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16일 남한산성을 다시 찾았다. 남한산성을 예사롭게 볼 역사현장이 아니라는 생각 때문이었다. 다행히 멎을 줄 모르던 장대비는 잠시 물러났다. 하늘은 낮다. 여전히 비구름을 머금고 있다. 언제 소나기가 쏟아질지 모른다. 기억과 상상은 날씨와 함께 하는 것일까. 필자의 마음은 지난번 산행보다 훨씬 차분하다.

왕의 임시거처 행궁. 사진=김경은 여행작가
왕의 임시거처 행궁. 사진=김경은 여행작가

- 산성내 최고의 건축물 수어장대.지화문외 좌익문도 돋보여
2000년이란 시간 관통, 긴 역사 단숨에 파악할 수 있는 현장

일단 지난번 산행코스를 따라 수어장대까지 올라갔다. 성벽 길에 들어섰다. 밤길처럼 어둑하다. 길도 훨씬 거칠었다. 길은 패어 있다. 부러진 나뭇가지가 흩어져 있다. 폭우에 시달렸을 남한산성 성벽이 궁금했다. 성벽은 견고했다. 아니 구릉에 기댄 성벽이 산사태를 막고 있는 듯하다. 안심된 탓일까. 숲에서 박하 향기가 난다.

왕의 오른쪽에 위치, 우익문 삼전도까지 지름길

수어장대도 다시 둘러봤다. 수어장대는 2층이다. 그런데 뭔지 모르게 조화롭지 못하다. 장대함에 비해 납작한 느낌이랄까. 그렇다. 인조 때 지어질 당시 수어장대는 단층 건물이었다. 영조가 2층으로 다시 지었다. 아마 복층 구조로 만들면서 그렇게 된 듯하다.

수어장대를 빠져나왔다. 여기서부터는 산책로다. 왼쪽으로 송림 산림욕장이 있다. 200m을 걸었다. 성벽 너머는 강남이다. 흐린 날씨 탓에 멋진 경치는 볼 수 없었다. 실루엣만 비치는 롯데월드타워를 보다가 서문(우익문)을 지나칠 뻔했다. 우익문은 산책로를 돌아앉아 있다. 우익문이란 이름은 남한산성 행궁 오른편에 있다고 붙여진 이름이다. 왕은 행궁에서 남쪽을 향해 앉는다. 서문은 왕의 오른편에 있게 된 셈이다. 반면 행궁 왼편에 있는 동문은 좌익문이다. 우익문은 남한산성에서 삼전도까지 가장 편하고 빠르게 갈 수 있는 문이다. 이 때문에 우익문은 치욕의 문이 됐다. 인조가 청 태종에게 항복하기 위해 삼전도로 갈 때 이 문을 통과했다. 그래서 붙여진 별명이다.

인조는 우익문을 통과할 때 곤룡포도 입을 수 없었다. 신하가 있는 관복을 입었다. 인조는 언 땅에서 무릎을 꿇었다. 그리고 청 태종에게 세 번 절하고 아홉 번 머리를 조아렸다. 조선은 청의 신하가 됐다. 어마어마한 전쟁 배상금을 물어야 했다. 20만여 명의 백성이 청나라로 끌려갔다. 인조는 최명길이 올린 상소, 초두난액(焦頭爛額, 곧은 굴뚝을 굽히고 땔감을 옮겨 불을 피하라)의 경고를 왜 무시했던가? 필자 역시 회한의 역사 앞에서 백성의 고통을 생각했다.

북문..전승문 이름뒤 300 조선병 몰살의 아픔
 

행궁 내부, 사진=김경은 여행작가
행궁 내부, 사진=김경은 여행작가

산책로 따라 1km 남짓 내려오면 북문이 나온다. 공사 중이었다. 가림막을 통해 본 전승문은 축대만 쌓인 상태다. 공사 개요를 보니 공사 기간은 오는 10월까지다. 계획된 시간 안에 공사를 마무리할 수 있을지 걱정된다. 북문은 병자호란 때 아픔이 남아 있는 장소다. 인조는 정예병 300명을 보내 북문 밖의 청군에게 기습공격을 명했다. 하지만 매복한 청군에 의해 몰살됐다. 한 명도 살아남지 못했다. 변변한 전투조차 해보지 못한 채였다. 일명 법화골 전투. 북문에서 법화골까지는 약 1.5km 떨어져 있다. 정조는 이 치욕적 패배를 잊지 말자는 뜻에서 북문에 전승문(戰勝門)’이라는 이름을 하사했다.

행궁으로 가는 길에 백제의 시조 온조왕과 남한산성 축조 책임자인 총융사 이서를 모신 사당인 숭렬전을 들렀다. 숭렬전은 닫혀 있었다. 담을 따라 뒤편으로 갔다. 네 채의 건물이 추녀를 맞대고 서 있다. 사당치고는 꽤 넓고 많은 건물이 한 공간에 있는 셈이다. 아마도 두 사람의 위패를 모신 탓일지도 모른다.

그런데 좀 이상하다. 하나의 사당에 왕과 신하를 함께 모실 수 있을까. 숭렬전 설명문에 인조의 꿈과 관련 있다라고 적혀 있다. 어떤 꿈일까. 원래 온조왕의 사당(1464년 건립)은 충남 직산에 있었다. 정유재란 때 불탔다. 그것을 인조가 남한산성에 재건(‘온조왕사’, 1638)했다. 인조 꿈에 온조왕이 나타나 사당을 지어주어서 고맙다라면서 혼자는 외로우니 충직한 신하 한 명을 보내 달라고 했단다. 인조는 마침 부고를 접한 이서 장군을 함께 모시게 했다. 훗날 정조가 온조 사당 이름을 숭렬전이라고 지었다.

