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봉길 의사가 던진 것은 도시락 폭탄이 아니었다

윤봉길 의사 영정이 있는 효창공원 의열사에서 묵념하는 재일교포와 일본인 방문객. [이창환 기자]
윤봉길 의사 영정이 있는 효창공원 의열사에서 묵념하는 재일교포와 일본인 방문객. [이창환 기자]

[일요서울 | 이창환 기자] 다무라 미츠야키 교수는 굳은 표정으로 “어느 국가나 자신이 피해를 입은 것은 깊이 생각하지만, 자신이 누군가에게 피해를 준 것은 생각하지 않지요. 독일이 일본과 다른 점은 자신이 피해를 끼친 일에 대해 깊이 반성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독일은 불과 3년 전에도 나치 출신의 95세 남성을 재판에 세웠습니다. 그렇지만 일본은 자신들이 피해를 준 사실을 기억하지 않으려 합니다”라고 말했다. 지난달 27일 윤봉길 의사 의거 91주년을 맞아 한국을 찾았던 다무라 교수는 일본에서 활동하고 있는 매헌 윤봉길 의사 공의회 회장으로 일본의 한 대학에서 유럽정치사와 국제관계사를 가르쳤다. 

그들은 왜 윤봉길을 참배하나! 일본 시의원‧현의원 윤봉길 묘역 참배
홍커우 공원서 관동군 사령관 향해 던진 폭탄은 “물통 폭탄이었다”

1932년 4월 당시 일본 제국의 전승 기념행사가 진행되던 상하이 홍커우 공원은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됐다. 어디선가 날아온 물통 폭탄이 기념식장 단상을 향해 날아가 터진 직후였다. 군중들 사이를 비집고 단상 17미터 앞까지 나갔던 윤봉길 의사는 준비했던 물통 폭탄과 도시락 폭탄 가운데 도시락 폭탄을 내려두고 물통 폭탄을 던졌다. 현장에서 가와바타 테이지 상하이 거류민단장이 사망했고, 중상을 당했던 시라카와 요시노리 관동군 사령관 역시 사망했다.

당시 폭발로 총 5명이 사망했으며, 1명은 다리가 절단되고 또 다른 1명은 실명하는 중상을 당했다. 이 일로 관동군에 잡힌 윤봉길 의사는 다리가 절단된 관동군 사단장 우에다의 고향 가나자와 시(金沢市)로 후송돼 그해 12월19일 사형 집행을 당했다. 당시 그의 나이는 24세였다. 

윤봉길 의사에 대해 설명을 듣고 있는 박현택 거류민단장. [이창환 기자]
윤봉길 의사에 대해 설명을 듣고 있는 박현택 거류민단장. [이창환 기자]

윤봉길 참배하는 일본인 그들은 왜 한국을 찾나

지난달 27일 재일교포 4명과 일본인 3명이 서울 용산구 효창공원을 방문했다. 궂은 날씨에도 불구하고 대한해협을 건너온 이들은 삼의사묘(三義士墓)를 찾아 참배하고 의열사를 찾아 윤봉길 의사가 상하이에서 폭탄을 던졌던 과정에 대해 설명을 듣는 시간도 가졌다. 

이들 가운데 재일교포 대표는 박현택 거류민단장으로, 일본 암장지에 버려지듯 공원 묘소 한 귀퉁이 소각로 옆에 매장돼 있었던 윤봉길 의사의 묘소를 보존하고 관리했던 초대 암장지 보존회장 박인조 씨의 조카였다. 당시 박인조 회장은 숨을 거둘 때까지 묘소와 순국기념비 관리에 헌신했다. 윤봉길 의사의 묘소가 발견된 이후 1946년 유해가 한국으로 이송됐지만, 일부 유해를 암장지에 남겨둬 해마다 순국기념일이 되면 참배객들이 다녀간다. 

일본인 대표로 방문했던 다무라 미츠야키 매헌 윤봉길 의사 공의회 회장은 함께 방문한 이들과 함께 묘소를 참배하며 긴 심호흡을 했다. 그는 취재진에게 “한국인들의 애국 열사에 대한 감정과 그 의식을 느끼고자 직접 방문하게 됐다”라고 목적을 설명하면서 “윤봉길 의사가 민족의 해방자고 독립 운동가이며, 저항운동가라는 생각을 했다”라고 소회를 밝혔다. 

그와 함께 참배했던 다른 일본인은 6선의 모리 가즈토시 가나자와 시의원, 또 다른 이는 야마모토 유키꼬 이시카와 현의원 이었다. 이들 역시 일본에서 매헌 윤봉길 의사 공의회 소속 사무국장과 이사로, 일본 현지에서는 지식인으로 추앙받는 인물들이었다. 재일교포와 함께 윤봉길 의사를 기리는 이들은 어떤 계기로 동참하고 한국까지 방문하며 참배에 나오게 된 걸까. 또 현지의 일본인들은 윤봉길 의사에 대해 어떤 생각을 하고 있을까. 지금의 한일관계는 어떤 상황일까. 어떻게 나아가야 할까. 이들의 이야기를 간단히 들어봤다. 

