‘모공 병법’으로 오랑캐(여진족)를 도모했고

談判堂堂逐出戎(담판당당축출융) (소손녕과) 당당한 담판으로 거란군을 축출했네

神策旁通諸葛過(신책방통제갈과) 신책과 자세한 견문은 공명(성현)을 넘어섰으며

千斤筆舌萬秋崇(천근필설만추숭) 천근같은 문장과 언변은 만세토록 숭상 받네

우 종 철 일요서울 논설주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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