궁을 떠난 왕의 임시 거처 별궁 행궁

산성로타리로 내려왔다. 남한산성 행궁에 왔다. 이곳은 남한산성이 조선의 임시수도이자 흔치 않은 산성대궐임을 보여주는 값진 유적이다. 행궁은 임금이 한양 궁궐을 떠나 도성 밖으로 행차하는 경우 임시로 거처하는 별궁이다. 조선 시대의 유일한 반란이었던 이괄의 난을 겪은 인조가 신축(1626)했다. 병자호란을 피해 인조가 자신이 지은 남한산성으로 피신했다. 이 역시 역사의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행궁은 강점기에 일제의 방화로 완전히 소실됐다. 2002년과 2004년에 재건됐다.

행궁 외부. 사진=김경은 여행작가
행궁 외부. 사진=김경은 여행작가

정문인 한남루에 들어섰다. 행궁을 완벽하게 숨긴 외삼문이 탐방객을 가로막는다. 높은 계단과 견고하게 쌓은 담장이 궁궐의 품격과 위엄을 보여주고 있다. 거기가 끝이 아니다. 외삼문과 비슷하지만 조금 작은 중문이 또 나왔다. 그런데 특이한 것은 한남루-외삼문-중문 일직 선상에 있지 않다. 사선으로 마주하고 있다. 무슨 까닭이 있는 것일까.

드디어 왕의 집무실인 외행전(정당<正堂>이라고도 함)이 나왔다. 안에는 임금을 상징하는 일월오봉도와 옥좌가 놓여 있다. 외행전 바로 뒤편에는 왕의 생활공간이 내행전이 있다. 내행전 전체가 담으로 쌓여 있다. 내행전에 가기 위해서는 밖으로 나가서 작은 문을 통해 가야 했다. 대청도 있고 온돌방과 마루방도 있다. 재건하면서 이렇게 꾸민 것이다. 행궁이 지어질 17세기 당시 온돌은 궁궐에 없던 난방시설이다. 온돌방과 마루방에는 침구를 포함한 생활 도구가 진열되어 있다. 너무나 단출하고 간소해서 놀랐다.

조선 시대의 행궁은 남한산성을 포함해서 20여 곳이 남아 있다. 그중에서 유일하게 남한산성에만 종묘와 사직의 위패를 봉안하는 건물을 갖추고 있다. 그것이 바로 좌전이다. 명실상부한 산성궁궐임을 보여주는 시설이라고 할 수 있다. 좌전은 종묘처럼 궁궐(행궁) 왼편에 있다. 좌전이라는 이름도 여기서 연루한다. 대문이 잠겨 있다.

뜻밖의 유적, 통일신라시대 건물지 복원

국청사. 사진=김경은 여행작가
국청사. 사진=김경은 여행작가

행궁 안에서 뜻밖의 유적을 만났다. 통일신라 시대의 유적이다. 외행전 한쪽에 통일신라 시대의 건물지가 복원되어 있었다. 건물의 두께가 꽤 두꺼웠다. 2m가 되는 것도 있단다. 기와도 무게가 20kg이 넘는 것도 있단다. 지금보다 더욱더 튼튼한 집을 지었던 것일까. 또 행궁 담장 밖에는 이곳에서 출토된 기와 저장소가 마련되어 있다.

행궁을 나와 산성 곳곳의 유적지를 찾아 헤맸다, 인조 때 지어진 사찰인 국청사를 둘러봤다. 국청사 밑에는 한경직 목사의 우거처도 있다. 한 목사는 종교계의 노벨상이라는 템플턴 상을 받은 목회자이자 교육자였다. 우거처는 남의 집에 잠시 머문다는 뜻이란다.

산성로타리를 거쳐 남한산성로를 따라 걸었다. 남한산성의 교역중심지이자 장터인 성내장’, 군사들이 무술을 연마한 연무관, 병사와 군마의 수원지 역할을 한 지수당(연못) 등을 둘러봤다. 지수당 연못은 본래 3개였는데 지금은 두 곳만 남아 있다. 두 개 중 한 연못 가운데 작은 섬(?)이 조성되어 있다. 네 그루의 향나무가 한 그루의 낙락장송을 둘러싸고 있다.

또 서흔남의 비석도 있었다. 서흔남은 바로 인조를 업고 행궁으로 모신 백성이다. 이런 유적은 동문(좌익문)으로 가는 길에 있는 것들이다. 드디어 동문에 도착했다. 많은 사람이 남한산성의 최고의 건축물을 수어장대 혹은 지화문을 꼽는다. 필자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바로 좌익문이다. 능선으로 따라 올라가는 성벽의 출발지 좌익문이 있다. 성벽과 봉암 계곡이 잘 어울리는 건축물이라고 생각한다.

한경직 목사 거처. 사진=김경은  여행작가
한경직 목사 거처. 사진=김경은 여행작가

필자는 서울 유적지 곳곳을 탐방하면서 장소에 관한 관심을 두지 않았다. 늘 위인의 업적이나 뛰어난 유물에 더 신경을 썼다. 남한산성을 둘러보면서 그게 무척 어리석은 탐방법이라는 것을 알았다. 남한산성은 2000년이란 시간을 관통하고 있다. 그 긴 역사를 한숨에 파악할 수 있는 현장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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