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동현, “평화와 통일 의미 국민 공감대 확산할 수 있어야”

북한 지역 판문각이 정면에 보인다. 국군과 유엔군이 북한을 향해 경계를 서 있다. [이창환 기자]
북한 지역 판문각이 정면에 보인다. 국군과 유엔군이 북한을 향해 경계를 서 있다. [이창환 기자]

[일요서울 | 이창환 기자] 최근 북한의 도발이 이어지는 가운데 정전협정 및 한미동맹 70주년을 맞아 민주평화통일자문회의는 ‘자유와 평화의 의미를 되새기고 통일안보 의지 고취를 위한 목적’으로 기자단, 자문위원, 사무처 직원 등과 함께 통일안보현장 견학을 진행했다. JSA 경비대대의 안내를 받아 판문점을 찾아 돌아오지 않는 다리, 자유의 집, 군정위 회의실, 장명기 상병 추모비 등을 견학하고 제3 땅굴을 찾았다.

4월19일 유독 날씨가 맑았다. 수일 째 이어지던 황사가 걷히고 통일안보견학의 의미를 알기라도 하듯 푸른 하늘이 펼쳐졌다. 이동하는 차창 밖으로 카메라를 들이댔지만 견학단을 안내하는 통일부 직원은 “민통선에 들어오면서는 외부 촬영을 할 수 없다”고 말했다. 아쉬움은 컸지만 눈에만 담기로 하고 열심히 살폈다.

판문점 최전선을 지키는 육군 제 1사단 전진부대. [이창환 기자]
판문점 최전선을 지키는 육군 제 1사단 전진부대. [이창환 기자]

통일대교를 지나는 길목에서 1사단 전진부대 국군 병력이 차량에 올랐다. 견학에 나선 이들의 신분을 일일이 확인했다. 1사단은 DMZ 수색을 비롯해 개성공단 출입관리와 GP 및 GOP 경계 등으로 국군 최정예 부대로도 알려져 있다. 

1사단 전진 부대 병력의 신분 확인과 차량 검사를 마치고 채 5분이 지나지 않아 JSA 경비대대 관할지역이 들어섰다. 이번에는 JSA 경비대대 소속 장병이 안내하는 유엔사 버스로 바꿔 탔다. 민간 차량의 출입이 통제된다는 의미다. 안내 장병은 남북을 경계로 하는 판문점 인근에서의 주의 사항을 수차례 반복해 전달했다. 

도끼 만행 사건 당시를 재현한 모형. 미군 소속 보니파스 대위가 쓰러져 있다. [이창환 기자]
도끼 만행 사건 당시를 재현한 모형. 미군 소속 보니파스 대위가 쓰러져 있다. [이창환 기자]

판문점 도착 직전, 돌아오지 않는 다리에 차량이 잠시 섰다. ‘돌아오지 않는 다리’. 남북 사이의 갈등이 극에 달하던 1970년대의 사건 중에서도 가장 기록적인 사건인 ‘1976년 도끼만행 사건’으로 군사분계선(MDL)에 있던 다리에 새겨진 이름이 됐다. 남북 사이에 놓인 다리 옆에 심겨있던 미루나무가 사건의 발단이 됐다. 

미루나무가 시야를 가려 북한의 동태를 살피는데 불편했던 1976년 8월18일 미군 소속 보니파스 대위와 베럿 중위가 다리 옆의 미루나무의 가지를 일부 쳐내기 위해 갔다가, 북한군들에 의해 도끼로 처참하게 죽임을 당했다. 이 사건으로 다리는 폐쇄됐고, JSA 내에 군사분계선이 설치됐다. 

군정위 회의실(T2)로 들어가는 길. [이창환 기자]
군정위 회의실(T2)로 들어가는 길. [이창환 기자]

판문점의 상징과도 같은 남북 장관급 회담 장소인 군정위 회의실(T2)을 찾았다. 창밖으로 문재인 전 대통령과 김정은 북한 노동당 총비서가 악수하며 오갔던 경계가 보였다. 누군가 뒤에서 한마디 했다. “50cm도 되지 않는 콘크리트 경계를 사이에 두고 남북이 나눠진 가운데 연일 미사일을 쏘아대니 가슴이 아리다”라는 말에 잠시 침묵이 흘렀다.

