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2일 일요일이다. 비가 온다. 봄비가 온다. 3월의 봄비는 시샘의 비다. 꽃이 피는 걸 시샘하는 비다. ‘꽃샘의 비는 추위를 몰고 온다. 이날 한파주의보가 내려졌다. 추위를 무릅쓰고 길을 나선다. 한양대행 버스를 탔다. 등산복 차림의 상춘객이 눈에 띈다. 상춘객은 이미 봄이다.

덕수고등학교와 해당 중학교 사이에 있는 전관원터 표지석. (사진=김경은 여행작가)
덕수고등학교와 해당 중학교 사이에 있는 전관원터 표지석. (사진=김경은 여행작가)

홍제원(돈화문), 보제원(흥인지문), 이태원(숭례문) 한성사원(四院)
- 말의 수호신인 마조(馬祖)에게 제사 지내던 제단

버스에서 내렸을 때 다행히 비가 그쳤다. 이제 본격적으로 역사의 냄새를 맡으러 간다. 옛사람이 살던 곳으로. 전관원 터와 마조단 터가 그곳이다. 전관원(여관)과 마조단(말의 신에게 제사를 지내는 제단)은 한양대 인근이 교통요지임을 알려주는 유적이다. 한양대 정문에서 내렸다. ! 한 정거장 미리 내린 듯하다. 길은 넓다. 자동차 소음이 요란하다. 고가로 지하철 2호선이 달린다.

조선시대 길손이 머물던 여관, 전관원

덕수고등학교 담장을 따라 뚜벅뚜벅 걸었다. 행운이다. 불과 2, 3분을 걸었다. 표지석(행당중학교 교문 앞) 하나가 길가에 있었다. 전관원 터다. 녹색 펜스 앞에 덩그러니 표지석 하나가 서 있다. 외로워 보인다. “조선시대 일반 길손이 머물 수 있던 서울 근교 숙소(四院) 네 곳 중 하나라고 적혀있다.

한성 사원(四院)은 전관원(광희문), 홍제원(돈화문), 보제원(흥인지문), 이태원(숭례문)이다. 이 표지석은 지리적 성격과 특성을 암시한다. 광희문은 한성으로 들어가는 관문 중 하나다. 전관원은 동문 밖(광희문~아차산)에 있던 공공 숙박시설이다. 전관원은 공적 임무를 띠고 지방에 파견되는 관리만이 아니라 상인 등 일반인도 이용할 수 있는 시설이다.

전관원은 나루를 건넜으나 도성 문을 닫는 인정()이 울리기 전에 도성에 들어갈 수 없게 된 나그네나 파루()에 따라 도성문이 열리는 시각보다 더 이른 새벽에 곧장 나루를 건너서 멀리 가는 나그네들이 묶는 여관’(네이버)이었다. 조선시대에는 1,310개소의 원이 설치되었다. 육로와 수로로 촘촘히 연결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표지석에서 멀찍이 떨어졌다. 행인들이 표지석에 관심을 두는지 관찰했다. 누구도 관심이 없다. 대수롭지 않게 지나친다. 나 역시 그랬다. 그런데 돌덩이 하나 보기 위해 찾아 헤맨 뒤부터는 달라졌다. 표지석이 서 있는 장소가 갖는 의미를 생각한다. 그 장소에 살던 사람의 모습도 그려본다. 표지석은 어떤 사물을 다른 것과 구별하기 위해 세운 돌이 아니다. 그 자체가 하나의 상징이자 역사다. 서울 시내 표지석은 322(20217월 현재) 세워져 있다고 한다.

말의 신에게 제사를 지내는 제단

한양대 캠퍼스에 핀 영춘화. 꽃말이 기쁘게 맞는 봄이다. (사진=김경은 여행작가)
한양대 캠퍼스에 핀 영춘화. 꽃말이 기쁘게 맞는 봄이다. (사진=김경은 여행작가)

또 다른 표지석을 찾아 걸었다. 한양대 캠퍼스 안에 있는 마조단이 그것이다. 수많은 한양대 캠퍼스 건물이 행단산을 덮고 있다. 한양대 캠퍼스는 아름다웠다. 건물 사이로 곳곳에 공원이 조성되어 있다. 공원 한 모퉁이에 영춘화(迎春化)가 꽃을 활짝 피웠다. 봄을 환영한다는 꽃 이름처럼 가장 먼저 피는 봄꽃이다. 겨울과 봄이 공존하는 꽃샘추위가 무색하다.

꽃을 보고 나니 기분이 좋아졌다. 한참을 올랐다. 행단산 꼭대기에 있는 백남학술정보관 앞이다. 한강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곳이다. 거기에 마조단 터 표지석이 있다. 표지석에는 조선시대 국립 살곶이 목장 안에 있던 말의 무병과 번식을 위해 말의 조상에게 제사를 지내던 제단터라고 적혀있다. 그 옆에 의자처럼 보이는 철제 조형물이 있다. 표지석이 없다면 형상화한 말이라는 것을 알 수 없는 그런 조형물이었다.

