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젠 강남구를 벗어난다. 서초구로 옮긴다. 강남구와 서초구에 겹친 대모산을 서초구의 첫 목적지로 잡았다. 강남 한복판의 녹색 숲, 대모산은 성은을 입은 산이다. 왕이 대모산이란 이름을 지었다. 조선의 임금은 할 수 없는 일이 없었다. 그렇다고 산 이름까지 왕명으로 하사한 일은 없었다. 왕명이 있기 전 대모산은 할미산이었다. 늙은 할머니처럼 산세가 평온하고 부드럽다고 붙여진 이름이다. 그런데 할미산 남쪽 양지바른 곳에 왕릉(헌릉)이 들어서게 됐다. 묘지의 주인은 태종의 비인 원경왕후다. 남편 태종은 할미산을 대모산으로 개명하도록 명령을 내렸다.

인릉. 사진=김경은 여행작가
인릉. 사진=김경은 여행작가
헌릉. 사진=김경은 여행작가
헌릉. 사진=김경은 여행작가

태종-원경왕후 쌍릉 헌릉’, 순조-순원왕후 김씨 합장릉 인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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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헌릉은 조선 왕릉 중 최대 규모를 자랑, 인릉은 초라대조적

대모산 남쪽에 자리한 헌인릉에 도착했다. 자동차로 한 시간 이상을 달려왔다. 헌인릉에는 조선 3대 태종과 원경왕후 민씨의 쌍릉인 헌릉, 조선 23대 순조와 순원왕후 김 씨의 합장릉인 인릉이 있다.

조선 역사는 왕권과 신권의 대립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런 측면에서 태종과 순조는 명암이 갈리는 대표적인 군주다. 태종은 두 차례의 쿠데타로 정권을 잡았다. 집권 후에도 절대왕권을 누렸다. 순조는 신권에 압도됐다. 결국 조선의 패망으로 이어진 안동김씨의 세도정치 포문을 연 임금으로 기록되고 있다. 왕릉도 두 왕의 생전 모습을 보는 듯했다.

두번의 쿠데타정권 잡은 태종...왕권 시대

당간지주형태의 홍살문. 사진=김경은 여행작가
당간지주형태의 홍살문. 사진=김경은 여행작가

3대와 23대 임금. 그 시차는 꼭 400년이다. 태종은 1400년에, 순조는 1800년에 즉위했다. 헌릉은 1420년 원경왕후가 사망했을 때 조성됐다. 인릉은 1855(철종 6) 서삼릉에서 대모산으로 천장(遷葬)했다. 왕릉은 400년이란 역사, 그리고 435년의 시차를 어떻게 표현하고 있을까. 궁금하다.

주차장에 차를 댔다. 주차장은 넓었다. 자동차가 가득했다. 35에 육박하는 폭서 속 왕릉의 숲. 더할 나위 없는 피서지다. 생각이 짧았다. 왕릉을 찾은 게 아니다. 왕릉으로 가는 길은 한가했다. 차 주인은 다 어디로 간 것일까?

주차장 한쪽에 깔끔한 한옥 한 채가 있다. 4칸이다. 예사롭지 않다. 재실이다. 주차장에 재실? 재실은 왕릉의 제사를 지내기 위해 지은 집이다. 제사를 준비하는 장소다. 제례 공간에 포함된다. 당연히 능역 안에 있어야 한다. 그런데 주차장에 있어야 할 사연이 있는 것일까.

헌인릉 정문에 들어섰다. 홍살문과 인조 부부의 무덤을 마주했다. 정문으로부터 채 20m도 되지 않는 거리에 홍살문이 있다. 왕릉이라면 꼭 있어야 할 금천도 안 보인다. 재실이 주차장에 있는 이유를 알 것 같다. 헌인릉 규모가 대폭 축소된 것이다. 정문 앞에 있는 관리사무소로 갔다. 마침 왕릉 문화해설사가 있다. 그는 현재의 현인릉은 본래 규모의 6.3%”라고 말했다. 그는 이어 인릉에는 금천이 없다라면서 동네 어른은 내곡동에 있는 국가권력 기관 입구 근처에 금천이 있었다고 기억하더라라고 말했다. ‘빼앗긴 헌인릉을 국가기관이 차지하고 있는 셈이다.

왕릉에 있어야 할 금천이 없는 이유보니...
 

인릉의 정자각. 사진=김경은 여행작가
인릉의 정자각. 사진=김경은 여행작가

눈썰미가 있는 사람에게는 공통점이 있다. 같은 것보다 다른 걸 쉽게 찾는다. 인릉 홍살문이 그랬다. 홍살문의 구조가 달랐다. 주춧돌 위에 기둥이 세워진 게 보통, 아니 흔한 홍살문이다. 그런데 인릉의 홍살문 기둥은 당간지주로 고정되어 있다. 당간지주는 불교 양식이다. 탱화를 거는 기둥을 좌우에서 지탱하기 위한 버팀기둥이 당간지주다. 절에서도 당간지주는 큰 홍살문 혹은 일주문을 세울 때 사용했다. 동구릉 외홍살문(능역 밖 입구에 세우는 홍살문)도 이런 구조다. 혹시 인릉의 홍살문은 왕릉 밖에 있던 외홍살문인데 내홍살문으로 잘못 세워진 것이 아닐까. 학자도 아닌 필자의 오지랖임을 양해 바란다.