코로나19를 비롯한 내부적인 이유로 이제 더 이상 판문점에 경계를 서지 않는 북한. 우리 국군과 유엔 소속 장병만 북한의 판문각을 바라보며 경계를 서있었다. 자유의 집 옆에는 1984년 판문점을 방문했던 당시 소비에트연방(소련) 국적의 마투조크 기자가 남한으로 넘어오며 발발했던 총격전에 희생된 장명기 상병 추모비가 있었다. 그 앞에서 일동은 잠시 묵념했다.

제 3땅굴 도보관람로. 약 70미터 역갱도를 지나면서 지하로 내려가면 260미터 정도 땅굴을 걸어 들어갈 수 있다. [이창환 기자]
제 3땅굴 도보관람로. 약 70미터 역갱도를 지나면서 지하로 내려가면 260미터 정도 땅굴을 걸어 들어갈 수 있다. [이창환 기자]

다음 순서로 제 3땅굴을 찾았다. 북한 귀순자의 제보로 발견된 제 3땅굴은 약 240m 가량 견학이 가능했는데, 높이 2미터 폭 2미터에 이르지만 동굴 벽면에 의한 사고 방지를 위해 설치된 안전 장치로 연신 허리를 숙여 들어가야만 했다. 견학이 가능한 마지막 부분에 30cm 크기 정도의 유리창이 있었는데 그 너머로 활작 펴버린 고사리와 초록색의 풀이 자라고 있었다.

도라산전망대가 거의 마지막 순서로 견학단을 기다리고 있었다. 전망대에 올라 망원경에 눈을 대가 좌우로 놓인 남북의 경계 너머 멀리 개성공단이 보였다. 남북연락사무소 폭파 이후 교류도 없는데 ‘개성공단을 몰래 운영하고 있다’는 북한 소식이 뉴스를 통해 전해진 장소. 견학에 나선 이들은 저마다 무슨 생각을 했을까. 안보와 통일이라는 말은 대한민국 국민에게 익숙한 단어지만 익숙한 만큼 어려운 단어이기도 하다는 생각을 했다. 

북한의 최남단 민통선 내부 기정동 마을 한가운데 북한 지역임을 의미하는 인공기가 타워 꼭대기에 매달려 있다. 인공기 넓이는 약 120평으로 평시에는 무거워 잘 펼쳐지지 않고 강한 바람이 불 때면 확인할 수 있다고 한다. [이창환 기자]
북한의 최남단 민통선 내부 기정동 마을 한가운데 북한 지역임을 의미하는 인공기가 타워 꼭대기에 매달려 있다. 인공기 넓이는 약 120평으로 평시에는 무거워 잘 펼쳐지지 않고 강한 바람이 불 때면 확인할 수 있다고 한다. [이창환 기자]

안보 견학 마지막에 석동현 민주평통 사무처장과의 만남이 마련됐다. 석동현 처장은 취재진에게 “우리의 궁극적인 목표가 민주적 평화통일임은 분명하다. 하지만 지금 지속되고 있는 북한의 도발 상황은 우리가 기대한 상황이 결코 아니다”라면서 “우리가 기대하며 바라는 통일이라는 목적과 목표의식 앞에서라도 우리의 안보가 흔들리지 않도록 굳건하게 해야 한다. 그래야 진짜 우리가 바라는 통일을 맞이할 수 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도 “평화와 통일의 의미에 대해 국민적 공감대가 확산될 수 있기를 기대한다”고 덧붙였다.

한편 이날 윤석열 대통령은 로이터 인터뷰를 통해 북한에 대한 입장을 상세히 밝혔다. 윤 대통령은 “(그간) 선거에 임박해 남북 정상회담을 활용하고, 결국 남북관계가 원점으로 되돌아가기를 반복해왔다”라며 “과거에도 남북 정상들이 만난 적이 있으나 상당한 기간을 두고 단계를 밟아나가고 또 국민적인 지지를 받아가면서 정상이 만나 물꼬를 트고 갔더라면 남북관계는 거북이 걸음이었지만 꾸준하게 발전했을 것“이라고 돌아봤다. 

‘통일안보’라는 단어를 떼지 않고 붙여 부르며 찾았던 판문점과 비무장지대(DMZ)로의 이날 견학은 우리에게 직면한 안보 문제와 통일에 대한 공감대를 모두 느끼게 만든 시간이었다. 

군정위 회의실(T2) 내부 회담 테이블. [이창환 기자]
군정위 회의실(T2) 내부 회담 테이블. [이창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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