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남의 핫플레이스로 간다. 신사동 가로수길~압구정 로데오거리~청담동 명품거리를 돌아볼 생각이다. 다양한 맛집과 예쁜 카페, 볼거리·놀거리로 주목받는 강남의 핫플레이스. 대한민국 멋쟁이들의 일상이 궁금하다. 그들은 어느 카페에서 어떤 음료를 먹을까. 어느 브랜드에서 어떤 옷을 살까. 그리고 어떤 이야기를 나눌까.
 

도산공원 입구. 사진=김경은 여행작가
도산공원 입구. 사진=김경은 여행작가

강남의 핫플레이스 로데오거리 청담동 명품거리 까지
안창호, 낙망 청년의 죽음이요, 청년이 죽으면 민족이 죽는다

지하철 3호선 신사역 8번 출구로 나왔다. 84일 오후 신사동 거리는 뜨거웠다. 땡볕에 달궈진 아스팔트에서 열기가 모락모락 피어오른다. 강남 사람의 삶은 날씨처럼 뜨거운 것일까. 도산대로는 붐볐다. 사람과 자동차로 넘쳐났다. 특히 신사역 8번 출구는 그랬다. 가로수길로 가는 사람의 만남의 장소인가? 가로수길을 향해 가는 데 한 여성이 환한 웃음으로 필자의 발걸음을 잡는다. 우크라이나 어린이 돕기 후원단체에서 나온 자원봉사자다. 그의 이마에는 땀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신사동 뒷골목, 반기는 128그루 은행나무

불과 몇 걸음을 걷지도 않았다. 비 오듯 땀이 흐른다. 힘들다. 괴로움은 폭서만 주는 게 아니다. ‘폭광(暴光)’도 고통이다. 빌딩 그늘 하나 없는 뙤약볕이다. 뒤를 돌아봤다. 자원봉사자는 이리저리 뛰어다니고 있다. 살이 타는 아픔은 아랑곳하지 않는 듯하다.

가로수길은 신사동 뒷골목이다. 신사역 8번 출구에서 현대고등학교까지 680m에 이르는 왕복 2차선 길이다. 가로수길 나들이는 처음이다. 낯선 길이다. 호기심은 눈을 크게 뜨게 한다. 골목길에 접어들었다. 첫눈에 들어온 것은 가로수다. 은행나무 가로수다. 가로등처럼 규칙적 간격으로 줄지어 서 있다. 그 끝이 보이지 않는다. 이 거리에는 128그루의 은행나무가 있다. 은행나무 가로수는 특별한 것은 아니다. 아니 가장 흔한 가로수다. 서울에는 약 307,000그루의 가로수가 있다. 그중에 108,000그루가 은행나무다. 35.1%나 되는 셈이다. 그런데 왜 이 길이 주목을 받는 것일까.

가로수길 은행나무. 사진=김경은 여행작가
가로수길 은행나무. 사진=김경은 여행작가

은행나무가 한여름 땡볕을 가려 주지 못했다. 나뭇가지가 치렁치렁하고 하늘을 덮고도 남는 풍성한, 그런 은행나무가 아니다. 홀쭉한 가지는 하늘을 향해 뻗고 있다. 아마도 상점의 간판을 가리지 않도록 단발령(가지치기)’이라도 내린 것일까. 그게 아니다. 메타세쿼이아처럼 하늘을 향해 자라는 패스티기아타라는 은행나무 종자란다.

여기서 독자에게 퀴즈를 하나 내겠다. 은행나무는 활엽수일까, 아니면 침엽수일까. 아마 눈치 빠른 독자는 질문의 의도를 짐작했을 것이다. 활엽수라면 굳이 물어볼 까닭이 없을 것이라고. 그렇다. 은행나무는 침엽수다. 침엽수의 특징을 고루 갖추고 있다. 은행나무는 나라식물이다. 꽃잎 없이 꽃이 피는 나무다. 또 소나무(3)와 젓나무(5)처럼 나뭇잎이 한 곳에서 모여난다. 은행잎에는 4~6개 줄이 있다. 이것이 바로 모여나기의 흔적이다. 은행잎은 은행나무가 침엽수에서 활엽수로 진화하는 과정을 보여주는 셈이다.

여성의 향기와 농염함이 물씬’ 느껴지는 거리

이 길이 주목받는 진짜 이유는 별난 은행나무 종자에 있는 건 아니다. 본격적으로 가로수길을 걷는다. 예쁜 카페와 아기자기한 상점이 늘어서 있다. 여성의 향기가 난다. 이국적인 정취가 물씬 풍긴다. 각양의 디자인을 가진 건물, 그리고 예술품 같은 전시상품에서 여성의 취향이 느껴진다. ‘농염한 품위를 만끽할 수 있는 뉴욕 소호 거리처럼. 거기다가 세계적 프랜차이즈 브랜드와 플래그십 스토어가 들어서 있다. 마치 패션 로드숍 같다. 애플, H&M, 토미, 메종키츠네, 스타벅스, 라코스테, 고디바, 아디다스, 리바이스, 진다이하이드, 오렌즈, 마리아꾸르끼, 디스커버리…….

이 거리를 밤에 걷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쇼핑마니아들도 필자와 같은 생각일까. 거리가 한산하다. 쇼핑백을 들고 활보하는 사람들을 찾을 수 없다. 간혹 길에 마주친 사람은 거의 중국말 하고 있다. 자동차만 분주히 오간다. 단지 날씨 탓으로 돌리기에는 뭐가 석연찮은 이유가 있을 법하다.

