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년 전, 광복절 경축식 기념사에서 김원웅 광복회장은 상해 임시정부 때부터 국내외 모든 공식행사에서 ‘국가’로 불려 온 ‘애국가’를 폐지해야 한다는 폭탄 발언을 한 바 있다. 민족반역자가 작곡한 노래라는 이유 때문이다.

대한민국의 반국가세력들이 친북주의 작곡가 윤이상과 애국가를 작곡한 안익태(安益泰, 1906~1965) 선생에 대해 ‘이중 잣대’를 들이대는 것은 대한민국의 정체성을 부정하는 이적행위이다.

1918년 평양 숭실중에 입학해 친일교사 축출의 주동자가 돼 정학 처분을 받고, 1919년 3.1운동 때 만세운동에 참여하고 수감자 구출 운동에 가담해 제적당하고, 독립의 염원을 담은 <한국환상곡>을 작곡한 안익태가 친일파일 수는 없는 법이다.

안용환 안양대 석좌교수는 “안익태는 미주·유럽에서 활동할 때 <한국환상곡>의 4장 <애국가> 부분은 꼭 한국말로 부르도록 주최 측에 요구했고, 받아들여지지 않으면 그 곡을 지휘하지 않았다.”라며 “이러한 내면적인 사상은 보지 않고 단순히 기념행사장에서 <만주국>을 지휘했다는 이유만으로 친일파로 매도하는 것은 옳지 못하다.”라고 지적한 바 있다.

안익태는 1906년 평양에서 안덕훈과 김정옥 사이의 칠 형제 중 셋째로 태어났다. 본관은 순흥이다. 숭실중학교에서 퇴학당한 뒤, 15세(1921)에 동경 세이소쿠중학(正則中學)에 음악특기자로 입학해 본격적인 음악 공부를 시작하였다.

일본에서 공부를 마친 안익태는 1930년에 미국 신시내티음악대학에 입학하였고, 신시내티교향악단에 입단하여 동양인 최초의 첼로 연주자가 되었다. 1935년에 다시 오스트리아 빈에서 거장 슈트라우스에게 지휘법을 배웠다.

일제강점기 당시 우리 민족은 스코틀랜드 민요인 ‘올드 랭 사인’에 애국가 가사를 붙여 불렀다. 이에 안익태는 “민족을 하나로 묶어 주는 국가를 작곡하자.”고 다짐하고 애국가 작곡을 시작했다. 2년 뒤 드디어 〈한국 환상곡〉을 만들었다. 안익태는 이 악보를 샌프란시스코에 있는 대한국인회와 상하이에 있는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보냈다.

오스트리아 빈에서 <애국가>를 완성한 그해(1936) 8월 1일. 안익태는 베를린 올림픽에 참가한 손기정 등 7명의 한국 선수를 입장식이 끝난 뒤 찾아가 <애국가> 악보를 내놓고 “여러분을 위한 나의 응원가”라며 함께 목 놓아 부르면서 나라 잃은 설움을 달래기도 했다는 비화가 전해진다.

1940년까지 슈트라우스의 보조지휘자로 있다가 그 이후부터는 독일, 스페인 등지에서 독자적 지휘활동을 하고 1946년에 스페인 여인 롤리타 탈라베라 안(Lolita Talavera Ahn)과 결혼, 스페인 국적으로 마드리드 마요르카 교향악단의 상임 지휘자가 되었다.

1948년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면서 <애국가>가 국가로 지정되었다. 대한민국 여권 1호 안익태는 1955년에 한국을 떠난 지 25년 만에 귀국하였다. 국립교향악단과 KBS교향악단을 지휘하였고, 서울에서 국제음악제를 열었다.

1965년 9월 16일. “세계 각국의 청중들은 나를 환영하는데 내 조국은 어찌하여 나를 냉대하는가?” 일본 NHK에서도 <한국환상국>을 지휘한 안익태는 이런 탄식을 쏟으면서 고국을 떠나 먼 이역 스페인에서 운명했다. 사후(1965) 문화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되었다. 작품에 <강천성악(降天聖樂) <한국환상곡> <애국선열추도곡> 등 다수가 있다.

예술은 정치나 이데올로기에서 벗어난 독립적인 영역에 있다. 20세기 초·중반 세계를 주유(周遊)한 동양 최고의 지휘자, 음악을 통해 나라 사랑의 진정한 의미를 가르쳐 준 안익태 선생을 경모하는 필자의 자작 한시를 소개한다.

渡東志學志宮商(도동지학지궁상) 열다섯에 동경으로 건너가 음률에 뜻을 두었고

切琢登壇聚滿堂(절탁등단취만당) 절차탁마 후 등단하자 만장의 관객이 모여들었네

完奏全身皆絶調(완주전신개절조) 온몸으로 연주하면 모두 훌륭한 곡조가 되었고

一觀聽衆忽平康(일관청중홀평강) 한 번 관람한 청중은 홀연히 평안을 느꼈네

惜言唱魄驚聲界(석언창백경성계) 우리말로 부르는 노래 넋은 음악계를 놀라게 했고

憂國歌魂動大方(우국가혼동대방) 우국하는 가요 혼은 세계 거장들을 움직였네

短棒周遊天下盡(단봉주유천하진) 지휘봉 하나 들고 천하를 두루 돌아다녔고

逢場作戱五洲煌(봉장작희오주황) 어디서든 공연을 펼쳐 오대양을 빛나게 했네

일요서울 논설주간 우 종 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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