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723일 종일 비가 내렸다. 끝이 안 보이는 장마를 뚫고 강남구 봉은사로 향했다. 지하철 9호선 봉은사역에서 내렸다. 과연 강남의 중심이다. 코엑스, 인터컨티넨탈 호텔, 현대아이파크 타워 등 마천루가 한눈에 들어온다. 비 오는 일요일 오후에도 사람이 북적인다. 유난히 외국인이 눈에 많이 띈다. 많은 외국 길손의 발길이 봉은사를 향하고 있었다.

봉은사와 연꽃. 사진=김경은 여행작가
봉은사와 연꽃. 사진=김경은 여행작가

강북 조계사 규모 못지 않은 강남 봉은사 주말 15000명 찾아
- 판전 현판 추사 김정희 죽음 앞둔 71세 때 쓴 마지막 작품 보물


[본문]봉은사에 도달했다. 수백 개의 화분에 담긴 연꽃이 필자를 맞이했다. 봉은사 연꽃축제(75~ 93)가 한창이다. 오랜만에 연꽃을 본다. 갓 눈을 뜬 봉우리, 막 봉우리가 터진 꽃, 그리고 활짝 그리고 환한 웃음을 띤 꽃……. 그런데 연잎은 하나같이 눈물을 머금고 있다. 마치 행복한 눈물을 짓는 듯하다. 연꽃 향기가 부처의 세상을 부른다. 불국토와 연화장으로.

불교 5대 명절 중 하나 백중고통받는 영혼 구원

꽃망울이 스콜성 호우에 떨어질까 걱정이라도 되는 것일까. 하얀 연등이 연밭을 덮고 있다. 그렇다. 곧 불교의 5대 명절 중 하나인 백중(伯仲, 음력 715)이다. 백중의 어원은 백 가지라는 의미인 백종(百種)’에서 유래했다고 한다. 사찰에서는 백중 때 우란분재(盂蘭盆齋)를 지낸다. 지옥에서 고통으로 신음하는 영혼을 구원하는 법회다. 이때 하얀 연등을 단다. 흰 연등은 망자에 대한 위로를 의미하다. 더불어 어긋난 삼업(三業, , )으로 지은 죄를 씻는다는 뜻도 담겨 있다.

연꽃과 연등 배경으로 인생샷을 하나 남기고 싶었다. 진지한 표정으로 셀카봉 셔터를 눌렀다. 사진 속에는 연꽃과 연등만 있는 게 아니었다. 서울이 걸어온 시간이 담겨 있다. 전통 사찰, 연꽃, 연등 그리고 초현대 건축물도 있었다. 의도하지 않았지만 다른 문화가 공존하는 현장을 확인한 셈이다.

봉은사 전각들. 사진=김경은 여행작가
봉은사 전각들. 사진=김경은 여행작가

봉은사에는 파란만장한 불교의 역사가 숨어있다. 강북에 조계사가 있다면 강남엔 봉은사가 있다. 조계사는 조계종 제1교구 본사다. 봉은사의 규모는 조계사에 못지않다. 전각이 무려 30개에 가깝다. 주말 방문객 수가 무려 15,000명이란다. 한 해 외국인 템플스테이 참가자가 1만 명이 넘는다.

봉은사는 연회국사가 794(신라 원성왕)에 창건했다. 당시 이름은 견성사였다. 절터도 지금의 선릉(성종의 왕릉) 자리에 있었다. 억불정책을 편 조선의 건국과 함께 다른 사찰처럼 견성사도 위기를 맞았다. 성리학에 근거한 주자가례가 정해진 이후 불교는 설 자리를 잃었다. 특히 성종은 일종의 승려 자격증을 주는 도첩제마저 폐지했다. 성종 이후 승려는 법적으로 존재할 수 없는 직군이었다.

그 차별이 어떠했는지를 보여주는 사례가 있다. 황언징이라는 선비가 견성사에서 불경을 훔쳤다. 이를 본 한 스님이 관가에 알렸다. ‘절도범 황언징이 처벌받아야 마땅하다. 그렇지 않았다. 스님이 참수형을 당했다. ‘유생을 고발한 요사스러운 중이라는 게 이유다. 명종실록의 한 대목을 인용한 박종인의 땅의 역사가 소개한 에피소드다. 스님에 대한 대접이 이 지경인데 사찰이라고 다를 리가 없다.

조선의 서태후문정왕후 봉은사 운명을 바꿔

견성사의 운명을 바꾼 이는 조선의 서태후로 불리는 문정왕후다. 그는 독실한 불교 신자였다. 불교를 중흥하고 싶었다. 군역 징수를 그 명분으로 삼았다. ‘양민이 군역을 피하려고 절로 들어간다. 절을 양성화해서 군역을 보충하자라는 게 그의 주장이었다. 문정왕후는 승과 제도를 부활했다. 이때 승과에 합격한 스님이 우리가 잘 아는 서산대사와 사명대사다. 그리고 견성사를 현재의 수도산 자락으로 옮겼다. 이름도 봉은사로 개명했다. 첫 계비인 장경왕후와 함께 서삼릉에 묻힌 중종의 능(정릉)을 선릉(성종)이 안장된 곳에 가까이 있던 견성사 자리로 이장(1562)했다. 그리고 봉은사를 선정릉의 원찰(선종수사)로 지정했다. 보우선사를 도대선사한선종사(봉은사 주지)로 임명했다. 원찰은 왕릉의 제사를 모시는 능침사찰이다. 보통 이름에 ()’ 혹은 ()’자가 들어간 사찰은 왕실이 관리했던 원찰이라고 보면 틀림없다.