마조단은 말의 수호신인 마조(馬祖)에게 제사 지내던 제단이다. 말은 인간에게 매우 유용한 동물이다. 조선시대에는 가장 중요한 교통수단이었다. 군사적 자원이었다. “나라의 중요한 것은 군사요. 군사의 중요한 것은 말이라고 여겼다. 재화의 운송과 국방에 중요한 수단이었다.

그 가치는 돈으로도 환산할 수 있다. 전투용 군마 한 필 값이 쌀 30가마가 넘었다고 한다. 남자 노비 6~7명의 가치란다. 당연히 국가적인 차원의 군마 증진 노력을 게을리하지 않았다. 말의 신에게 제사 지낸 것도 그런 차원이다.

말의 무병과 번식을 빈 마조단 외에도 선목단(말을 처음 기른 선목을 위한 제단), 마사단(말을 타는 방법으로 창시한 사람에게 제사 지내는 단), 마보단(말에게 재해를 끼치는 신을 위한 제단) 등이 더 있다. 이들 제단이 있던 정확한 위치는 잘 모른다. 조선왕조실록에도 동문 밖으로만 표시되어 있다. 동문 밖은 광희문에서 아차산까지를 이른다. 아마도 살곶이 목장이 있던 곳으로 추정할 뿐이다. 하지만 그 추정은 매우 타당해 보인다. 살곶이 지역은 목장으로 천혜의 자연조건을 갖고 있다. 무성한 풀이 자라는 넓은 초원 지대였다.

이곳은 왕실의 사냥터이기도 했다. 최고의 명마를 사육했다. ‘갑마장이었다. 조선 최고의 말을 갑마(甲馬)라고 했다. 갑마를 사육하는 목장을 갑마장이라고 했다. 그런 장소에 말의 무병 무탈을 기원하는 제단이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마장동 꽃담벽화마을. 이른바 피가소 마을 안내지도. (사진=김경은 여행작가)
마장동 꽃담벽화마을. 이른바 피가소 마을 안내지도. (사진=김경은 여행작가)

피카소 마을로 유명한 마장동 꽃담벽화마을

행단산을 넘어 마장동 꽃담벽화마을로 갔다. 일명 피카소 마을로 잘 알려진 곳이다. 한양대 제6, 7 학생생활관 신축공사장 바로 옆이었다. 공사장과 접한 골목은 출입을 막고 있었다. 마을 일부는 공사장에 포함된 듯하다. ‘피카소 마을이라는 이름이 붙은 이유가 궁금했다. ‘마을 주인이 된 피카소의 그림이라도 있지 않을까?

그런 기대는 물거품이 됐다. 이 마을과 세림아파트를 구분하는 담에는 수많은 종류의 꽃이 피어 있었다. 집 벽은 동화 같은 그림으로 치장되어 있다. 한 곳에는 나태주 시인의 <, 이것은 비밀>(이름을 알고 나면 이웃이 되고 / 색깔을 알고 나면 친구가 되고 / 모양까지 알고 나면 연인이 된다)이라는 시도 그림과 함께 있다.

이 골목, 저 골목을 누비었다. 그런데 사람을 볼 수 없다. 인기척도 느낄 수 없다. 너무 조용하다. ‘친근한’, ‘포근한’, ‘정이 넘치는’, ‘사람 냄새 나는달동네가 아닌 듯하다. 왜 그렇게 된 것일까? 우리나라에 벽화마을이 꽤 많다. 북정마을, 개미마을, 이화동 마을……. 이들 마을을 소개한 기사를 보면 천편일률적이다. 마치 세상이 바뀐 듯하다. 음침한 달동네가 감성 충만한 벽화마을로 바뀐 듯하다

인기척을 느낄 수 없는 벽화마을. 적막감마저 감돈다. (사진=김경은 여행작가)
인기척을 느낄 수 없는 벽화마을. 적막감마저 감돈다. (사진=김경은 여행작가)

정말 그럴까. 필자는 이런 기사를 볼 때마다 불편함을 느낀다. 벽화 그린다고 달동네가 달라지지 않는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필자는 어린 시절 옥수동 달동네에서 살았다. 그 아픔과 서글픔은 살아보지 않은 사람은 모른다. 지워진 꽃담의 페인트는 회한을 더 짙게 만들었다. 감상을 뒤로 하고 꽃담벽화마을을 빠져나왔다. 바로 마장동의 최고층 아파트였던 세림아파트 정문이다. 정문에 재건축추진을 알리는 플래카드가 걸려 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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