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극기와 촛불, ‘민주주의 상징’에서 진영논리로 퇴행
태극기·촛불, 평화와 민주주의 상징, 일방적 비호와 극단적 매도로 변질

낙엽으로 만든 태극기. [뉴시스]
낙엽으로 만든 태극기. [뉴시스]

[일요서울 | 박정우 기자] 일제강점기 애국의 상징으로 쓰인 ‘태극기’와 2002년 중학생들이 미군 장갑차에 깔려 사망한 이후 권력에 저항하는 국민의 외침이 된 ‘촛불’. 민주주의를 의미하는 두 상징은 오늘날 양 정치 세력의 진영을 대표하는 요소로 자리 잡았다. 최창렬 용인대 특임교수는 이를 두고 “극단적 팬덤정치”라며, “우리 사회가 객관적 사실을 추구하는 진정성을 가져야 한다”고 피력했다.

거리로 나온 태극기. [뉴시스]
거리로 나온 태극기. [뉴시스]

태극기는 1948년 8월15일 정부 수립 당시 중앙청(정부청사)에 게양됐다. 그해 9월 국회 본회의에서 국기에 대한 논의가 있었으나, 남북이 분단된 상황에서 국기를 제정하면, 통일에 어려움을 줄 것이라는 주장도 나왔다. 당시 국기에 대한 결론을 내리지 못했으나, 1949년 1월 이승만 대통령은 “국기를 제정해 전 국민이 통일되고 정확한 국기를 쓰도록 조처하라”고 총무처에 지시했다. 같은 해 10월 문교부가 국기제작법을 발표하며 태극기 도안이 확정됐다.

일제강점기 독립운동 단체들은 항상 태극기와 함께했다. 1919년 3·1운동, 1926년 6·10만세운동 때도 사람들은 태극기를 들고 만세를 외쳤다. 1945년 8월15일 해방 이후에는 거리로 쏟아져 나온 군중들이 태극기를 휘날렸다. 태극기는 일제강점기에 금지된 이래 독립의 상징이자 민족의 상징으로 오늘날까지 여겨졌다.

거리로 나온 촛불. [뉴시스]
거리로 나온 촛불. [뉴시스]

촛불은 역사와 전통이 깊은 비폭력 시위 방법으로 전해졌다. 1978년 샌프란시스코 시의원 하비 밀크가 총격으로 사망한 이후 3만 명의 시민이 촛불을 들면서 시작됐다. 대중화된 것은 1989년에 일어난 슬로바키아 독립 요구 집회다. 체코슬로바키아로부터 독립하기 위해 슬로바키아인들은 촛불을 들었다. 

우리나라는 여야 가릴 것 없이 2002년 미군 장갑차 사건 때 본격적으로 시작됐고, 2004년 노무현 대통령 탄핵 사태를 기점으로 다수의 시민이 참여하기 시작했다. 2005년 한나라당은 ‘개정 사학법 통과’를 규탄했고, 이명박, 박근혜 전 대통령도 촛불을 들었다. 박 전 대통령은 당시 “현 정권은 나라 무너뜨리는 파괴 정권”이라 발언했다. 이는 정권 퇴진 촛불의 시작점으로 불리기도 한다. 

이어 2008년 한미 FTA 쇠고기 파동과 2011년 반값 등록금 공약, 2013년에는 국정원 여론조작 의혹, 2014년에는 세월호 침몰과 관련해 촛불집회가 열렸다. 그리고 2016년 박근혜 탄핵을 요구하며 전국적으로 촛불집회가 불붙었다. 

시작은 시민들이 촛불을 들고 의견을 개진하는 행위였지만, 어느새 보수·진보 모두 참여하며, 한국 정치계의 가장 큰 문제점 중 하나인 진영론이 무너진 계기가 됐다. 독일 매체 ‘디 차이트’는 “아메리카와 유럽인들은 한국인으로부터 배울 수 있다. 어떻게 민주주의가 용기와 열정을 가지고 지켜내는지”라고 평하며, 촛불의 의미를 치켜세우기도 했다.