봉은사 사천대왕. 사진=김경은 여행작가
봉은사 사천대왕. 사진=김경은 여행작가

봉은사에는 일주문이 없다. 대신 진여문이 있다. 진여(眞如)는 부처님의 세상으로 들어간다는 의미란다. 깨달음으로 세계는 쉽게 열리지 않는 것일까. 사대천왕문을 통과해야 한다. 그동안 많은 사찰에서 사대천왕을 봤다. 봉은사보다 큰 것은 본 일이 없다. 거기다가 너무 사실적이다. 도저히 법문을 지키는 수호신이라고 믿어지지 않는다. 무섭게 생겼다.

하얀 연등이 진여문에서 대도량인 법왕루까지 이어지고 있다. 연등이 수천 개는 될 듯하다. 촉촉이 젖은 봉은사, 연등이 뒤덮인 사찰 풍경은 환상적이다. 흡사 진여의 세상 같다. 하얀 연등이 먹구름으로 가려진 깜깜한 하늘을 덮고 있다. 환하고 밝다. 이 빛이 무너진 교권을 원망하며 죽어간 한 젊은 여교사의 원혼이라도 달랠 수 있으면 좋겠다.

일주만 대신 진여문....‘부처님의 세상으로 입문’ 

법왕루를 지났다. 계단 위로 대웅전이 보였다. 그러나 대웅전도 마당의 메운 연등에 몸을 숨기고 있다. 염불과 목탁 소리가 은은하게 들려온다. 대웅전 입구에 제사 중입니다라는 안내판이 서 있다. 도량에는 많은 가족이 모여 있다. 사진기를 들이 될 수 없었다. 대웅전을 둘러봤다. 대웅전 좌우로 지장전, 영산전, 영각, 심검당, 선불당, 매화당, 운하당 등 많은 전각이 포진해 있다.
 

추사 김정희선생의 마지막 서체. 사진=김경은 여행작가
추사 김정희선생의 마지막 서체. 사진=김경은 여행작가

그런데 조금 이상하다. 1400년이 넘는 고찰이건만 전각에서 고색창연한 역사가 묻어나지 않았다. 어떤 전각은 현대식 한옥처럼 보이는 것도 있다. 그렇다. 봉은사의 영화는 문정왕후의 수렴청정과 함께 끝이 나고 말았다. 특히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때 큰 화상을 입었다. 조선 후기로 넘어가면서 능침사찰로서의 위상도 유지하지 못했다. 선왕의 제사상에 올리는 제향 음식인 두부를 만드는 역할로 위축되고 만다. ‘두부를 만드는 절, 조포사(造泡寺)로 전락했다. 그 흔적이 바로 봉은사의 자랑인 향적원이다. 향적원은 공양간이다.

영조 때에 영파 성규 스님이 중건(1765)했다. 다시 1939년 화재로 전소됐다. 이 화재에 희생되지 않은 유일한 전각은 판전이다. 판전의 현판은 추사 김정희가 죽음을 앞둔 71세 때 쓴 마지막 작품이다. 또 판전에 추사와 남호 영기 스님이 함께 판각한 화엄경 소초 81권을 안치되어 있다. 이 밖에도 화엄경 판본 3,438점이 남아 있다. 판전은 봉은사의 보물이다. 판전에서 왼편으로 멀지 않은 곳에 추사 김정희 선생 기적비라는 이름의 비각이 서 있다. 흥미로운 것은 바로 비각 옆에 흥선대원군 영세불망비도 있다. 봉은사 땅 관련 송사를 대원군이 해결해 준 데 대해 감사를 표시한 비석이란다.

미륵대불. 사진=김경은 여행작가
미륵대불. 사진=김경은 여행작가

국내 최대 크기 미륵대불 부처 석상 위용

판전 오른편에는 강남의 번화가를 내려다보고 있는 거대한 부처님 석상이 서 있다. 봉은사가 자랑하는 미륵대불이다. 국내 최대 크기의 부처님이다. 높이가 무려 23m. 미륵대불 주변에는 23개의 보살 입상이 서 있다. 보살 입상 뒤로는 3,999개 미륵원불이 봉안되어 있다. 이 미륵대불을 완성(1996년 완공)하는 데 10년이 걸렸다. 1만 명이 불사에 참여했다.

봉은사 경내를 둘러보고 명상길로 접어들었다. 봉은사를 둘러싼 1.2km 숲길은 아기자기했다. 아무도 없는, 비 내리는 숲속은 첩첩산중 같은 느낌이다. 나무에 떨어지는 빗소리, 옷깃에 스치는 바람, 가끔 드러나는 봉은사의 전각, 오죽(대나무)의 푸르름과 불두화의 향기 그밖에 수많은 나무와 꽃들이 부처님의 자비처럼 오묘한 조화를 이루고 있다.

이 길은 봉은사와 경기고등학교와 경계다. 이 산책을 중심으로 반대편은 경기고다. 서울 4대문 안에 있던 고교는 1980년대 초에 강남으로 이전됐다. 경기고가 터를 잡은 곳은 바로 삼성동 토성이었다. 다시 말하면 봉은사가 있던 수도산 역시 백제의 흔적이 남아 있던 곳이라는 얘기다. 역사의 한 변곡점이 됐던 조선의 왕을 만나러 다시 강남대로를 걷는다. 선정릉으로 가는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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