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건국 후 지난 75년에 이르는 남북한 대결의 역사는 ‘이승만의 길’이 옳았음을 말해 주고 있다. 최근 이승만 건국 대통령의 기념관을 건립한다는 정부 방침이 나왔고, 4·19혁명의 주역들도 이 대통령을 재평가하여 화해의 묘소 참배를 했다는 사실은 역사의 큰 진전이다. 오늘날 우리 사회 이념 갈등의 뿌리엔 반공 대 친북(용공)의 도식을 넘어 보수 우파 주류 내의 ‘자기 정체성 상실’에도 큰 원인이 있다.

국민의힘 김기현 당대표 체제 출범 후 최고위원들의 ‘설화(舌禍)와 당 지지율 하락으로 어수선한 모양새다. 그러나 태영호 최고위원이 지난 18일 한 언론과 인터뷰에서 “김구 선생은 김일성의 통일전선 전략에 (이용)당한 것”이라고 한 발언에 따른 ‘대외활동 자제’ 경고는 잘못되었고, 윤리위 징계는 더욱 안 된다.

태 최고위원의 발언은 역사적 사실이지 막말이나 김구 선생에 대한 폄훼가 아니다. 그는 국민의힘의 정체성에 맞는 발언을 했을 뿐이고, 이 발언을 역사 왜곡이라고 한 일부 언론과 민주당의 주장이 역사 왜곡이다.

좌우로 갈려 서로를 인정하지 않은 한국 정치는 ‘선악의 악순환’에 빠져있다.

지지 정당과 이념이 다르면 아무리 타당한 발언이라도 무조건 비난하는 진영 논리에 밀려 국민의힘 지도부는 종북좌파의 공격에 휘둘리고 있다. 국정을 책임져야 하는 집권 여당이 정체성을 상실하고 흔들려서는 분단 상황에서 체제수호와 조국 통일을 주도할 수 없다.

정상 궤도를 벗어나 나라의 근본을 위협하는 ‘현대사 논쟁’을 바로잡아야 한다. 건국의 원훈 우남(雩南) 이승만과 임시정부 주석 백범(白凡) 김구. 두 거인은 황해도에서 한 해 차이로 태어났고 같은 교도소에서 옥살이했지만, 실제로 만난 것은 상해 임정의 대통령과 경무부장으로서였다.

두 거인은 서로 협력하고 경쟁하면서 불운한 시대의 아픔을 함께 헤쳐 나갔다. 각각 현실과 이상, 정부 수립과 통일, 민주주의와 민족주의를 대변하는 ‘변혁적 리더’였고, 그들이 오늘의 대한민국을 있게 했다.

종북 좌파들은 이승만을 “미국의 앞잡이로 분단을 고착한 자”로 몰고, 우파 일부는 김구를 “대한민국 수립을 끝까지 반대한 친북 협력자”로 폄훼한다. 두 거인에 대한 이러한 비난은 건국 당시인 1948~1949년에도 똑같이 일어났는데, 이런 시각은 역사에 대한 곡해(曲解)이며 대한민국에 대한 모욕이다.

종북 좌파들이 이승만을 ‘분단의 원흉’으로 보는 논거로, 그가 남한 단독 정부 수립을 언급한 1946년 6월의 ‘정읍 발언’을 든다. 그러나 1946년 2월 38선 이북에 이미 세워진 북조선 임시인민위원회가 김일성 독재의 길을 연 사실상 한반도의 첫 단독 정부였기 때문에 맞지 않는다. 또한 이승만을 ‘미국의 앞잡이’라고 하는 주장은 미군정이 시종 이승만을 견제하면서 중도파를 지원했던 역사적 사실과도 맞지 않는다.

이승만은 정확한 국제정세 분석에 근거하여 ‘힘의 원리’를 잘 활용한 정치가였지만, 그 힘에 바탕을 둔 ‘파워 리더십’은 4·19혁명에 의한 자유당 정권의 몰락과 자신의 국외 망명이라는 불행을 초래하였다.

‘김구는 대한민국 수립과 관련 없는 인물’이라는 주장 역시 실제 역사와는 다르다. 철저한 반공주의자였던 김구가 1945년 11월 미군 수송기 편으로 귀국한 이후 이승만과 함께 대한민국 정부 수립 세력의 구심점이 됐으며, 반탁(反託)운동 등 숱한 정치적 행보에서 이승만과 손을 잡고 민중을 단합시켰다.

김구는 민족주의적 신념에 기반한 좌우합작과 남북협상에 뛰어들었으나 실패했다. 평양에서 김일성을 만나 대한민국 건국 반대 ‘공동성명’을 발표한 김구가 5.10 총선거를 거부하고, 김일성과 협상하자며 유엔의 대한민국 승인마저 반대한 바가 있다. 이처럼 김구가 대한민국 건국 과정에 적극 참여하지 않았던 부분은 역사적 공과(功過)에서 과(過)로 평가된다.

지난 3월 1일. 서울 탑골공원에서 열린 104주년 3·1운동 기념식에서 이승만의 며느리 조혜자 여사와 김구의 손자 김진 전 광복회장 직무대행이 손을 맞잡고 “두 분의 노선은 달랐지만, 독립을 위한 마음은 하나였다.”며 정치권과 국민이 화합해 어려운 시기를 헤쳐나가면 좋겠다고 당부했다.

독립운동에 함께 헌신했지만, 건국 과정에서 의견 차이로 갈라섰던 두 지도자의 후손이 ‘독립운동 정신 계승’이란 대의 앞에서 화해와 통합을 한 것이다. 이를 계기로 두 지도자의 위국헌신과 독립운동 정신을 연년세세(年年歲歲) 잘 이어가야 한다.

일요서울 논설주간 우 종 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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