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쁜 기억의 포로가 된 인간의 삶은 지옥과도 같다. 학교폭력, 가정폭력, 성폭력, 배우자의 불륜, 자녀의 죽음, 전쟁과 테러 따위로 인한 피해자들의 고통스러운 기억은, 그 자체로 한 인간의 영혼에 린치를 가하는 가혹한 형벌이다. 용량이 가득 찬 하드디스크를 정기적으로 정리하듯, 나쁜 기억을 정기적으로 지우고 비워내야만 하는 이유다.

과거 자신에게 일어난 일을 모두 기억하는 사람들도 있다. ‘과잉기억증후군(Hyperthymesia)’을 앓는 사람들이다. 몇백만 명 중 한 명이 생길까 말까 한 희귀한 증세라지만, 세계에 수십 명이 이 증후군을 앓고 있다고 한다. 장용민의 소설 궁극의 아이, 데이비드 발다치의 장편소설 모든 것을 기억하는 남자(Memory Man), 질 프라이스의 자서전을 전문작가 바트 데이비스와 함께 쓴 모든 것을 기억하는 여자따위의 소설들은 과잉기억증후군을 앓고 있는 사람을 주인공으로, 그들이 겪고 있는 고통스러운 삶과 극복과정을 그려낸다.

이런 운명을 타고난 사람들이야 어쩔 수 없다지만, 나쁜 기억을 본인 스스로 지우지 못하는 사람들의 고통과 상처 또한 길고 깊다. 아예 삶을 포기하고 죽기를 각오하지 않는다면, 어떻게든 지우려고 노력해야만 한다. 그래야만 온전하게 삶을 살아갈 수 있다. 더 심각한 경우는 타인에 의해 계속해서 나쁜 기억을 상기 당하며살아가는 사람들이다. 본인이 의도했건 아니건, 피해자들의 나쁜 기억을 계속해서 재생시키며 상처를 들쑤셔 놓는 망각 방해자들은, 그 자체로 정신적 테러리스트나 진배없다고 본다.

2014416일 인천에서 제주로 향하던 세월호가 진도 인근 해상에서 침몰하면서 승객 304(전체 탑승자 476)이 사망·실종된 대형 참사가 있었다. 이미 9년이 흘렀지만, 피해자와 유가족들의 고통과 상처는 제대로 치유되지 않고 있다. 검경합동수사본부는 201410월 세월호의 침몰 원인에 대해 화물 과적, 고박(賈舶) 불량 무리한 선체 증축 조타수의 운전 미숙 등이라고 발표했다. 한국해양심판원 특별조사보고서도 사건의 원인과 사후대책 방안을 충실히 제시했다. 국회에서도 관련 보고서가 만들어졌다. 참사가 일어난 그해에 이미 모든 원인이 밝혀지고 사후 대책까지 제시되었던 셈이다.

그런데 이 참사와 관련해 또다시 9차례 조사가 있었다. 선체 인양에 1400억 원, 조사위원회 운영에 800억 원 등 2,200억 원 이상이 들었다. 사회적참사위원회에도 39개월 동안 550억 원의 예산을 썼다. 하지만 새로운 진상이 조사됐다든지, 재발 방지에 획기적인 성과가 있지도 않았다. 재발방지 대책이라도 충실히 이행됐더라면 그나마 유가족의 상처는 상당 부분 치유되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유가족들의 고통과 상처를 정치적 목적 또는 자기들 단체의 유지를 위해 악용하는 사람들로 인해 해양사고는 전혀 줄어들지 않고 있고, 고통스러운 기억은 여전히 유가족들의 몫으로 남아 있다.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들의 사례는 또 어떠한가. 시민단체는 위안부 문제를 해결한다며 한쪽 눈을 실명한 김복동 할머니를 끌고 온 데를 다녔다. 게다가 피해자 할머니들을 위한 후원금을 빼돌려 개인 용도로 착복했다. 겉으로는 위안부 피해자들의 인권회복과 한·일간의 왜곡된 역사를 바로잡는 일을 한다고 했지만, 뾰족한 결과물은 없다. 도리어 위안부 문제를 빌미로 자신들의 생계와 돈벌이에만 정신을 팔았다는 비난이나 받았다. 이미 20년 전인 2004, “당신들은 언제 죽을지 모르는 위안부 할머니들을 역사의 무대에 앵벌이로 팔아 배를 불려온 악당들이라고 질타하던 할머니들(세계평화무궁화회 33)의 울부짖음이 아직도 귓가에 쟁쟁하다. 게다가 수십년간 위안부 할머니들의 치욕스럽고 고통스러운 기억과 상처를 긁어가며 만들어온 이력을 팔아 국회의원이 된 인간들도 있다. 정말 이래도 되는 것인가.

일제에 의해 징용으로 고통받은 피해당사자와 유족들은 또 어떤가. 그들 역시 반일팔이에 눈이 먼 정치권과 시민단체 따위에 의해, 진작 치유되었어야 할 상처가 아직도 아물지 않고 있다. 2018년 대법원에서 확정판결을 받은 징용 피해자 15명 중 12인은 이미 고인이 됐다. 과연 누구를 위한 죽창가, 누구를 위한 反日인가. 지금도 일부 시민단체에서는 배상금+알파라는 미끼로 단체행동을 제의하기도 했단다. 정부의 제3자 배상방안 발표 이후 민노총, 정의기억연대 등 600여개 시민단체들은 장외집회까지 했다. 도움으로 포장된 망각 방해, 피해자들에 대한 정신적 테러 행위나 마찬가지다.

소설 궁극의 아이에서 주인공 엘리스는 이렇게 절규한다. “당신은 머릿속이 온통 기억으로 가득 차 있다는 게 어떤 건지 죽었다 깨어나도 모를 거예요. 그건 평생 과거라는 철창 속에 갇혀 사는 거라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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