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20일이다. 선정릉으로 가는 길이다. 봉은사에서 동북쪽으로 1.5km 떨어져 있다. 봉은사를 나와 큰길(봉은사로)을 따라 빗길을 걸었다. 삼성중앙역을 지나자 도로표지판에 선정릉역사길이 나왔다. 지하철 9호선 선정릉 둘러싼 돌담길이 바로 선정릉역사길이다. 굵어진 빗방울이 돌담길의 운치를 돋운다. 이 돌담은 녹지의 섬빌딩 숲을 가르는 경계선이다. 담 넘어 숲이 울창하다. 길 건너에는 다양한 디자인의 나지막한 빌딩이 이어졌다. 이 거리는 혹시 일식특화거리라도 되는 것일까. 유난히도 일본 선술집인 이자카야가 눈에 자주 띈다. 필자는 왠지 모르게 눈살이 찌푸려졌다. 선정릉의 내력을 알기 때문이다.

선릉. 사진=김경은 여행작가
선릉. 사진=김경은 여행작가

조선 성종과 계비 정현왕후 윤 씨를 모신 선릉
- 선정릉이 허묘(墟墓)가 된 이유보니...서글픈 역사

선정릉 입구(매표소)에 도착했다. 선정릉은 조선 성종과 계비 정현왕후 윤 씨를 모신 선릉(宣陵), 그리고 중종을 모신 정릉(靖陵), 이 세 분의 능을 모시고 있다. 그래서 삼릉공원이라고도 불린다. 조선왕릉은 통틀어 4273분이 있다. 이중 북한에 두 기가 있다. 우리나라에 있는 왕릉 40기는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되어 있다. 이 때문인지 잘 모르겠지만 모든 왕릉 입구는 기시감이 든다. 그것이 그것 같다. 똑같은 모양과 크기의 세계유산 돌비석이 있다. 비슷한 디자인과 모양의 안내판이 있다. 거기다가 왕릉의 대문, 그리고 대문 주변의 철책과 철책의 색깔과 문양이 똑같다. 그런데 선정릉 입구에는 다른 왕릉에서 볼 수 없는 게 눈에 띄었다. 선정릉의 전체 형태를 입체적으로 보여주는 동판이 있다. 시각장애인을 위한 점자 안내판이었다.

산책로 끝에 만난 재실, 4칸 일자형 한옥

재신. 사진=김경은 여행작가
재신. 사진=김경은 여행작가

선정릉 입구를 들어섰다. 왼편(서북쪽)으로 보이는 것이 성종의 무덤(선릉)이다. 왕릉으로 가는 길은 산책길이다. 울창한 숲과 산책로가 조성되어 있다. 비 오는 날이지만 걷는 데 불편하지 않다. 소나무, 참나무류 숲이 울창하다. 산책길 옆으로 도랑이 흐른다. 제법 물소리가 우렁차다. 냇물 속에 이끼가 앉은 작은 돌이 옹기종기 모여있다. 이들 작은 돌에서 선정릉의 역사와 자연의 숨결을 느낀다. 필자와 같은 생각을 하는 사람이 많은 것일까. ‘빗속의 탐방객이 생각보다 많다. 우산 하나만을 바친 연인, 휠체어를 탄 노부부, 사색에 빠진 청년, 강남 여행에 나선 외국인……. 신혼부부를 따르는 강아지도 산책에 나섰다. 사랑받고 있는 쉼터임을 알 수 있다.

산책로를 따라가자 재실이 나왔다. 일자형 4칸의 한옥이다. 깔끔하다. 제실에서 제사를 준비했다. 그런 측면에서 왕릉 제례가 시작되는 공간이라고 할 수 있다. 능에서 동남쪽으로 300~400m 정도 떨어져 있는 게 보통이다. 이어 선정릉 역사문화관이 나왔다. 능의 주인인 성종과 중종 그리고 정현왕후의 내력과 선정릉의 역사가 상세히 설명되어 있다.

선릉(성종의 능)의 대문인 홍살문에 도달했다. 멀리 선릉의 봉우리 윗부분이 보인다. 선릉도 비를 피하려는지 초록색 비닐 우비를 착용하고 있다. 장맛비에 봉분이 유실되지 않도록 조치한 것으로 보인다. 홍살문 이곳부터 제례 공간이다. 홍살문은 신성한 지역임을 알리는 표식이다. 홍살문에서 정자각까지 이어지는 돌길을 참도라 한다. 참도는 왕이 다니는 어도와 선왕의 영혼(신위)가 다니는 신도가 있다.

선릉에는 성종이 정릉에는 중종이 없다?!

중종의 능. 사진=김경은 여행작가
중종의 능. 사진=김경은 여행작가

필자도 왕의 길로 정자각을 향했다. 정자각은 제사상을 차리는 곳이다. 궁금증이 일었다. 이 정자각에서 왕릉 제사를 올렸을까? 무슨 바보 같은 소리냐고 묻는 독자가 있을지도 모른다. 이런 의문은 갖는 이유는 이 왕릉은 허묘(墟墓)이기 때문이다. 헛무덤이라는 얘기다.