도산안창호 비. 사진=김경은 여행작가
도산안창호 비. 사진=김경은 여행작가

우리나라의 가로수 수종을 보면 길의 연역을 알 수 있다. 시기별로 다른 수종의 가로수를 채택했기 때문이다. 1990년대에는 은행나무가 가로수의 대세였다. 신사동 뒷골목에도 이 무렵부터 은행나무를 심었을 것이다. 은행나무 가로수가 심어질 즈음 소상공인이 모여들었다. 노란색으로 물든 고혹적 은행나무 가로수길은 당시 상권의 전령사가 됐다. 화랑과 화구 상점이 들어섰다. 극장이 입주했다. 개성 만점의 디자이너 숍도 자리를 잡았다. 특색있는 카페와 이색적인 찻집 그리고 세계 각국의 레스토랑도 한자리를 차지했다. 가로수길에 예술과 문화가 피어난다고 했다. 은행나무 가로수길은 뜨는 길의 상징이 됐다.

사람이 모이면 돈도 모인다. 부동산은 돈의 흐름에 밝다. 집값과 임대료가 올랐다. 가로수길의 터줏대감은 임대료 부담을 이기지 못했다. 하나둘씩 이 거리를 떠났다. 그 자리를 대기업 브랜드가 차지했다. 가로수길은 일명 젠트리피케이션 현장인 셈이다. 멋과 맛은 예전만 못하다. 당연히 사람의 발길도 뜸해진 것이다.

녹음이 우거진 도산공원 휴식처 각광

어느새 현대고등학교 앞이다. 반대편으로 되돌아왔다. 땀이 식지 않는다. 은행나무 그림자를 밟으면서 걸어도 소용없다. 최근 한 신문이 인용했던 F. 스콧 피츠제럴드 단편소설, 젤리빈의 한 대목이 생각난다. “세 시의 거리는 뜨거웠다. 네 시엔 더 뜨거워졌다. 압구정도 로데오거리와 청담동 명풍거리를 둘러보는 일은 다음 기회로 미뤘다. 버스를 타고 도산공원으로 향했다.

도산공원의 울창한 숲. 사진=김경은 여행작가
도산공원의 울창한 숲. 사진=김경은 여행작가

녹음이 우거진 도산공원을 만났다. 살 것 같다. 정문에 들어섰다. 먼발치 정면에 도산 선생의 묘지가 보였다. 한 장의 현수막이 묘지를 반쯤 가리고 있다. 현수막엔 도산공원 및 도산 선생 묘소 이장식 사진전이라고 쓰여 있다. 도산 선생의 서거 85주년 추도 사진전이 진행되고 있었다.

그런데 왜 묘소 이장식 사진전일까. 도산 선생의 묘소는 도산공원을 조성했던 1973년에 망우역사문화공원에서 이곳으로 옮겨졌다. 도산 선생은 1938년 향년 60세에 돌아가셨다. 옥중 고문 후유증이 그 원인이었다. 1932년 윤봉길 의사 의거로 서대문교도소에 수감됐다. 1937년에는 수양동우회 사건으로 감옥에 갇혔다. 고문으로 그의 몸은 만신창이가 됐다. 그가 얼마나 많은 병고에 시달렸는지 알 수 있는 에피소드가 있다. 일본인 간수는 도산 선생을 키타나이야츠(·더러운 놈)’이라고 불렀다. 하지만 그는 1932년 감옥에 가지 않을 수도 있었다. 도산 선생은 생일선물을 사주겠다고 한 어린이와 약속을 지키려다가 일경에 잡혔다. 그 스스로 무실역행을 실천했음을 보여주는 유명한 일화다.

독립운동가 삶과 항쟁의 역사 도산공원

도산의 묘지. 사진=김경은 여행작가
도산의 묘지. 사진=김경은 여행작가

도산 선생의 장례식조차 변변히 치를 수 없었다. 일제가 방해했다. 일경은 장례식에 참석 인원을 20명으로 제한했다. 도산 선생은 망우역사공원에 모셔졌던 제자이자 비서인 유상규 묘소 바로 오른쪽 위에 임시로 안장됐다.

정문에서 묘소까지 사진이 전시되어 있다. 묘지 주변 역시 하나의 사진 전시장이었다. 사진은 한결같이 빛이 바래있다. 하지만 빛바랜 사진은 많은 이야기를 담고 있다. 독립의 의지와 열정, 대일 항쟁의 흔적, 수많은 위인의 표정, 도산 선생과 가족의 애잔하고도 특별한 운명까지. 덤덤한 흑백사진 속을 찬찬히 들여다봤다. 독립운동가의 삶과 독립항쟁의 역사가 그대로 녹아 있다.

묘지 앞에는 붉은 꽃 한 다발과 두 개의 음료가 놓여 있다. 묘지 옆에는 안창호 선생 이혜련 여사 묘라는 비석이 서 있다. 도산 선생에게 고개를 숙였다. 도산 선생의 고결하고 맑은 뜻을 기렸다.

말씀비. 사진=김경은 여행작가
말씀비. 사진=김경은 여행작가
도산가족사진. 사진=김경은 여행작가
도산가족사진. 사진=김경은 여행작가

도산공원은 독특하다는 인상이 들었다. 마치 수석 공원 같은 느낌이 들었다. 여기저기에 수많은 돌이 있다. 돌 속에는 도산 선생의 주옥같은 말씀이 새겨져 있다. “거짓이어, 너는 내 나라를 죽이는 원수로구나”, “거짓말을 잘하는 습관을 가진 그 입을 개조하여 참된 말만 하도록 합시다”, “낙망은 청년의 죽음이요, 청년이 죽으면 민족이 죽는다”, “나 하나를 건전한 인격으로 만드는 것이 우리 민족을 건전하게 하는 유일한 길이다”·······.

한 구절 한 구절이 마음을 울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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