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人 3色, 보수정당 출구전략
위기의 당: 朴 ‘차떼기당’, 金 ‘배신의 정치’, 洪 ‘탄핵당’

제1 보수정당 당대표를 경험한 박근혜 전 대통령, 홍준표 대구시장, 김무성 전 새누리당 대표 [사진 뉴시스] 

[일요서울 l 박철호 기자] 당대표직은 대마(大馬)의 자리임과 동시에 정치 생명의 급소가 될 수 있는 양날의 검이다. 26년 간 제1 보수정당에서 총 16명의 당대표가 선출됐고 그 중 10명의 당대표가 선거 패배와 당 쇄신 차원의 총책임을 지고 사퇴했다. 위기 없는 정당은 없지만 모든 정당이 실패하는 것은 아니다. 이에 본지는 21세기 정치사에 굵직한 순간에 놓였던 박근혜 전 대통령, 홍준표 대구시장, 김무성 전 새누리당 대표의 당대표 시절을 통해 보수정당의 위기 속 리더십을 살펴보고자 한다. 

원칙과 신뢰의 朴

박 전 대통령이 2004년 당시 한나라당의 당대표로 선출된 이유는 원칙과 신뢰에 있다. 당시 정치권의 도덕성 결여는 심각했고 새천년이 밝아온 후로 3김(金) 시대부터 이어진 총재 중심의 밀폐된 조직 구조는 부패와 수구의 상징이 됐다. 2003년 10월 거물 총재였던 이회창 전 대선 후보는 불명예스러운 정계 은퇴를 선언했다. 이 총재는 2002년 대선 당시 대기업으로부터 트럭과 승용차를 동원해 총 832억 원의 불법 대선자금을 전달 받았다. 한나라당은 ‘차떼기당’이란 오명을 얻었다. 당 내부에서는 ‘공천헌금’ 비리와 당 지도부의 ‘공천 살생부’ 유출로 인한 분당 논란까지 일었다. 국면 전환이 필요한 상황에서 한나라당은 고 노무현 전 대통령의 탄핵 소추안 통과를 결정했다. 결국 국민의 70%가 반대한 탄핵을 강행한 한나라당은 탄핵 전후 정당 지지도가 24.3%에서 9%까지 하락했다. 
탄핵 역풍을 맞은 당의 위기 속에서 등판한 구원 투수는 박 전 대통령이었다. 2003년 3월 23일 신임 당대표로 선출된 박 전 대통령은 “오늘 전당대회는 단순히 새로운 대표를 뽑는 날이 아니라, 한나라당이 다시 태어나 새롭게 전진하느냐 국민에게 영원히 버림받느냐를 결정하는 날”이라고 선언했다. 박 대표는 업무 첫날부터 ‘호화 당사’로 불리던 기존 부지를 매각하고 여의도공원 인근에 ‘천막 당사’를 설치했다. 이날 오후부터는 명동성당, 조계사, 영락 교회를 차례로 방문해 국민에 대한 속죄의 의미로 고백성사와 108배, 회개 예배에 참석했다. 
총선이 다가온 시점에서 박 대표는 도덕성과 신뢰를 강조했다. 박 대표는 총선 2주 전 전국의 모든 후보에게 “낙선되는 한이 있어도 깨끗한 선거를 해달라”는 특별 메시지를 발송했다. 구체적으로는 흑색선전의 금지와 선거비용의 투명화를 강조했다. 유권자들에겐 거여(巨與)론을 주장해 한나라당이 합리적이고 신뢰 가능한 협상 상대로서 여당의 독주를 막겠다고 호소했다. 
한나라당은 50~80석 확보가 예상 됐으나 끝내 의석 수 121석을 확보해 개헌저지선을 지켜냈다. 박 대표의 원칙과 신뢰가 통한 것은 한나라당도 그 만큼 절박했기 때문이다. 한나라당은 총선을 앞두고 현역 의원 40%를 공천에서 탈락시켰다. 당시 오세훈 서울시장은 초선의원임에도 당과 현실에 무기력함을 느끼고 총선 불출마를 선언했다. 젊은 오 시장의 용퇴로 인해 구세대 정치인의 자의적 총선 불출마 운동이 퍼져갔다. 당시 한 현역 중진 의원은 “절이 싫어서 중이 떠난다”고 말하며 당시의 급변하는 정치권을 대변했다.  


