尹·李 쌍방의 '1호가 될 수 있는' 양곡관리법 
美 학계서 제시한 대통령 지지도 하락 위한 거부권 미끼 이론

윤석열 대통령 [뉴시스] 
윤석열 대통령 [뉴시스] 

[일요서울 l 박철호 기자]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의 1호 민생법안 ‘양곡관리법’이 윤석열 대통령의 1호 거부권 행사로 이어질 전망이다. 당초 양곡관리법은 여·야 간의 합의가 요원한 쟁점 법안 중 하나였지만 민주당이 거야(巨野)의 화력을 선보인 끝에 국회를 통과했다. 이에 한덕수 국무총리는 윤석열 대통령에게 거부권 행사를 요청한 상태다. 현재 이 대표의 민생법안은 최대 위기를 맞은 상황이지만, 민주당 입장에서는 그리 나쁜 상황은 아닐지도 모른다. 

與·野 강대강 대치 

양곡관리법 개정안은 수확기에 초과 생산량이 예상 생산량의 3~5% 이상이거나 쌀값이 평년 대비 5~8% 이상 하락한 경우 초과 생산량을 정부가 의무적으로 매입하는 것을 골자로 한다. 

양곡관리법은 이 대표의 1호 민생법안인 만큼 여·야의 핵심적인 쟁점 사항으로 떠올랐다. 민주당은 쌀값 폭락 시 농민의 생존을 위한 보호책, 국민의힘은 과도한 비용이 수반되는 ‘포퓰리즘’ 정책으로 평가하며 강대강 대치가 이어졌다. 

이에 김진표 국회의장이 나서 중재안을 제시했지만 타협은 이뤄지지 않았다. 결국 민주당은 단독으로 양곡관리법의 국회 본회의 통과를 이끌었고 공은 윤석열 대통령에게 넘어갔다. 

윤 대통령은 이미 작년 10월 20일 '도어스태핑'에서부터 "법으로 매입을 의무화시키면 격차가 벌어지고 과잉물량을 폐기해야 해 농업 재정낭비가 심각해진다"라고 지적하며 양곡관리법에 대한 거부권을 시사한 바 있다.

이렇다보니 양곡관리법이 실제로 국회를 통과하자 한덕수 국무총리는 지난 29일 공식적으로 윤 대통령에게 거부권을 행사할 것을 건의했다. 

대통령은 헌법 제53조에 따라 국회를 통과한 법안에 대해 거부권을 행사할 수 있다. 대통령의 거부권 행사 시 해당 법안은 국회로 재의되며 이 경우 국회의원 과반수의 출석과 3분의 2 이상의 찬성, 즉 200명의 동의가 필요하다. 

거부권 시사 = 尹 지지율↓

윤 대통령은 거부권이라는 강력한 권한이 있음에도 우선 "농민의 의견을 들어보라" 지시한 바 있다. 221만에 달하는 농심(農心)을 무시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는 윤 대통령이 최초로 거부권을 예고한 작년 10월 3주 차 리얼미터 대통령 국정 수행 지지도를 살펴보면 직관적으로 나타난다. 

당시 농림어업 종사자들의 국정 수행 지지도는 전주 대비 15.4%가 하락했다. 아울러 국민의힘에 대한 정당 지지도 역시 전주 대비 15.9%가 동반 하락했다.

반면 동일 여론조사에서 민주당에 대한 농림어업 종사자들의 정당 지지도는 20%가 상승했다. 

또 지난 3월 4주 차 리얼미터의 여론조사도 유사한 사례다. 지난 23일 양곡관리법이 국회를 통과하고 정황근 농림축산식품부 장관이 거부권 건의를 언급했을 때 농림어업 종사자들의 대통 국정 수행 지지도는 전주 대비 5.2%가 하락했다.

해당 여론조사들의 자세한 결과는 리얼미터 홈페이지와 중앙선거관리여론조사심의위원회 홈페이지를 참고하면 된다. 

584번 행사한 美 거부권 대통령 

대한민국 헌정사에서 대통령이 거부권을 행사한 사례는 드물다. 거부권은 75년간 총 66건이 행사됐으며 이 중 45건이 고(故) 이승만 전 대통령 시기에 행사됐다.

최근 문재인·박근혜·이명박 정부의 거부권 행사는 총 3건에 그쳤다. 문 전 대통령이 한 번도 거부권을 행사하지 않았으므로 윤 대통령이 1호 거부권은 8년 만의 권한 행사가 될 예정이다. 