홍살문은 바로 향로와 어로와 닿아 있다. 어로를 따라 정자각까지 갔다. 종전 왕릉탐사에서 지나쳤던 제수진실도(제사 차림상)를 유심히 봤다. 제사상에 생선이나 고기류가 전혀 보이지 않았다. 관람을 마치고 나오는 길에 문화해설사에게 그 이유를 물었다. 그의 설명에 따르면, 당시 서초구 내곡동은 산골 중 산골이다. 이곳에서 음식을 만들기 쉽지 않다. 궁궐에서 음식을 공급했다. 그래서 상하기 쉬운 음식을 제사상에 올리지 않았다. 과일(곶감, 밤 등)도 말린 것만을 쓴 이유도 거기에 있다.

정자각에서 비각으로 자리를 옮겼다. 인릉의 비문은 두 개다. 하나는 조선국(朝鮮國) 순조대왕(純祖大王)’, 다른 하나는 대한(大韓) 순조숙황제(純祖肅皇帝)’라고 쓰여 있다. 고종의 대한제국 선포 후 순조가 왕에서 황제로 추존됐다. 이에 따라 비석을 다시 만든 것이다.

인릉 능침으로 올라갔다. 왕릉을 이렇게 가까이서 볼 수 있는 것은 인릉이 처음이다. 인릉은 한마디로 초라했다. 합장릉임에도 봉분이 작았다. 병풍석도 없다. 난간석만 둘렀다. 거기다 문인석과 무인석, 석호, 석양 등 석물 대부분이 재활용품이다. 이곳이 바로 영릉(세종)의 초장지였던 것과 관련이 있다. 당시 이장할 때 석물을 땅에 묻었다. 무거운 석물을 옮기기 쉽지 않아서다.

초라한 인릉 병풍석도 없이 난간석만 둘러..

인릉의 석물들. 사진=김경은 여행작가
인릉의 석물들. 사진=김경은 여행작가
헌릉의 석물들. 사진=김경은 여행작가
헌릉의 석물들. 사진=김경은 여행작가

영릉이 이장한 것은 세종의 불행한 가족사와 관련이 있다. 많은 자식이 요절했다. 원손인 단종도 계유정난에 희생됐다. 그 원인을 묘터에서 찾았다. “부모가 묻힌 대모산에 묻히고 싶다라고 세종의 유언도 가족의 불행 앞에는 소용이 없었다. 영릉은 여주로 이장했다. 여기서 나온 수많은 석물을 인릉에 다시 사용했다. 이를 보여주는 것은 석양, 석마, 석호 등 동물상이다. 대부분이 조선 초기의 양식이다. 다리 부분은 비어 있다. 조선 후기에는 동물 다리 부분이 메워져 있다.

헌릉으로 왔다. 헌릉도 능침 바로 앞까지 오를 수 있었다. 헌릉은 조선 왕릉 중 최대 규모를 자랑한다. 봉분이 어마어마하게 컸다. 쌍릉은 병풍석에 난간까지 두른 당당한 봉분이다. 또 봉분 앞 석물도 컸다. 문인석, 무인석, 석호, 석양, 석마 등도 짝을 이루고 있다. 인릉보다 2배나 많은 석물이 있는 셈이다. 그 크기도 비교되지 않을 정도로 장대했다. 헌릉이 조성될 당시에는 국조오례의가 책정되기 전이었다. 상주였던 세종의 말이 곧 장례 의례였다. 헌릉 공사는 세종의 첫 건축 역사였다. 특히 불교식 행례를 하지 않은 최초의 왕릉이었다. 세종은 아버지의 장례를 개국창업주에 버금가는 수준으로 성대하게 치른 것이다.

능침에서 홍살문을 바라봤다. 그런데 어로와 향로로 두 개의 길이 나 있는 참도가 인릉과 달랐다. 향로가 없이 어로뿐이다. 헌릉 조성 과정에서 박석이 유실되었기 때문에 어로만 만든 것으로 보인다.

태종이 즉위한 후 태종과 원경왕후의 관계는 극도로 나빴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태종은 외척을 척결했다. 처남인 4명을 모두 죽였다. 원경왕후는 동생을 살리지 못한 죄책감에 시달렸다. 남편에 대한 원망으로 바뀌었다. 아들인 세종에게 절대로 태종과 같은 자리에 묘를 쓰지 말라고 부탁했다. 원경왕후가 죽은 뒤 2년 지나 태종도 부인의 뒤를 따랐다. 세종은 부모가 죽어서라도 해로동혈(偕老同穴)하길 바랐다. 아버지를 어머니 옆에 모셨다. 그만이 아니다. 두 개의 봉분 사이에 작은 통로를 만들었다. 영혼이 서로 소통하길 바라는 마음에서였다. 세종의 지극한 효성을 느낄 수 있다.

불교식 행례를 따르지 않은 최초의 왕릉

향로가 없는 헌릉의 참도. 사진=김경은 여행작가
향로가 없는 헌릉의 참도. 사진=김경은 여행작가

태종은 죽기 전 대모산을 수릉 자리로 정했다. 관건은 한강을 어떻게 건너냐는 것이다. 이때 조선 초기의 최고 건축사이자 헌릉의 설계자인 박자청은 부교(浮橋)를 건의했다. 마전도의 부교를 만들어 재궁을 운반했다. 조선왕조실록에는 평지 길을 밟듯 하였다라고 전하고 있다. 최초로 한강 아래 조성된 왕릉이 됐다.

헌릉의 비각에는 태종의 신도비가 서 있다. 인릉처럼 하나가 아니라 두 개다. 본래의 신도비(1424)가 임진왜란 때 훼손됐다. 비석의 귀부가 사라졌다. 숙종 때(1695) 새로 만들었다. 옛 신도비는 보물 제1804호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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