탐방 경로를 동대문구에서 성동구로 옮겼다. 필자는 성동구 금호동과 옥수동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성동구는 어쩌면 고향 같은 곳이다. 탐방이 아니라 이웃집에 가는 기분이다. 마음이 참 편하다. 첫 탐방지는 청계천이다. 성동구 구간은 청계천 하류다. 청계천 광장에서 19번째 다리인 비우당교부터 시작된다. 탐방은 거꾸로 했다. 청계천과 중랑천이 만나 한강으로 합류하는 지점부터 상류로 거슬러 비우당교까지 올라갔다. 불과 3km 남짓의 거리다.

조선시대 세운 가장 긴 다리인 살곶이 다리와 살곶이 다리 구부재.(사진=김경은 여행작가)
조선시대 세운 가장 긴 다리인 살곶이 다리와 살곶이 다리 구부재.(사진=김경은 여행작가)

겨울철 청계천 하류 철새 천국으로 변신하다!
- 청계천 복원은 자연과 생명을 부활시킨 최초의 대역사

518년간 조선 역사를 지켜온 청계천이지만 외곽지역에서 흥미로운 얘깃거리를 찾을 수 있을까 염려했다. 필자가 무지했다. 이것은 청계천을 속속히 돌아보기 전까지의 생각이었다. 청계천이라는 공간적 환경은 크게 변하지 않는다는 고정관념이 만든 착오였다. 거슬러 올라가면서 본 청계천은 시간의 흐름으로만 풀 수 없었다. 그만큼 역동적이다. 공간이 주는 역동성을 이해해야 청계천을 지나간 이야기와 현재를 지나는 이야기를 해석할 수 있다.

공간이 주는 역동성...과거와 현재 이야기

혹한의 끄트머리에 청계천의 바람은 찼다. 며칠 전에 내린 눈이 군데군데 남아 있다. 벌거벗은 나목이 애처롭다. 청계천을 걷는 사람과 철새는 추위에 아랑곳없다. 필자도 그중에 한 사람이다.

한양대학교 남쪽 둔치로 내려갔다. 살곶이 주차장이 나왔다. 청계천과 중랑천이 만나 한강으로 흘러드는 자리에 다리 하나가 보인다. 살곶이 다리임을 직감했다. 그런데 고풍스러움을 느낄 수 없다. 콘크리트 다리다. 살곶이 다리 터만 남았다고 생각했다. 커브를 돌았다. 다리가 가까워졌다. 콘크리트 다리가 예스럽고 튼튼한 돌다리와 연결되어 있었다. 옛날 다리는 매우 거칠 상판으로 덮여 있다. 난간은 없다. 기둥은 마름모꼴 형태다. 주춧돌 위에 세워져 있다. 물 흐름 방향과 세기를 고려한 설계임을 문외한도 직감할 수 있다. 투박하지만 매우 과학적이다.

살곶이 다리.(사진=위성지 여행작가)
살곶이 다리.(사진=위성지 여행작가)

살곶이 다리는 세종 때 착공됐다. 상왕으로 물러난 태종은 청계천 건너편 낙청전에 거처를 정했다. 세종은 수시로 문안을 드려야 했다. 신하도 실권을 쥐고 있던 상왕 태종을 만나기 위해 낙청전을 찾아야 했다. 행차 때마다 배로 이동하는 일은 여간 번거로운 게 아니었다. 세종은 살곶이 다리 축성에 나섰다. 다리가 완성되기 전 태종이 죽었다. 또 공사 중에 홍수가 났다. 축조 중이던 다리가 토사에 묻혔다. 공사가 중단됐다. 50여 년 동안 방치됐다.

공사가 재개된 것은 성종 때에 이르러서다. 63년 만인 1483(성종 14)에 완공됐다. 조선시대에 만든 다리 중 가장 긴 다리였다. 길이가 76m, 폭이 6m이다. 교각은 무려 64개나 세웠다.

