높은 사회적 신분에 상응하는 도덕적 의무를 뜻하는 ‘노블레스 오블리주’가 헌신짝이 되어버린 세상이다. 우리 역사에서 전 가족이 전 재산을 팔아 독립운동에 매진한 애국지사로는 석주(石洲) 이상룡과 우당(友堂) 이회영(李會榮, 1867~1932) 선생 등을 들 수 있다.

112년 전인 1911년 6월 10일. 우당은 만주 길림성 유하라는 산골에 독립군 지도자 양성을 목적으로 ‘신흥강습소(뒤의 신흥무관학교)’를 설립하였는데, 10년 동안 3,500명의 졸업생을 배출했다.

지난 5월 25일. 이종찬 전 국가정보원장이 제23대 광복회장에 당선됐다. 신임 이 회장은 우당 선생의 손자다. 문재인 정부 시절 ‘마패’를 휘두르다 낙마한 김원웅 전 회장이 어지럽힌 광복회가 본연의 모습으로 복원되길 기대한다.

우당은 일제에 나라가 망하자 “국은(國恩)과 세덕(世德)이 당대의 으뜸이라는 우리 집안이 어찌 왜적의 노예가 될 것인가?”라며 항일무장투쟁에 나섬으로써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실천하였다.

우당의 본관은 경주. 1867년 서울에서 이조판서 이유승(李裕承)과 동래정씨의 여섯 아들 중 넷째로 태어났다. 백사(白沙) 이항복이 10대조 선조이며, 여섯 명의 정승과 두 명의 대제학을 배출한 삼한갑족(三韓甲族)의 명문가 출신이다.

19세(1885)에 달성서씨와 결혼한 우당은 1907년에 병으로 아내를 잃고, 이듬해 이은숙과 상동교회에서 재혼했다.

우당은 봉건적 인습과 사상을 타파한 개혁적인 사상가였다. 집안의 노비에 대해 존댓말을 쓰고 평민으로 풀어주었으며, 청상과부가 된 누이동생을 개가(改嫁)시킨 데서도 그의 열린 사고를 알 수 있다.

우당은 ‘서전서숙’ ‘신민회’ ‘헤이그 특사’ ‘신흥무관학교’ ‘고종의 국외 망명 시도’ ‘의열단’ 등 국내외 항일운동의 전반에 깊은 발자취를 남겼다. 1907년 4월. 우당은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안창호를 중심으로 비밀결사 ‘신민회(新民會)’를 설립하여 애국계몽운동과 국외 독립군 기지 활동을 펼쳤다. 한편, 간도 용정촌에 ‘서전서숙(瑞甸書塾)’을 설립하고 이상설을 책임자로 하여 교포 교육에 주력하였다.

1910년 12월. 경술국치(庚戌國恥)가 되자 국외에 독립기지 마련을 위해 6형제가 전 재산(600억원 추산)을 팔아 일가·식솔 60여 명을 이끌고 만주로 망명하였다. 1911년 4월. 교민자치기관으로 ‘경학사(耕學社)’를 조직하였다.

1918년 오세창·한용운·이상재 등과 밀의한 뒤, 고종의 국외 망명을 계획하였으나, 1919년 1월 고종의 급서로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1923년부터는 신채호 등과 적극적인 아나키스트 운동을 전개하였다. 1924년 ‘의열단’을 후원하였으며, 매국 친일파를 제거하려고 ‘다물단(多勿團)’을 조직, 지도하였다. 1931년 만주사변이 발발하자 항일 구국연맹의 의장에 추대되었다.

1932년 11월. 우당은 주만 일본군 사령관 암살을 목적으로 상해에서 대련으로 배를 타고 가던 중 밀고로 일본 경찰에 잡혀 고문 끝에 뤼순 감옥에서 순국하였다. 그의 나이 66세였다.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퇴계(退溪) 이황 선생의 좌우명이 ‘사무사(思無邪, 생각함에 사악함이 없다)’였듯이, 우당 선생의 늠연(凜然)한 기상, 불굴의 지절(志節), 해활천공(海濶天空)의 도량은 지도자의 사표가 된다.

해방 후 이시영(우당의 아우, 초대 부통령) 선생이 환국(還國)했을 때 살아남은 가족은 20여 명밖에 되지 않았다. 내 것을 버려 모두를 구한 우당 6형제의 ‘솔가망명(率家亡命)’를 경모하는 필자의 자작 한시를 소개한다.

北征家率極邊行(북정가솔극변행) (경술국치 당하여) 온 집안 식구와 만주로 망명하여

露宿風餐忿淚藏(노숙풍찬분루장) 풍찬노숙하며 분하여 흘리는 눈물 감추고 있었네

烈士先鋒天命盡(열사선봉천명진) 독립운동에 열사의 선봉에 서 하늘의 명령을 다했고

僑民自治各其昌(교민자치각기창) 교민 자치 활동은 각각 저마다 창성하게 했네

忘身一敗形身歿(망신일패형신몰) 자신을 잊고 임무 중 체포되어 고문으로 순국했으니

爲國流芳億兆香(위국유방억조향) 나라 위한 이름 후세에 전하니 온 국민에 향기나네

封土漢江尙可塞(봉토한강상가색) 한강 물이야 흙 쌓아 막을 수 있다지만

忠魂永永倍榮光(충혼영영배영광) 충혼은 언제까지나 갑절로 빛나는 영예 되리라

일요서울 논설주간 우 종 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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