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근혜 전 대통령이 당선되고 타임지 아시아판이 표지 인물로 선정하면서 제목을 “The Strongman’s Daughter”라고 달았다. 영어라면 사족을 못 쓰는 한국에선 ‘Strongman’을 두고 해석이 분분했다. 박 전 대통령이나 아버지인 박정희에 대한 태도로 의견이 갈렸다. 한쪽에선 실력자’, ‘강력한 지도자로 다른 쪽에선 독재자로번역했다.

타임지는 한국에서 이 기사의 제목이 논란이 되자 아예 인터넷판에서 제목을 “The Dictator’s Daughter”로 바꿔버렸다. 타임지가 스트롱맨을 강한 지도자가 아니라 독재자로 쓴 것임을 분명히 한 것이다. 스트롱맨은 타임지뿐 아니라 영어권에서는 보통 독재자(Dictator)를 완곡하게 지칭할 때 쓰는 단어다.

이렇듯, 독재자를 뜻하는 스트롱맨이라는 단어가 한국 정치에서는 다른 맥락으로 쓰이는 경우가 있다. 홍준표 대구시장같은 경우는 2017년 대선 경선 당시 한국에도 이제는 지도자가 스트롱맨이 나와야한다라고 했다가 곤욕을 치른 적이 있다. 정치인이 스트롱맨이 되겠다고 말하는 것은 독재자가 되겠다는 것인데, 그걸 몰랐다.

최근에는 화물연대의 파업을 다루는 윤석열 대통령의 스트롱맨 리더십이 화제가 됐다. 윤 대통령은 법과 원칙을 앞세워 강경하게 대응해 화물연대를 무릎 꿇리고 지지도 상승효과를 봤다. 한때지만 40%를 넘어서기도 했다. 그래서 그런지, 대통령이 야당이나 국정 현안을 대하는 태도는 갈수록 스트롱해지는 중이다.

윤 대통령이 스스로 스트롱맨이 되고자 하는지는 알 수 없다. 최근의 행보를 보면 스트롱맨은 검사로서 갈고닦은 윤 대통령의 정체성이 아닌가 의심되긴 한다. 야당 대표 소환과 수사에 주저하지 않고, 노동계의 파업에 대해서는 강경 대응으로 일관한다. 자신이 임명한 나경원 전 의원은 자기 뜻에 따르지 않는다고 거의 역적으로 몰아가고 있다.

스트롱맨은 세계 곳곳에서 출몰하고 있다. 미국의 도널드 트럼프, 필리핀의 두테르테, 터키의 에르도안, 러시아의 푸틴, 중국의 시진핑, 북한의 김정은이 대표적인 스트롱맨들이다. 이들 스트롱맨은 대체적으로 포퓰리즘 성향을 띈다. 정치적 주장은 좌파와 우파를 가리지 않고 극단적이고, 권력 유지를 위해서는 못할 일이 없다.

스트롱맨은 자기 권력을 강화하기 위해서만 움직인다. 국가의 안위, 국민의 안전, 경제적 이익은 정치적 수단에 불과하다. 러시아의 푸틴이 우크라이나와 전쟁을 벌인 이유는 자신을 옛 영토를 수복한위대한 차르로 남기기 위해서였다. 불리한 전황에도 전쟁을 끝내지 못하는 이유도 전쟁의 패배는 푸틴체제의 붕괴로 이어질 것을 알기 때문이다.

독보적인 스트롱맨인 트럼프는 스트롱맨의 시대의 상징이다. 트럼프는 민주주의를 희롱하고, 거짓말을 일삼고, 미국 사회를 둘로 갈라놓았다. 미국만의 문제는 아니다. 역사는 시간의 능선 위에서만이 아니라 공간을 통해서 반복되기 때문이다. 한번은 비극(悲劇)으로, 또 한 번은 소극(笑劇)으로. 바야흐로 미국처럼 한국도 스트롱맨의 시대를 맞이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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