조선시대 만든 다리중 가장 긴 살곶이 다리

살곶이 다리가 일부만 남은 데는 이유가 있다. 흥선대원군이 다리의 석재 절반을 경복궁을 복원하는 데 썼다. 그 뒤에 방치됐다. 1972년에 복원작업을 했다. 하지만 원형대로 복원하지 못했다. 그 옆에 성동교가 들어서면서 살곶이 다리는 청계천 수변 산책객의 차지가 됐다.

성종은 이 다리가 완성된 후 꽤 흐뭇해했다. 성현이 쓴 용제총화에 성종이 다리가 평지를 밟는 것과 같다라며 제반교(濟磐橋)’라 명명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그런데 왜 살곶이 다리로 불리는 것일까. 태조와 태종의 야사가 정설처럼 굳어진 얘기에서 유추할 수 있다. 태조는 두 차례의 왕자의 난을 일으킨 태종(다섯째 아들)을 미워했다. 함흥에서 돌아올 때 청계천과 중랑천이 만나는 두물머리에 마중 나온 태종에게 화살을 쐈다. 태종은 차양을 치기 위해 세운 기둥 뒤로 몸을 피했다. 화살은 기둥에 꽂혔다. 그래서 이 부근의 평지를 살곶이 벌’, 다리를 살곶이 다리라고 불렀다.

청계천 곳곳에 철새들이 모여 있다. (사진=김경은 여행작가)
청계천 곳곳에 철새들이 모여 있다. (사진=김경은 여행작가)

청계천을 거슬러 올랐다. 눈 덮인 강물과 햇살이 아름다운 청계천 풍경을 더욱 다채롭게 했다. 겨울철 청계천 하류의 볼거리는 새다. 청계천은 철새의 천국이다. 청둥오리는 추운 줄도 모르고 헤엄을 친다. 냉수욕을 즐기는 것일까. 백로는 꿈쩍 않고 한 발로 얼음을 딛고 서 있다. 인내심 교육이라도 받는 것일까. 혹시 동상이라도 걸리지 않을까 걱정이 된다. 살곶이 다리 기둥 밑에는 수백 마리의 새들이 모여 있다. 청계천이 마치 철새의 도래지가 된 듯하다. 청계천을 걷으며 철새를 보는 것 자체만으로도 힐링이 된다.

이것은 전기가 만든 청계천의 기적이다. 청계천은 도시화와 산업화 과정에서 건천이 됐다. 물이 없는 하천이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 하루에 한강 물 12만 톤을 청계천으로 끌어 흘려보낸다. 수심 40cm를 유지할 수 있는 양이다. 펌프 전기료가 1년에 10억 원이 든다.

산책객은 앞만 보고 걷는다. 필자는 연신 고개와 눈을 돌린다. 하천을 덮은 눈과 얼음도 감상한다. 마장동에 이를 즈음 또 다른 두물머리가 나왔다. 청계천과 정릉천이 만나는 곳이다. 건너편에 열대지방에서나 볼 수 있는 수상가옥 모양의 집이 있다. 1976년까지 있었던 청계천 판잣집을 재연한 판잣집 테마촌이다. 테마촌은 불과 4~5채로 꾸며져 있다. 판잣집은 한국 전쟁 이후 청계천 천변 풍경의 대명사였다.

당시 청계천은 오염될 대로 오염되어 있었다. 특히 판자촌이 집결한 청계천 하류는 더 했다. 생활하수와 오수가 흘러넘쳤다. 살곶이 다리 주변은 청계천 분뇨처리장이 있었다. 똥배도 다녔다. 일본의 똥배, 갈서선(葛西船)처럼 자본축적에 기여라도 했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청계천과 한강을 더럽히는 똥배였다. 이런 곳에서 사는 판자촌 사람은 질병에 노출됐다.

거기다가 가난과 고통은 타락을 불렀다. 열악한 삶에서 비롯된 애환도 있었다. 그렇다고 청계천 판자촌은 지옥은 아니었다. 판자촌 사람은 그곳에 강제로 온 게 아니다. 스스로 왔다. 고향 집보다 더 허름한, 판자로 얼기설기 엮은 집 혹은 토굴에 살았다. 그런 집에서 더 잘살아보겠다는 희망을 매달았다. 희망이 이뤄지기 위해서라도 안정적 정착이 보장돼야 했다.

