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트콩 100명을 놓쳐도 1명의 양민을 보호하라”

베트남전과 관련 미군 보고서 가운데 하나. [이창환 기자]
베트남전과 관련 미군 보고서 가운데 하나. [이창환 기자]

[일요서울 | 이창환 기자] “우리는 수십 미터 간격으로 한 줄로 나란히 서서 작전 지역으로 들어갔다. 풀이 우거진 정글로 들어가면서 언제 어디서 공격을 당할지 몰랐다. 멀리서 들리는 소리나 다른 지역에서 일어나는 일을 신경 쓸 겨를도 없었다”. “마을에 다리도 놔주고 도로도 놔주고, 먹을 것도 갖다 줬다. 미군에게 받은 음식과 우리한테 보급된 것들을 받아뒀다가 모아서 마을 주민들에게 먹으라고 갖다 주기도 했다”. 대한민국월남전참전자회 사무실에 모인 참전자들은 취재진 앞에서 하나씩 자기의 이야기를 풀기 시작했다. 

베트남재향군인회장, “한국군 모범적, 민간인 돕고 지역 복구까지” 
참전 당시 국군 행정병, “군법 엄격, 위반자 모두 강제 귀국 조치”

베트남인 응우옌티탄이 국방부와 법무부 등 우리 정부를 상대로 주장하며 제기된 ‘한국 군인의 민간인 학살’ 소송에서 지난 2월7일 국방부와 법무부가 패소했다. 국방부와 법무부 등은 항소 의지를 밝혔고, 대한민국월남전참전자회(참전자회)는 강한 유감의 뜻을 밝혔다. 일요서울은 유감의 뜻을 내보인 그들의 옛 이야기를 청취하고자 참전자회를 찾았다. 

대한민국 국군의 베트남전 참전은 1964년 9월 동맹국 미국의 요구에 의해 제1차 파병에 본격 나서면서 시작됐다. 그렇게 1973년 3월 철수를 마무리할 때까지 약 8년6개월 동안 30만 명이 넘는 인원이 참전했으며 상시 약 5만5000명이 주둔했다. 

이 전쟁을 통해 국군 5099명이 사망했고, 1만1232명이 부상을 당했다. 전쟁이 끝났지만 수십년이 지난 이후 약 16만 명이 고엽제 피해자로 간주되면서 베트남전에 따른 참전자들의 개인 피해가 추가적으로 상당 부분 확인됐다. 

베트남재향군인회장과 대화 중인 월남전참전자회장(좌). [이창환 기자]
베트남재향군인회장과 대화 중인 월남전참전자회장(좌). [이창환 기자]

베트남전의 기억, 강력한 군법

베트남전 당시 국군에는 철저한 양민 보호를 위한 명령이 내려져 있었다. 초대 베트남전 참전군 사령관이었던 채명신 장군의 명령이었다. 이는 미군 기록에서도 유사한 내용으로 언급되고 있는 것으로 전해졌다. 

당시 행정병으로 근무했던 참전자는 취재진에게 “처음 전방에 투입돼 전투에 3개월 동안 참가했다가 이후 헌병대로 보내져 행정을 맡았다”라며 “군법에 회부된 사람들에 대한 서류를 정리하고 보고하는 임무를 했다”고 회상했다. 

더불어 “각 부대별로 문제가 생긴 군인에 대한 보고가 넘어오면 정리해서 헌병사령부로 넘겼다. 군기 위반이 몇 명, 사형수가 몇 명, 미결수가 몇 명 등 그렇게 9개월 동안 행정 업무를 맡았는데 군법이 엄격하다는 것을 몸으로 느꼈다”고 말했다.

그는 “베트남 전쟁을 치르는 동안 기소된 국군이 1만3000명이었는데 그 중에 사형 선고가 내려지는 사람들까지 있었다”라면서 “그 정도로 군법은 무서웠고, 베트남 양민들에게 고의로 피해를 끼치는 일은 상상도 할 수 없었다”고 덧붙였다. 

1만3000명이 헌병으로 넘겨져 군법에 회부됐으니, 8년간 매일 4~5명 씩 기소된 군인이 있었던 셈이다. 이날 모인 참전자들에 따르면 군법은 엄격했다. 기소된 이들 중 42명에게는 사형선고가 떨어지기도 했다. 그렇지 않더라도 기소되면 고국으로 돌려보내졌다. 강제 귀국은 곧 전역을 의미하기도 했다. 

