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근혜 정부의 마지막 민정수석이었던 조대환 변호사는 ‘나아감(남)과 물러남(듬)의 길(도)’을 뜻하는 자신의 책 <남듬길>에서 “민정수석으로 겪어 본 관료들을 봤을 때 개인 욕망에 매몰된 것을 보고 절망했다. 검·판사들도 정치영합형 또는 정치주구형(走狗型)이었다.”며 “그들의 동료이자 혹은 선배로 옛 선비들의 지행합일 의지와 경제세민의 노력을 알려주고 싶었다. 그 한 방법으로 ‘걷기’라는 고행을 했다.”라고 밝힌 적이 있다.

조 변호사처럼 ‘양심과 위엄의 길, 군자의 도’를 실천하는 현대판 참선비들이 없는 세태를 원망하면 무엇하랴. 보수 정당의 정치인들은 관료들보다 더 대오각성(大悟覺醒)해야 한다. 박근혜 대통령이 아무 죄 없이 탄핵당하고 보수가 궤멸되었을 때 중진 정치인들 중 과연 몇 명이 책임졌는가? 그동안 우리 정치가 소신과 철학을 앞세운 ‘지사형’ 정치인들을 키우지 않은 업보이다.

‘지부상소(持斧上疏)’는 나의 의견을 받아들이지 않으려면 머리를 쳐 죽여 달라는 뜻으로 도끼를 지니고 올리는 상소로, 고려의 역동(易東) 우탁(禹倬, 1262~1342)이 원조이다. 우리 역사상 지부상소로 자신의 옳음에 도전했던 기개 높은 선비는 역동을 위시해서 조선의 중봉(重峯) 조헌, 구한말 면암(勉菴) 최익현 등 세 사람뿐이다.

일본의 조선 침략을 예견한 조헌은 1591년 조선에 온 일본 사신의 목을 베라고 지부상소를 올렸고, 최익현은 1876년 강화도조약 체결에 반대하며 지부상소를 올렸다.

우탁은 고려말 시조작가이자 성리학자이다. “중국의 주역이 동쪽으로 갔다(吾易東夷·오역동이).”해서 세상 사람들은 그를 ‘역동 선생’이라 불렀다. 1262년(원종3) 향공진사인 우천규의 아들로 충북 단양에서 태어났다. 자는 천장(天章), 호는 단암(丹巖)·백운당(白雲堂)이다.

안향의 문하로, 안향과 백이정이 원나라에 가서 신유학을 받아들였다면, 역동은 ‘정주학(程朱學)’의 <역경(易經)>을 깊이 연구하여 후학들에게 전해주었다. <고려사> ‘열전’에도 “경사(經史)에 통달하고, 역학(易學)에도 정통하여 점괘가 맞지 않음이 없다”고 기록될 만큼 뛰어난 역학자였다.

역동은 영해사록으로 있을 때 고을에 요신(妖神, 팔령신)의 사당이 있어 민심을 현혹하므로 이를 없앴다. 또한 감찰규정으로 있을 때 충선왕이 선왕(충렬왕)의 후궁이었던 숙창원비를 숙비(淑妃)로 봉하여 패륜의 길로 들어서자 흰옷을 입고 부월(斧鉞·도끼)과 짚방석을 들고 대궐로 들어가 지부상소를 올렸다.

근신(近臣)이 두려워 상소문을 펴고도 감히 읽지를 못하자 역동은 호통을 치며 “그대는 임금의 패륜을 바로잡지 못하고 악으로 인도하니, 그 죄를 아는가!”라고 통렬하게 꾸짖으니 신하들이 모두 떨고, 왕도 부끄러워하는 기색을 보였다.

충선왕은 개혁군주였고 무도하지 않았기 때문에 윤상을 무너뜨린 자신의 패덕(悖德)한 행위를 극간한 역동을 징치(懲治)하지는 않았다. 역동은 이후 벼슬을 버리고 예안(禮安, 안동군 예안면)에 은거하여 후진 교육에 전념했다.

역동은 최초의 우리말 시조인 <탄로가(嘆老歌)>를 지어 어느덧 백발이 되어버린 자신의 늙어 감을 실감나게 표현하고 있다. “한 손에 막대 들고/또 한 손에 가시를 쥐고/늙은 것은 가시로 막고/백발은 막대로 치려했더니/백발이 먼저 알고 지름길로 오더라”

정몽주는 역동을 ‘동방사림(東方士林)의 조종’으로 받들었으며, 원 황제는 “주자(朱子)가 동방에서 다시 태어났다.”고 칭송했다. 이황은 역동을 ‘백세(百世)의 스승’이라고 흠모하여 안동에 역동서원을 창건하였다. 도학·충의·절조의 세 가지 덕을 갖춘 역동 선생을 경모하는 필자의 자작 한시를 소개한다.

殺身持斧肅邦基(살신지부숙방기) 몸을 희생하는 지부상소는 엄숙한 나라기초 되었고

萬古成仁隱水涯(만고성인은수애) 만고의 어짐을 이루기 위해 물가(예안)에 은거했네

變數奇談東國蔓(변수기담동국만) 점치는 재미있는 이야기는 고려에 뻗어나갔고

二程易傳震檀遺(이정역전진단유) 정호·정이의 주역을 전해 우리나라 후세에 전했네

人生有限何歎老(인생유한하탄로) 인생은 본래 유한한데 어찌 늙음을 탄식하겠는가

日月無停似馬馳(일월무정사마치) 해와 달은 멈춘 적이 없고 말이 달리는 것과 같네

後代宣城書院立(후대선성서원립) 후대의 퇴계는 예안에 역동서원을 설립하였고

千秋享祀奠蓍龜(천추향사전시귀) 오랜 세월 나랏일을 자문할 곳에 제사를 받들었네

일요서울 논설주간 우 종 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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