자기정치의 金

한나라당을 구해낸 박 대표는 8년 뒤 대통령의 자리에 오른다. 당 명을 새누리당으로 바꾼 여당의 2대 당대표는 김무성 당대표였다. 당시 박 대통령과 김 대표의 당청 관계는 ‘자기 정치’의 금지로 정의된다. 보통 여당 대표의 역할은 대통령의 국정 보좌이지만, ‘무성대장’ 김 대표는 자기 정치를 선보이며 당을 이끌었다.    
김 대표가 독자노선을 선택한 이유는 친박에서 비박이 된 개인 정치사와 세월호 참사 이후 하락하던 박 대통령의 지지도 때문이다. 2014년 7월 14일 김대표는 당대표 당선 직후 “지금 이 시간부터 친박, 비박, 주류 비주류는 완전히 없어집니다”라고 선언했다. 김 대표는 취임 2주 만에 역대 최대 규모 상반기 보궐 선거에서 의석 수 11석을 확보한다. 김 대표의 대승은 ‘선거의 여왕’ 박 대통령의 지원 없이 이뤄진 홀로 서기였다. 
2015년 2월에는 같은 비박계인 유승민 원내대표가 당 지도부에 합류했다. 유 원내대표는 취임 직후 청와대에 “국민 눈높이를 충분히 감안한 수준의 과감한 인적 쇄신이 됐으면 좋겠다”고 주장했다. 김 대표와 유 원내대표 체제는 2015년 상반기 재보궐 선거에서 대승을 거둔 후 탄력을 받아 완전국민경선 공천 도입과 국회가 정부 시행령을 수정 가능한 국회법 개정안을 추진했다.       
국회법 개정안은 박 대통령의 역린이었다. 박 대통령은 6월 15일 “당선된 이후 신뢰를 어기는 배신의 정치는 결국 패권주의와 줄 세우기 정치를 양산하는 것으로, 반드시 선거에서 국민들이 심판해 줘야 한다”고 강조했다. 결국 유 원내대표는 7월 8일 원내대표직을 자진 사퇴한다. 김 대표의 독자노선은 쇠락하고 2016년 총선의 공천권은 친박계 의원들과 이한구 공천관리위원장에게 돌아간다. 이후 김 대표는 총선 직전 일부 지역의 공천권을 승인하지 않은 채 부산으로 향한 ‘옥새 파동’과 총선 대패로 일선에서 물러난다.   


피아식별의 洪 

2017년 7월 박 대통령의 탄핵 이후 홍 시장은 정치 경력 두 번째 당대표를 맡았다. 홍 대표는 당선 직후 “이 당이 이렇게 몰락한 것은 우리들의 자만심 때문”이라며 “앞으로 당을 쇄신해 국민 여러분의 신뢰를 받겠다”고 밝혔다. 홍 대표는 보수의 궤멸 위기 속에서 남북 정상회담을 통해 압도적인 지지를 받고 있는 문재인 전 대통령과 여당을 상대해야 했다. 보수 내부에서도 탄핵 당시 갈라진 바른미래당과 보수 적통 경쟁을 벌였다. 
좌우안팎으로 사면초가에 놓인 홍 대표는 지지층의 결집을 선택했다. 정치인 홍준표를 상징하는 힘은 말(言)이었고 홍 대표는 그 힘을 피아식별에 사용했다. 당내 반대 세력을 ‘바퀴벌레’, ‘연탄가스’, ‘고름’, ‘암덩어리’에 비유했고 정부를 ‘주사파 운동권 정권’으로 정의했다. 이 틈에서 정태욱 자한당 대변인은 방송에서 이부망천(이혼하면 부천, 망하면 인천) 같은 망언을 쏟아냈다. 홍 대표의 막말에 제7회 지방선거 목전에는 자한당 후보들이 당대표의 지원 유세를 보이콧 하는 상황에 이르렀다.
홍 대표는 지방선거를 앞둔 선거 유세도 영남 사수에 사활을 걸었다. 2018년 1월 홍 대표는 “서울시장은 내어줘도 회복할 기회가 있지만 대구시장을 내주면 한국당은 문을 닫아야 한다”고 말했다. 지방선거의 결과는 자한당의 대패였고 당시 언론은 지선 결과를 두 번째 탄핵으로 명명했다. 홍 대표는 선거 전 “광역지자체 중 최소 6곳에서 승리하겠다”고 밝혔지만 대구와 경북을 제외한 전 지역에서 패배했다. TK는 사수했지만 PK(부산·울산·경남)를 동시에 내주며 30년 보수 패권의 막을 내렸다. 


다음 이야기의 주인은 ? 


세 정치인이 겪은 당·청 갈등, 계파 갈등, 국민의 불신은 정당이 겪어야 할 숙명적인 위기다. 더불어 앞선 당의 위기들 속에서 한국 정치는 여·야를 막론하고 걸출한 정치인의 출연을 맞이했다. 박 전 대통령은 당의 위기를 구원해 차기 대권주자로 올라섰고, 오세훈 서울시장도 재선보다 값진 불출마를 선언했다. 홍 시장의 지선 대패로 인해 김경수 전 경남지사도 큰물로 들어서게 됐다. 취준생들의 자소서에도 스토리가 필수인데 정치인들의 경력에 서사 구조가 없는 것은 섭섭한 일이다. 
두 달 앞으로 다가 온 국민의힘 차기 당대표 선거는 연일 흥행 가도를 달리고 있다. 잘 팔리는 이야기는 서사의 갈등 구조가 확실하기 마련이다. 유권자인 국민의힘 당원들은 이 이야기의 작가로서 결말을 집필할 수 있는 만큼 누가 주연이고 조연인지 현명하게 판단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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