임진왜란이 발발하고 다섯 달이 지났다. 1592년 음력 927일 광해군에게 충격적 소식이 날아든다. “선정릉이 파헤쳐지는 변괴가 있었다라는 보고였다. 조선 조정에서 사실 확인에 나섰다. 그 결과는 참혹했다. 성종의 시신은 행방이 묘연했다. 관 속에는 재만 남아 있었다. 중종의 분묘도 파헤쳐졌다. 정체불명의 시신이 불탄 채 능 밖에 버려져 있었다. 심지어 무덤 속에서 밥을 지은 흔적도 남아 있었다. 조정은 범인 색출은 고사하고 진실규명조차 실패했다. 시신이 중종인지 그 여부조차 확인할 수도 없었다. 결국 선왕 두 사람의 시신 없이 선정릉을 정비해야 했다. 선릉에는 성종이 없다. 정릉에도 중종이 없다. 왕릉은 조선에서는 최고로 신성한 곳이다. 이곳이 일본에 의해 만신창이가 된 것이다. 여기서 하나 짚고 넘어가자. 일본인이 왕릉을 헤집은 것은 그 속에 보물이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었을 것이다. 물론 조선왕릉에 왕이 생전에 쓰던 보물을 매장했다. 하지만 그것은 모조품이었다. 아마도 일본 도굴범이 자신이 찾던 보물이 나오지 않자 옥체에 손댄 것으로 보인다.

일본 사죄 국서 위조 사건과 야나가와 사건

쓰러진 난간석주. 사진=김경은 여행작가
쓰러진 난간석주. 사진=김경은 여행작가

훼손된 왕릉은 선정릉만이 아니다. 강릉(명종), 태릉(문정왕후), 헌릉(태종 부부)도 침탈당했다. 하지만 다행히도 파괴 정도는 심하지 않았다. 이 같은 국격을 떨어뜨린 일련의 사태는 무능한 선조가 자초한 일이다. 선조는 국토와 백성을 팽개친 채 명나라로 도망갔다. 죽음으로 왕업과 백성을 지키겠다는 말은 수없이 했다. 모두 거짓말이었다. 그 사이 일본군은 종묘를 불태웠다. 왕릉을 도륙했다. 배신당한 백성도 경복궁, 창덕궁, 창경궁에 불을 질렀다.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이 끝났다. 조선은 일본에 전쟁책임을 묻고 피해배상을 요구했다. 일본의 사과와 범릉지적(왕릉을 훼손한 도적)’ 압송이 요구사항 전부였다. 승전국(?)의 관용인가. 기가 막힌다. 일본은 결국 쓰시마 출신의 두 명의 범릉지적을 보내왔다. 그리고 일왕 도장이 찍힌 사죄 국서를 보내왔다. 물론 이것 역시 대마도주 소 요시토시가 조작한 가짜였다. 조선과의 교역 확대를 위해 만들어낸 범인이고 위조한 문서였음이 나중에 밝혀졌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선조는 진범이 아니라도 일본 놈은 모두가 적이 아닌 자가 있겠느냐며 애꿎은 두 사람을 처형하게 했다. 그리고 “‘헌부례만 하지 않으면 된다라고 덧붙였다. 헌부례는 전쟁포로를 종묘에 바치는 의식이다. 종묘까지 속인 셈이다. 국서 위조 사건은 이미 엎질러진 일이다. 어쩔 수 없게 됐다. 그냥 넘어갔다.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그 책임을 물어 쓰시마 주였던 고니시 유키나가를 처형했다. 국서 위조 사건을 일본에서는 야나가와 사건이라고 한다.

정현왕후의 능이 동원이강능인 까닭은...

선정릉 산책길. 사진=김경은 여행작가
선정릉 산책길. 사진=김경은 여행작가

속상한 마음을 접고 다시 산책길을 따라갔다. 정현왕후의 능은 건너편 동북쪽의 숲속에 있다. 꽤 먼 거리다. 다른 봉우리에 부부의 능이 마주 보고 있는 셈이다. 그래도 하나의 능으로 친다. 이런 양식의 능을 동원이강능이라고 한다. 그런데 특이사항이 있다. 보통 왕릉에는 목책으로 접근을 막고 있는다. 그런데 왕릉까지 계단으로 이어져 있다. 왕릉까지 접근할 수 있도록 배려하고 있다. 이 역시 헛무덤인 까닭인가. 정현왕후 능으로 오르는 계단 옆에는 쓰러진 비석이 하나 있다. 난간석주다. 능 보수과정에서 파손되어 능 주변에 묻혀있던 것이 드러난 석주다.

한참 산책길을 걸었다. 소나무 숲이 나왔다. 중종이 잠든 정릉이다. 중종은 성종의 아들이다. 중종의 능은 원래 경기도 고양시 서삼릉에 안장되어 있었다. 함께 영면하길 원하는 문정왕후에 의해 이 자리로 옮겨졌다. 그러나 문정왕후의 묘터는 풍수상 결함으로 중종과 함께 묻히지 못했다. 그의 능은 태릉에 있다.

중종은 연산군을 몰아내고 왕좌를 차지했다. 반정 당시 부인이던 단경왕후는 중종의 즉위와 함께 폐위됐다. 아버지가 바로 반정에 반대하던 신수근(당시 우의정)이었기 때문이다. 다시 정경왕후는 인조를 낳고 곧 죽었다. 그 뒤를 이은 이가 바로 조선의 서태후인 문정왕후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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