판자집 테마촌. 1960년대 청게천의 생활상을 보여주고 있다. 외관은 판잣집을 유지해 추억을 상기시키며 내부는 자연과 생태의 중요성을 보여 주고 있다. (사진=김경은 여행작가)
판자집 테마촌. 1960년대 청게천의 생활상을 보여주고 있다. 외관은 판잣집을 유지해 추억을 상기시키며 내부는 자연과 생태의 중요성을 보여 주고 있다. (사진=김경은 여행작가)

판잣집 한국전쟁이후 청계천 풍경의 대명사

이런 바람은 이범선의 소설, 오발타에서 잘 보여준다. “이 넓은 하천을 어떻게 덮겠어”, “설마 이 많은 사람을 쫓아내겠어라는 판자촌 사람의 넋두리가 그것이다. 청계천 포장과 청계고가도로 건설은 일제가 계획했다. 하지만 실행에 옮기지 못했다. 판자촌 사람은 일본도 못 한 일을 한국 정부는 못할 것이라는 믿음이 있었다.

하지만 설마가 사람을 잡았다. 1958년부터 청계천 판자촌은 철거됐다. 그리고 청계천은 복개됐다. 청계천은 사라지고 청계로가 생긴 것이다. 청계로 위에 고가도로가 들어섰다. 청계천 개발이 시작됐다. 평화시장이 들어섰다. 세운상가가 세워졌다.

청계천 고가도로 공사가 한창일 때다. 박정희 전 대통령이 공사장 순시에 나섰다. 이 자리에서 그가 남긴 유명한 말이 있다. “왜 모두가 한양공대(출신이)가 그것이다. 일제강점기 시절 천도교회관(현 수운회관)에서 동아공과학원에서 시작된 한양대학교가 최초의 민간 공대로 다시 태어난 곳이 바로 청계천 분뇨처리장이 있던 살곶이 벌이었다. 한대 공대 출신 기술자는 누구보다 간절하게 오염과 낙후의 상징이었던 청계천과 청계천 판자촌을 없애고 싶었던 것일까.

박정희 전대통령, “왜 모두가 한양공대야발언지

가까이에서 그리고 멀리서 본 존치교각, 청계천 고가도로를 받쳤던 3개의 교각. (사진=김경은 여행작가)
가까이에서 그리고 멀리서 본 존치교각, 청계천 고가도로를 받쳤던 3개의 교각. (사진=김경은 여행작가)

그렇게 50년이 흘렀다. 그리고 청계천 고가도로는 헐렸다. 청계천 물길도 다시 열렸다. 청계천이 복원된 것이다. 그것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기념물이 있다. 바우당교와 무학교 사이에 있는 존치교각이 그것이다. 존치교각은 청계고가도로 건설 등 근대 서울 개발의 역사적 상징성과 청계천 복원의 의미를 부여하기 위해 철거하지 않은 청계고가 교각 3개를 이르는 말이다.

개발의 역사는 자연 파괴와 동의어다. 개발은 친환경, 친자연적이지 않았다. 죽어가는 하천을 살긴 게 아니라 콘크리트로 숨겼다. 자연을 복원하고 생명의 숨결을 살리는 개발이 아니었다. 그런 의미에서 청계천 복원은 자연과 생명을 부활시킨 최초의 대역사였다. 그것에 못지않은 의미가 또 있다. 청계로는 수많은 상인이 생계를 유지해왔던 삶의 터전이었다. 복원 사업 과정에서 그들은 엄청난 손실을 감수해야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청계천 복구과정에서 무리 없이 이해관계를 절충했다. 자연을 파괴했던 청계로와 청계고가 건설과는 전혀 다른 양상이다. 이는 아무리 평가해도 지나치지 않다. 그 스토리는 다음 호에 이어진다.

청계천 하류의 다리들. 두물다리, 청혼의 벽. 비우당교. (사진=김경은 여행작가)
청계천 하류의 다리들. 두물다리, 청혼의 벽. 비우당교. (사진=김경은 여행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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