이화종 참전자회장은 “이런 엄격한 군법아래 불법적인 일을 자행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억압돼 있었던 상황이었는데, 70~80명의 민간인을 학살했다면 결코 모를 리가 없다”라며 “그것도 시뻘건 대낮에 촌락작전을 진행하는데 70~80명이 모여 있었다는 것도 사실은 이해가 되지 않는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옹레니으득(ÔNG LÊ NHƯ ĐỨC) 하노이재향군인회장(좌)가 환영 행사를 열고 있다. [이창환 기자]
옹레니으득(ÔNG LÊ NHƯ ĐỨC) 하노이재향군인회장(좌)가 환영 행사를 열고 있다. [이창환 기자]

베트남재향군인회, 참전자를 환영하다

베트남재향군인회는 참전자회의 베트남 방문에 적극 환영의사를 보였다. 베트남 하노이재향군인회는 지난해 9월19일 “대한민국월남전참전자회의 하노이시 재향군인회 방문을 진심으로 환영한다”며 환영 행사까지 준비해 이들을 맞이했다. 

특이한 점은 베트남은 공산화로 통일이 됐고, 재향군인회 회원들은 베트남전 당시 미군이나 한국군 등 자유진영 국가의 연합군과 전투를 치른 베트콩 출신인사들도 많다. 그럼에도 이들이 한국군을 환영했다는 것. 

이들을 맞아 환영행사를 준비한 이는 옹레니으득(ÔNG LÊ NHƯ ĐỨC) 하노이재향군인회장은 국경수비대 정치부 부위원장 출신으로 베트남군에서 소장을 지냈다. 옹레니으득 회장은 “한국군은 모범적인 군인으로 알려져 있다”라며 “당시 파손된 마을의 복구를 돕는데도 앞장섰다”고 설명했다. 

참전자회는 이튿날인 20일, 베트남 정부 인사의 도움으로 호치민 국립묘지를 방문하고 의전도 받았다. 그리고 베트남 최대 규모의 절에서 진행된 국군 5099명의 위령제도 올렸다. 이화종 회장은 “함께 울고 아파했다”라면서 “베트남 군 소속 인사들도 국군이 전쟁 당시 민간인을 돕고 복구에 함께 했던 것을 잘 알고 있다”고 말했다. 

베트남전 직후의 미군 보고서. [이창환 기자]
베트남전 직후의 미군 보고서. [이창환 기자]

대규모 학살 흔적, 찾을 수 있을까 ‘현장 검증’

한 문화인류학자는 “당시 해당 마을에서 대규모 학살이 진행됐더라면 현장 검증이 여전히 가능할 수 있다”라며 “일본 홋카이도의 일제 강점기 강제 동원 흔적을 찾아내는 사례에서 고고학적 방법을 동원해 구분해내기도 했다”고 말했다. 

이는 양측의 의견이 대립되는 상황에서 증인 또는 목격자의 증언을 토대로 지역을 유추하고, 해당 지역의 토양 검증이나 흙의 변성 등을 토대로 역으로 추적해 규모를 줄여나가면서 일부 검증이 가능할 수 있다는 의미. 학살에 의한 매장이 있었거나, 매장 이후 시신이 이동됐다 하더라도 확인이 가능하다는 것. 일본의 경우와 동일한 조건이 아니라도 2심으로 이어질 경우 재판부 등이 현장에서의 검증은 할 수 있다는 성명이다. 

한편 영등포구에 거주하는 A씨는 “어린 시절, 베트남전쟁에 참전했던 이모부의 이야기를 자주 들었다”라며 “베트남전 참전 이후에도 군에 남아 계셨기 때문에 참전 당시의 생생한 전투 장면을 들려주셨고, 그곳에서 지냈던 과정에 대해서도 구체적으로 설명하셨다”라고 말했다. 

이어 “당시 장교로 참전하셨는데, 물론 전투 상황에서는 총격전이 오갔지만 베트콩이라고 해서 공격해 사살하는 것은 늘 쉽지 않은 일이었다고 회상하셨다”고 덧붙였다. 그러면서 “국군이 한 마을에 몰려가 양민을 학살했다는 것은 상상이 되지 않는다. 과연 무엇이 진실인지 무리는 모르지만, 정확한 원인 규명으로 정말 진실이 밝혀지길 바란다”고 당부했다.

의전받고 있는 월남전참전자회. [이창환 기자]
의전받고 있는 월남전참전자회. [이창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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