최창렬 용인대 특임교수. [일요서울]
최창렬 용인대 특임교수. [일요서울]

하지만 최창렬 용인대 특임교수는 “태극기와 촛불은 분화했다”며 “과거의 태극기와 촛불이 아닌, 일방적 비호와 상대 세력에 대한 극단적 매도가 이뤄지기 시작했다”고 밝혔다. 최 교수는 일요서울과의 인터뷰를 통해 구체적인 내용을 전했다. 

- 태극기와 촛불의 변질, 무슨 일이 있었나?
▲ 태극기는 박근혜 탄핵을 반대하는 진영의 대표적 상징으로 등장하기 시작했다. 이들은 반대 세력에 운동권, 주사파, 좌파 등의 이념적 굴레를 씌우고 매도했다. 자신들의 진영을 결집하기 위해 타 진영을 압살하고, 과격한 구호를 동원했다. ‘조국사태’ 때는 조국을 지지하고 검찰개혁을 주장하는 이들이 촛불을 들고 나왔지만, 이전의 촛불과 달리 진영을 배경에 드리우기 시작했다. 조국 일가의 혐의와 무관하게 조국을 비호하는 반지성이 촛불로 미화됐다.

- 구체적으로 두 사건을 꼽은 이유는 무엇인가?
▲ 박근혜 탄핵 사태를 구심점으로 대통령에 대한 맹목적인 지지가 이뤄졌다. 국정농단, 비선실세, 헌법 위반보다는 옹호 자체에 매몰되는 성향이 강했다. 태극기라는 상징을 통해 국가를 앞세워 범죄와 무관하게 무조건적 비호를 한 것이다. ‘조국사태’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헌법 체계를 위반해 탄핵 요구한 국민의 촛불은 국민주권주의의 상징이었다. 하지만 2019년의 촛불은 조국 일가의 범죄 유무를 벗어나 하나의 ‘팬덤’이 형성된 일방적 수호였다.

- 이들을 극단 세력으로 보는 이유는 무엇인가?
▲ 사건을 객관적으로 보려는 진정성이 부족하다. 사안을 보지 않고, 네 편 내 편에 매몰돼 있다. 팬덤정치, 진영논리에 빠져 있는 강성지지자라고 생각한다. 이에 우리 정치가 멍들고 있다.

- 색깔론·프레임이 언제부터 한국정치에 드리웠나?
▲ 군부독재 시절부터 국가보안법의 악용, 그리고 좌익이나 종북 등의 단어로 정적을 제거했다. 이념적 프레임을 씌워서 낙인을 찍는 것이다. 결국 안보와 연관돼 있다. ‘안보를 위해서’라는 논리로 진영과 진영이 대립하는 것이다. 현재 많이 완화됐지만, 여전히 잔재가 남아있다.

- 태극기와 촛불, 본연의 의미를 회복하기 위해서는?
▲ 태극기와 촛불 자체를 폄하한 것은 아니기에, 그것을 들고 나오는 세력이 변화해야 한다. 결국, 강성지지자들의 생각이 바뀌어야 한다. 보수와 진보를 대표하는 것 같지만 사실은 아니다. 맹목적인 지지자라고 볼 수 있다. 혹은 국가주의처럼 자신들이 ‘국가를 대표하는 중심이다’라는 이런 느낌을 주기 위해 그런 것도 있다고 본다.

- 극단적인 진영논리를 타파하기 위해서는?
▲ 양대 지지자들의 각성이 우선이다. 그리고 정당이 변해야 한다. 강성지지자들에게 편승하지 말아야 한다. 방송, 언론도 양쪽의 극단적이고 자극적인 의견만 과도하게 출현시켜 들어보는 것을 지양해야 한다. 

인터뷰를 마무리하며 최 교수는 “정치 지도자들 또한 이런 지지세력에 편승하려는 유혹을 떨쳐내야 한다”라고 덧붙였다. 국민을 대표하는 자리라면, 진정한 대표성이 무엇인지, 우리 사회 공공성의 방향이 일부를 대변하는 것인지, 다시 한 번 재고해볼 기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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