참배하고 있는 방문객들. [이창환 기자]
참배하고 있는 방문객들. [이창환 기자]
월진회 서울지회와 일본지회가 함께 삼의사묘에 헌화했다. [이창환 기자]
월진회 서울지회와 일본지회가 함께 삼의사묘에 헌화했다. [이창환 기자]

다음은 다무라 미츠야키 교수와의 일문일답.

- 가나자와 시에 윤봉길 의사 암장지가 있다. 일본 현지 참배객도 있나.
▲ 암장지를 일본인들도 많이 찾는다. 특히 윤봉길 의사를 추모하는 토모노까이(友の会, 우의회)라는 단체가 있는데, 구성원이 거의 교사다. 학생 교육을 위해 방문하고, 또 배우고 가르친다. 나는 대학에서 유럽정치사와 국제관계사를 가르쳤는데, 수강생을 암장지에 데려 가서 한일 역사를 바로 심기 위해 교육했다. 독일에서 히틀러 정권에 대한 저항운동을 연구했고, 2차 대전 이후 독일정부가 어떻게 보상을 했는지 전문적으로 연구했던 몇 안 되는 전문가다.

- 식민 통치 시절 일본과 독일은 어땠나
▲ 독일은 전권위임법을 통해 식민지 국가, 폴란드나 체코슬로바키아, 유고슬라비아를 통치했다. 동일하게 일본은 치안유지법이라는 것을 통해 당시 조선과, 만주, 대만을 지배했다. 양 국가는 이런 식민지 국가에서의 국회 구성을 허락하지 않았고, 이 법들을 통해 국민들의 토지를 빼앗거나 쌀을 약탈했다. 

- 현재 한국 국민들이 일본에 사과를 요구하는데 일본 국민들의 생각은.
▲ 전후 처리과정에서 일본은 독일과 전혀 다른 모습을 보였다. 독일은 2000년대에 보상기금을 설치해 정부와 기업이 각각 50억 유로씩 100억 유로(약 7조3300억 원)를 마련했다. 반면 일본은 기업의 선의에 맡겨져 있다는 생각이다. 오히려 한국기업이 이를 위해 기금을 마련하려는 움직임이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 당연히 일본 정부나 기업이 기금을 마련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다만 일본이 그런 기금 조성을 하지 않는데 대해 여론을 확인한 바 있는데 60% 이상이 기금을 내지 않는 것을 찬성하고, 20% 정도만 이를 반대하는 입장이다. 식민지 탄압, 파시즘 정책은 일본이나 독일은 거의 비슷했지만 전후 보상은 독일과 일본은 큰 차이를 보였다.

- 역사 왜곡에 따른 반일 감정과 일본 우익의 혐한 감정의 차이는.
▲ 일본의 혐한 또는 한국의 반일 감정은 충분히 인식하고 있다. 그 이유는 일본에서 역사에 대한 바른 교육을 하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일본이 역사에 대해서 반성을 하지 않는다는 좋은 예로서, 독일은 1979년 (2차 대전) 모든 사건에 대한 시효를 철폐하는 법을 마련했다. 시효를 폐지했기에 지금도 1945년 이전에 지은 죄를 물을 수 있다. 그래서 나치 범죄에 대해서는 영원히 추적해서 책임을 추궁하도록 했다. 

- 일본이 역사 교육을 시킨다면 한일 관계는 더 나아질까
▲ 당연하다. 일본은 역사는 피해자 의식을 주입시키는 교육을 한다. 일본은 원폭 투하가 있었던 것에 대한 교육을 가르치고 있지만 피해를 준 것에 대해서는 가르치고 있지 않다. 일본에서는 지금도 윤봉길 의사를 테러리스트라고 말하는 이들이 많다. 당시 법은 일본의 군부가 명령으로 지정하고, 그 일방적인 법으로 한국을 통치했으므로 분명 큰 문제가 있었다. 

다무라 교수는 끝으로 “당시 표현의 자유나 언론의 자유 출판의 자유를 인정하지 않았다. 이를 요구하면 오히려 탄압했다. 저항을 하면 체포하고 바로 처형하는 탄압정치가 있었다. 혁명을 통해서 정권을 바꾸려고 노력했는데 윤봉길 같은 애국 열사들이 바로 그런 노력을 했던 것”이라고 말했다. 이후 다무라 교수 등은 지난 4월29일부터 이틀간 충남 예산에서 진행된 제 50회 윤봉길 평화축제에 참석했다. 

한편 윤봉길 의사의 유해는 1946년에 넘어왔다. 당시 박인조 씨 등을 비롯한 교포들이 암장지를 매입했다. 매입 과정에서 가나자와 시장과 시의회 의원들 및 교수들이 도왔다. 이후 매년 12월 월진회가 참배를 간다. 월진회(月進會)는 윤봉길 의사가 농민 경제를 위해 매달 한 걸음씩 나아간다는 의미를 붙여 만든 민간단체다.

효창공원 입구, 삼의사묘에 안치된 윤봉길 의사에 대한 설명이 있다. [이창환]
효창공원 입구, 삼의사묘에 안치된 윤봉길 의사에 대한 설명이 있다. [이창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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