반면 미국 정치사에서 대통령 거부권 행사는 총 2585건에 달한다. 고(故) 그로버 클리블랜드 전 대통령의 경우 6년의 재임 기간 동안 총 584회의 거부권을 행사해 '거부권 대통령'으로 불리기도 했다. 21세기에 재임한 대통령들도 평균적으로 10건 이상의 거부권을 행사했다. 

이처럼 미국은 민주주의의 역사가 오래됐으며 그만큼 거부권을 행사한 사례가 많으므로 이에 대한 학계의 연구도 풍부하다. 미국 프린스턴 대학교의 찰스 카메론 교수는 2000년에 저술한 책 'Veto bargaining'에서 대통령 거부권을 '비난 게임' 이론으로 설명한 바 있다. 

카메론 교수에 따르면 여소야대의 국면이 펼쳐지는 분점정부에서 입법권을 가진 야당은 국민들은 선호하지만 대통령이 수용할 수 없는 법안(선심성 복지정책)을 통과시켜 거부권 행사를 유도한다.

목표는 법안의 발의보다는 대통령의 지지도를 하락시키는 것이며, 선거가 임박해 국민의 이목이 쏠린 시점에 더 빈번하게 발생한다. 

빈곤 아동에 거부권 행사한 부시 

카메론 교수는 비난 게임의 대표적인 예시로 부시 전 대통령(아들 부시)의 사례를 제시했다. 부시 전 대통령은 미국 정치사에서 최장기간 거부권을 행사하지 않은 대통령이다.

‘CNN’의 지난 20일 보도에 따르면 부시 전 대통령은 2006일 동안 거부권을 행사하지 않았다. 하지만 부시 전 대통령은 임기 말에 들어 12회의 거부권을 몰아서 행사한다. 

부시 행정부의 임기 말 이라크전 장기화와 허리케인 카트리나 참사 부실 대응으로 인해 미국 민주당은 2006년 중간 선거에서 의회 다수당의 위치를 차지하게 된다.

다수당이 된 민주당은 아동의료보험 확대안을 의회에서 통과시켰다. 해당 법안은 빈곤 가정 아동에게 정부 지원 보험 혜택을 주고 복지 사각지대에 놓인 중산층 아동을 지원하는 것을 골자로 한다.

당시 부시 전 대통령은 성명서를 내고 해당 법안은 정부 예산에 큰 타격을 입힌다며 합리적인 의료보험 시스템은 민간 의료업계가 맡아야 한다고 입장을 밝혔다. 미국은 시장성이 강조되는 민간 위주의 의료보험 체계를 가진 국가로 유명하다. 부시 전 대통령은 해당 법안이 의료 공공성의 확대로 이어지는 첫걸음으로 인식했다. 

이와 관련 로이터 통신은 2007년 10월 17일 여론 조사에서 미국이 잘못된 방향으로 가고 있다고 대답한 응답자가 66%라고 밝히며 유권자들이 정부와 의회의 행보에 불행함을 느낀다고 전했다.

또 그 이유로 부시 전 대통령의 아동 의료보험 확대안 거부권 행사를 제시했다. 아울러 로이터는 이 분위기에서 2008년 11월 대선을 치를 경우 집권 세력에게 불리할 것으로 예상했다. 로이터의 예상대로 민주당은 8년 만의 정권 재창출에 성공했고 버락 오바마 전 대통령이 당선됐다. 

5발 더 남은 거부권 

카메론 교수는 대통령의 거부권을 유도해 다른 의미의 승리를 얻어내는 야당의 전략이 양극화된 정치의 특성임을 지적한다. 작금의 한국 정치는 ‘팬덤 정치’로 상징될 만큼 중간 지대가 상실된 채 양극단으로 달리는 모양새를 취하고 있다. 

민주당 입장에서도 지속적으로 법안의 단독처리를 강행할 시 입법의 실효성보다 정치적 이득을 취했다는 비판에서 자유로울 수 없을 전망이다. 그럼에도 이미 노란봉투법·간호법·방송법 등 쟁점법안들이 산적히 쌓인 상태다. 더군다나 법제사법위원회 통과가 요원한 대장동·김건희 여사 특검까지 본회의 패스트트랙(신속처리안건) 처리를 예고한 상황이다.

예정된 쟁점 법안들에 대해서만 거부권 행사가 이뤄져도 윤 대통령은 제6공화국 출범 이후 최다 거부권을 행사한 고(故) 노태우 전 대통령(7회)과 어깨를 나란히 할 가능성도 존재한다. 현재의 강대강 대치 정국은 22대 총선에 어떤 영향을 미칠 것인지 귀추가 주목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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