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달 “2년 안에 미국이 중국과 싸우게 될 것 같다.”라고 예측한 마이클 미니헌 미 공군기동사령관(4성 장군)의 메모가 워싱턴을 뒤집어놨다. 이 같은 미·중 패권전쟁의 현실화로 불확실성의 격랑이 세계를 덮치고 있다.

지금 미국이 구상하는 새로운 국제질서는 경제성보다 안보를 우선하는 ‘가치동맹’이다. 미국은 자신들이 글로벌 스탠더드로 1990년대에 구축한 세계화와 자유무역을 뒤흔들고 있다.

미국의 우파는 세계화가 중국·러시아 같은 적성국의 팽창을 초래했다고 반성하고 있고, 좌파는 신자유주의가 소득 양극화를 가속화했다며 ‘탈(脫)세계화’에 동조하고 있다. 이제 탈세계화의 탁류(濁流) 속에서도 새로운 승자와 패자가 나뉠 것이다. 이럴 때일수록 우리 정부와 기업은 손을 잡고 변화의 물결에 빨리 편승하는 추격자 DNA를 되살려야 한다.

병자호란은 인조의 ‘삼전도 치욕’으로 조선인들에게 씻을 수 없는 분노를 품게 했다. 이에 북쪽 오랑캐를 쳐서 복수한다는 이데올로기인 ‘북벌론(北伐論)’이 조선을 지배했지만, 국제정세는 다른 양상으로 흘렀다.

이 시기에 청의 앞선 문명과 기술을 받아들여 조선 사회를 개혁하자는 ‘북학파(北學派)’의 활동은 개방적인 자주 의식과 이용후생(利用厚生)의 소산이었다. 북학 사상의 진정한 승리는 230년 후의 ‘세계적인 한류 K’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박지원(朴趾源, 1737~1805)은 18세기 조선 최고의 지성이자 대문장가이다. 본관은 반남(潘南), 자는 중미(仲美), 호는 연암(燕巖)이다. 1737년 한양에서 박사유와 함평이씨 사이 2남 2녀의 막내로 태어났다.

32세 때 백탑(白塔, 탑골공원) 근방으로 이사 가서 홍대용, 박제가, 이덕무, 유득공, 이서구 등과 교류했다. ‘백탑청연(白塔淸緣)’이라는 모임을 만들어, 이용후생에 대한 깊은 학문적 교류를 통해 ‘조선의 르네상스’를 이끌어나갔다.

이들은 서로를 사귐에 신분과 적서(嫡庶)와 나이를 초월하였다. 1777년(정조 1)에 연암은 벽파(僻派, 사도세자를 배척한 당파)로 몰리면서 황해도 금천의 연암협(燕巖峽)에 은거하였다. 연암이라는 호는 이곳의 지명에서 얻은 것이다.

“옛것을 본받아 새로이 창조해 내라(法古創新·법고창신).”고 한 연암의 가르침은 ‘실사구시(實事求是)’를 주창한 정약용과 ‘입고출신(入古出新)’을 강조한 김정희에게 이어졌다. 또한 이 학맥은 연암의 손자인 박규수와 대한제국의 개화파에 이어졌다.

길 위에서 사유하고, 사유하면서 길을 떠나는 ‘유목민’이었던 연암. 그는 1만 인을 압도하는 기세를 가졌지만, 명리(名利)를 가까이하는 걸 두려워했다.

연암은 걸인의 절의와 양반의 허욕을 대비시켜 비판한 <광문자전>, 인분을 져 나르며 살아가는 민초의 삶에서 깊은 덕성을 발견하는 <예덕선생전>, 양반의 부패와 허위를 풍자한 <양반전> 등 11편의 소설을 썼다.

연암은 44세(1780, 정조 4) 때 친족 형 박명원이 건륭 황제 만수절(70세) 진하사겸사은사가 되어 청에 갈 때 자제군관(子弟軍官)으로 동행했다. 6개월 간의 여행기인 <열하일기(熱河日記)>는 조선 사회를 개혁하고 세계화를 꿈꾸는 열망이 담긴 역작이다.

이 여정에서 남긴 <야출고북구기(夜出古北口記>), <일야구도하기(一夜九渡河記)> 등에 대해 창강 김택영은 “조선 역사 오천 년 이래 제일가는 명문장”이라 평했다.

연암은 이덕무의 문집 <영처고(嬰處稿)>의 서문에서 ‘조선의 시를 쓰라’고 일갈했다. “조선은 산천이며 기후가 중국과 다른 데도 글짓는 법과 문체를 중국에서 본뜬다면 아무리 고상해도 거짓될 뿐이다.”

중국 문화에 매몰되지 않고 ‘조선인으로서의 자기 정체성(朝鮮風·조선풍)’을 지킨 연암 선생을 경모하는 필자의 자작 한시를 소개한다.

軍官行色壯年行(군관행색장년행) 자제군관으로 장년에 청나라를 여행했으며

下筆成文刮目成(하필성문괄목성) 뛰어난 글재주는 괄목상대하게 우뚝했네

法古創新追實學(법고창신추실학) 옛것을 본받아 새것을 창조하는 실학을 추구했고

厚生利用索豊亨(후생이용색풍형) 이용후생의 실학은 풍요와 형통을 찾았네

靑邱開闢雲霓望(청구개벽운예망) 조선이 새롭게 열리는 것을 간절히 바랐고

碧海維新必出迎(벽해유신필출영) 뽕밭이 바다가 되는 유신을 반드시 맞아야 하네

述者丁寧留世說(술자정녕유세설) 문장을 지은 자는 정녕 세상의 비평을 기약하지만

五車日記越長城(오거일기월장성) <열하일기>의 명성은 만리장성을 넘어섰네

일요서울 논설주간 우 종 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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